산천(풍수) 왜 하는냐가 있을 것인데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도닦는 것에 관심있다면 사고체계를 전환하겠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사고로서 자기의 사고형태를 이룰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데,
사고체계를 바꾼 다는 것은 영혼을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생각이 변한다고 하면 심심하게 들을 것인데 그런게 아닌 영혼의 변화, 그런 의미로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 사고의 체계가 바뀌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의 전환입니다. 대개는 별다른 생각없이 사고가 형성되고 아무도 사고를 체계젹으로 만들거나 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사고를 하고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무엇을 중점적으로 보는 사고를 하고 무엇을 위해서 사고하고 무엇이 사고라는 것이고 등 이런 것을 알려고 하지는 않는데 교육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기 이한 교육이지 학문이나 인간자체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서 그럴거라고 봅니다.
도를 배우는 것은 그래서 지금껏 방치하고 무과심한 인간의 성찰이고 공부이며 그로인해 우린 사고하는 것부터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또 긍정적인 것으로 되어가기 위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그러한 것에 산천이 뭐냐 사고하는 것에 뭔 도움이냐 한다면,
사물을 보는 것이어서 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건물을 보고 도로를 보고 산을 보고 강을 보고 형태를 보고 공간을 보며 살아갑니다. 즉 모든 형상들을 보며 살아가는데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이고 또 내가 다가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에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땅의 의지와 내 의지가 같으면 상관없지만 다르면 결국 내가 좌절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땅의 의지를 보면서 그에 따라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하고 행하는가를 정해가는 것을 해야 하게 됩니다. 땅의 의지를 부정하겠지만 말로는 부정하지만 막상 그들의 삶은 부정하지 않는 것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쉽게 서양인은 산천을 모르고 그것으로 건물을 짓지도 않고 살지도 않을거라고 하지만 물론 그래서 그러한 것에 우리 처럼 관심가지는 것은 아닐겁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는 집이나 건물이 모두 산천에 어긋날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우린 합리적으로 그러한 땅을 찾고 적용하려는 것이고 그들은 어쩌다보니 그리 된듯이 산천에 맞는 곳에 살고 만들고 들어갑니다. 그로인해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산천이라는 학문을 기준으로 땅을 보고 땅을 다루며 건물을 짓는 것이지만 서구인들은 우리와는 다른 방법으로 땅을 고르고 건물을 지을 것인데 서로간에 차이가 있다보니 서로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사실 우리가 더 앞선 학문입니다. 어떤 구조적인 건물의 안전성이나 기후나 지리적인 것으로 땅이나 환경을 보는 것에서 그로인해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고 어떤 사건에 부딪히게 되는지 말해준다는 것은 분명 또다른 학문입니다.
이런 것을 미신으로 보는 것이라면 또 거부감이 드는 것이라면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학문은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해소해 줘야 하고 좀더 나은 예측으로 다가오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 질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더나은 삶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전체적인 공동체에 내가 어떤 의도를 삽입할 수 있는지도 생각하게 되죠
좀더 앞날을 알고 싶고 그것을 위한 학문을 추구하는 것이 왜 비난하거나 안된다고 할 것인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선입견은 자천하는 사람이나 현명해지려는 사람이 건너가야 할 첫 관문입니다. 이걸 어떻게 다룰지 그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그다음에 학문을 하는 것입니다.
서구인이나 동양인이나 누구나 자기가 건물이나 뭔가 땅을 골라야 한다면 다들 자기의 마음에 맞는 곳을 고르려고 합니다. 그때 마음에 맞는 것이란 어떤 것이냐가 있습니다.
한창 잘나가는 사람은 밝은 곳을 택할 것이고 우울한 사람은 그런 곳을 원할 것이고 탈속을 원하면 역시나 그런 곳을 원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듯이 우린 자기의 지금 마음이 맞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할 거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곳도 그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적용하면 우리가 고른 땅은 마음에 맞든 아니든 그사람과 관련된 곳이 됩니다. 의식으로 고르는 것이 자기가 지배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심층에서 이미 정해진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라서 심층적인 장소가 이미 있고 그곳에 살게 되어 있고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의식은 자기가 좋아서 여길 고른 것이라고 하겠지만 이미 정해진 흐름의 다그침을 의식은 항상 모르죠
그걸 이론을 아는 사람은 이론을 들이대면서 장황하게 말하지만 이미 골라져 있는 것을 위한 이론 변명입니다.
그 많은 풍수자들의 하는 것이 이렇습니다.
심층은 나를 위하는 곳만을 택하지 않습니다. 심층은 내가 살아온 것이 모여 있는 곳인데 그런 모여진 내 과거의 흔적들이 통일성을 가지고 거기에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곳이나 머물 곳을 정하는데 이건 의지가 있는 것도 호불호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당연히 가야 할 곳을 정해갑니다.
가치판단이 아니라 인과판단입니다. 해온 것이 해가게 하는 것으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살아온 누적의 통일성, 그것이 이미 방향을 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 입니다.
이 심층의 방향은 사람들에게 전염됩니다. 그사람의 심층이 준 전염이 그사람을 그곳에 머물게 한다는 것입니다. 심층끼리의 교류이고 인정이고 합의이고 방법입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죠.
링컨의 묘는 분명 혈입니다. 게다가 더욱 정교하게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 놨습니다.
우리의 건원릉과 그 방식이 다르지 않다고 난 봅니다. 묘와 혈의 위치를 이용한 배치가 의도성이 있을 정도로 교묘합니다.
이것을 알아서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저절로 그렇게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다만 그들은 그런 산천의 학문을 부정할 것이고 그런 것으로 한게 아니라고 할 것이지만 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산천을 연구해서 혈을 찾아 들어가도 자기 생각과는 다릅니다. 지금 세간에 알려진 혈에 대한 지식도 당연히 그러합니다. 결코 혈을 찾을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안다고 혈에 들어가고 모른다고 못들어가는 그런게 아닙니다. 그사람의 심층에서 이루어진 것을 거스르면 안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나중에 언제고 다시 재조정 될 것입니다. 이말은 어떤 고인을 지관이 좋아서 좋은 혈에 넣어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는 그 고인이 만약 혈에 걸맞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이장되어가게 됩니다. 결단코 이건 분명한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한 것인데 누구나 분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해온 것이 있고 행한 일들이 있어서 그사람은 그 해온 것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행한 일이 유전자가 되어 구성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전자에 맞지 않는 곳에 살거나 머물면 본인이 힘들고 불편하며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땅도 불편하고 싫어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에따른 사건이 일어납니다.
간단히 말하면 물로 이루어진 사람은 물에 살아야 합니다. 그걸 후손이 몰라서 흙에 두면 안되는 거죠 다시 물로 갈 것입니다. 즉 그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그사람이 무엇으로 이룬 사람이냐 되고 그 이루어진 것에 맞는 장소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내가 노동자인데 정부 요직에 갔다두면 뭘 할 수 있어요? 벽돌을 나르는 것도 미장일을 하는 것도 전기 배선을 하는 것도 중장비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거죠.
이런 일을 낮추어서 나쁘게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명리나 뭐나 사람의 운명을 보는 곳에 그사람이 있어야 할 곳 그사람이 해야 할 직업, 그사람이 만나야 할 사람, 지위나 신분들이 대충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정해진 분수에 맞는 곳에서 살면 잘사는 것입니다. 즉 과거처럼 누구나 과거보고 급제해서 중앙에 진출하고 왕을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벌어먹을 가게 있고 회사있고 일해서 벌어 먹고 살 수 있고 가족있고 그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간단한 생활을 못하게 하는 것이 정책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우리가 재벌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정부 요직에 가고 그런 것을 원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의 영위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분수에 맞게 머물고 행동하면 살 수 있고 나아가 잘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땅도 그사람의 분수에 맞는 곳에 있어야 서로 좋다는 것입니다. 그걸 억지로 안맞는 곳에 넣어서 서로 힘들게 하면 결국은 재조정이 일어나고 그럼 이사가거나 이장하거나 땅이 무너지거나 사건, 사고나 일어나고 땅이 뒤틀립니다.
즉 이런 것이 심층에서 좌우하게 되며 그 심층은 살아온 세월이 통일성을 이룬 방향이고 성격이라는 것이며 이건 나를 넘어 주변에 영향을 부면서 그렇게 관계하면서 내 존재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억지로 혈에 넣을 것도 아니고 너무 안일하게 땅을 대하자는 것도 아니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면의 깊은곳에서부터 그리 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면 됩니다.
또 혈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오해들이 있는데, 아무리 부모가 또 조상이 대혈을 넘어 최대혈이나 엄청난 혈에 있어도 그 사람들의 행태는 별볼일 없습니다.
그대단한 혈의 기운을 타고 난 사람들이 고작 우리나라의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대단하다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서양인들의 쓰레기만도 못한 글들일 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견해를 제시하며 앞으로 갈 세계를 지배한 것이 있나요? 주자학이후 주자보다 나은 관념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나요? 차이나는 왕양명이 나와서 주자학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우린 그 비슷한 시기에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던가요?
있기는 고사하고 좋은 글을 쓰지도 못하게 하는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조선의 글들이 인간의 자유를 논하던가요? 우리의 평등을 논하던가요? 우리가 얼마나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게 하던가요?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던가요? 힘없고 약한 사람들에게 배려하고 살 수 있고 행복하게 하는 글이라도 있던가요?
그런 대단한 혈에서 기운 받아서 도대체 어디다가 쓴것인가요?
그따위 정도의 인간이 되는데 대혈까지 들여가면서 애써야 하는가요? 땅의 또 혈의 낭비 아닐까요?
그당시엔 왕에서 복종하고 체제에 얼마나 잘순응해서 벼슬하나 잘 받으면 되는 혈을 대혈이라고 추앙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찾는 이론이 생기죠 시민을 일깨우고 협력하고 먹을 것을 해결해주고 더 나은 삶을 제시하며 또는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역적이 날 자리라고 없애죠 그런 것을 찾는 이론도 있습니다. 철저히 짖밟기 위해서죠
지금 우리나라의 어떤 인간이 나라를 넘어 국제적이고 세계적이며 먼 미래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면서 기업을 운영하고 나라를 운영하며 문화를 창출하고 지식을 배우고 있을 까요?
이런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혈들이 얼마나 형편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존의 이론이 지금의 시대에 적합한 사람을 기르고 나게 하는 것인지를 다시 봐야 합니다.
그 어떤 혈보다 우선 시대의 혈이 우선입니다.
시대가 어떤 곳이냐 그 객관적인 세계가 혈을 지배하는 것이지 혈이 세계를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좀더 큰 시대를 만들고 이끄는 땅은 따로 있습니다.
이런 것이 아닌 것은 그저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런 시대를 좌우하는 혈이 허락하면 그제서야 그 혈들이 나라 넘어 나아가는 창발을 하겠죠. 물론 그런다고 혈이 아닌 곳에 태어나거나 사는 사람이나 조상의 묘가 없으면 안되냐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시대적인 혈입니다.
시대혈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전체를 다루기 때문에 전체가 그러하면 그 개개인은 그에 따른 효과를 저절로 얻게 됩니다.
이런 시대의 혈을 원할지도 모르겠는데 당연히 그건 불가능 합니다. 이걸 찾는 것엔 이론도 없고 볼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개인에게 응하지도 않습니다.
위에 얘기는 그렇게 했지만 서구인들 중에 유명하거나 이름난 사람들도 혈에 들어갑니다. 우리만 혈에 들어가서 뭔가 업적을 남기는 후손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느나라 어느 곳이나 같습니다.
어쩌다 터키도 가보고 인도도 가보는데 여행가면 꼭 그나라의 궁을 갑니다.
한예로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성들이죠 그런곳에 가면 제국이 되게 하는 난 원통니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꼭 있습니다. 이거 없는 궁에 제왕이 사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우리와 서구의 차이가 뭘까요 우린 그걸 알아서 조선시대같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지랄하는 것이고 서구는 모르니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심층이 하는 것이라서 알던 모르던 큰 차이는 없습니다. 시대혈이 하는 것에 개인의 무지는 다을 수 없으니까요 이걸 하는 자는 항상 숨겨져 있습니다.
또 안다고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것으로 하는 짓이죠
겨우 시체 집어 넣을 땅구하겠다고 썰 푸는 것을 보면 너무 하찮은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이나 뜻을 가지면서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대하는 사람은 이런 지식 없이 심층이 알아서 그럴만한 곳에 살게 하고 다니게 합니다.
무엇이든 내안에서만의 발로가 아니라 세상과의 교류에서 나오는 것이라서 그중에 땅도 응해가는 것이지 자기의 욕구대로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간의 교류이고 협력이며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땅도 이 세상도 다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말하는 것이 심층이 작용하는 것이지 개인이나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이론이 필요한 건 원래 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산천을 보고 나라를 보고 사회를 보고 사람을 보면서 마구라고 하는데 하나의 방향을 이끌기 위한 좀 더 큰 담론이였는데 그게 오해된 것이라고 봅니다.
혈은 그곳에 시체 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땅의 의미를 알기 위함입니다. 땅의 의지를 일깨우기 위해서죠.
그리고 여긴 도를 배우는 곳이고 시대혈을 다루어야 하는 것이라서 입니다.
정말 이걸 하고 싶은지 묻고 싶지만 일단 다 써놓기는 해야하죠
그리고 세상에 알려진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이지 이게 그거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거 모르고 했었으니까요 내가 그전엔 ㅎㅎ
그러니까 이론화 작업은 이론화이고 그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판단하고 다루는 세계의 깊이가 점점 더 공고하고 정밀해지길 바라는 것이고 그런 추세이고 그것이 옳다고 보기 때문에 이러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