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대한 얘기인데,
이건 여기저기 자주 썼습니다.
좌향을 정하는 곳에도 물을 기준으로 할 정도로 이걸 신경 많이 씁니다.
물을 기준으로만 좌향을 정하는 것은 아닌데 이걸 선호하게 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만물을 살아 있는 것과 살아있는게 아닌 것으로 나누거나 사람과 사물로 나누거나 그럴 것인데 물이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무언가가 들고 나는 것이 있는데 바람은 대인관계나 관념적인 것이나 감정이라고 하면 물은 사물이고 실재로 들고나는 것이고 재물이고인데 지금의 현실은 사람보단 사물이 들고나는 것에 민감하고 더 중요시 하는 세상입니다. 과거에도 이것을 중시했는데 그래서 물로인한 좌향법이 많죠. 차이나에서 정리한 거라서 그럴지도 모르고 서민은 오선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그런 것을 만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그다지 그런 철학을 가지고 땅을 보지는 않아서 뭔 생각으로 풍수를 공부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물이 들고나는 것에 사물이나 재물이라지만 사람도 됩니다. 여기서 주요한 것은 들고 나는 것입니다. 들어오고 나간다고 말할 수있는 모든 것들은 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은 변화입니다. 이것도 들고나지만 물에 기대여서 들고 납니다. 사물에 기대여서 들고난다고 하죠 즉 사람이 모이는 것이 나에게 돈이 많아서 모이거나 배울게 있어서 모이거나 주는게 있어서 모이거나 일, 장소가 있어서이거나 눈길을 끄는 뭔가가 있어서 오거나 이렇게 뭔가 있어야 오고 모입니다. 그런 뭔가가 있다는 그것이 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천천히 나가는 것을 선호합니다.
물이 천천히 나간다고 사물이 천천히 나가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런식으로 보기보다 들고나는 것을 내가 제어 할 수 있느냐를 말합니다. 나가는게 너무 빠르면 들고나는 것이 제어가 안되고 나가는 것이 주가 되어 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고 나는 것이 빠르냐 느리냐가 아니라 그 들고나는 것을 제어 할 시간을 주는냐 방법을 주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구가 어떻게 생겼느냐를 보는 것인데 뭐가 막고 있고 어떻게 막고 있고 그전에 전체적으로 명당의 국세가 물이 빠르게 나가게 기운 것인가 기울어도 어떻게 기운 것인가 평평한게 평평이 물을 가두는 것인가 아닌 것인가 이런 구체적인 형상을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물이 쉽게 나가는게 아닌가가 아니라 어떻게 나가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해서 입니다.
그래서 좌향이 물이 나가는 것을 막는 좌향으로 하기도 하는데 물이 나가지 못하게 노려보는 것인데 물의 변화를 지켜보겠다는 것이고 그런 성격의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런 후손이 되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좌향이 물이 들고 나는 것을 막을 물리적인 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봅니다.
산도 수구쪽으로 높아야 한다고 합니다. 즉 산이 능선이 이어지는데 수구에 해당하는 쪽에서 봉우리가 높아져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산이 수구쪽에서 높다고 물리적으로 물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꼭 이래야 합니다. 수구를 기준으로 물이 나가는 것을 막는 형상으로 산이 바위가 좌향이 건물이 나무가 있어야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야 사업을 해도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사람이 들어오고 기회를 만나며 자식이 태어납니다. 묘앞에 바위하나라도 멀리 있는 수구를 막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냐로 바위로 인해 험한 사건이 생겨도 결국 이득이 되는 것으로 결론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그것이 나에게 이로울지 해로울지는 수구와의 관계에서봅니다.
수구를 막거나 나에게 이롭게 자세 취하는 물길에 도움주면 강도도 오히려 날 돕게 되는 것이 됩니다.
앞에 칼모양이 있어서 장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칼앞에 물길이 나에게 이로워야 칼로 득세하고 이로운 것이 됩니다.
이런것인데 재물이나 사물이나 들고나는 것에 관심없으면 이런 것도 그다지 불필요 합니다.
그럴 수 있냐고 할지 모르는데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소유일 수 있느냐 세상을 등지고 사는냐 하는 것인데 때론 욕심없이 사는 분들도 있는데 그러면 굳이 물길 같은 건 안봐도 됩니다. 치악산에 가면 원천석의 묘가 있는데 이걸보면 욕심 없음이 이런 묘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거리를 따지기도 하면 또다른 해석이긴 하지만 성격급한 지금의 세상풍조에선 이건 묘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원리가 있는 것이고 이걸 어떻게 다룰지는 사람 마음입니다.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된게있다치고요
물이 빨간색으로 흐르는데 산이 저러합니다.
이러면 좋다고 안봅니다. 물이 빠져나가는 쪽의 산봉우리가 놓아야 하는데 혹은 머리가 그쪽이어야 하는데 이건 반대입니다. 물의 상류에 산이 높고 하류쪽이 낮습니다. 그래서 물을 적극적으로 막아주려는 의도가 없다고 합니다. 이러면 무정한 산입니다.
땅의 평평한 것을 본다고 합니다. 물이 느리게 흐를 수록 땅은 평평한 것이겠죠.
그리고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땅은 기울어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그 기운쪽에 산이 높은게 있으면 길한 것이 되고요 균형을 맞추는 것이 되니까요
좌우 균형을 보는 것입니다. 어디로 물이 흐르느라를 보고 기운 것을 보고 기운 것에따라 균형맞추는 것을 보는 거죠.
그리고 전후의 균형도 봅니다. 앞뒤로 보면 안산 조산이 있어야 서로 맞는데 명당을 보게 됩니다. 명당이 넓으면 안산이 먼 것이고 좁으면 가까운 것인데 좁으면 날 핍박하거나 거스르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멀면 반대로 긍정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겠죠. 명당에 서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 수 있는지가 내 무리가 크나 작나가 되죠.
그리고 다른 명당이 있는데 그건 얼마나 의지가 크고 광활성을 가지느냐 인데 얼마나 먼 산과 들을 내 영역안으로 들어오게 하느냐 입니다. 작게는 안산 까지 내백호나 내청룡의 정도의 국세안에서 사는 사람이고 멀게는 외백호 외청룡이고 조산이고 그 넘어의 또다른 강 넘어의 외백호 외청룡까지 멀리 다른 마을 다른 국새가지 아우르는 광대한 국새를 가지는 것도 있습니다. 땅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땅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의 의지를 가졌느냐가 얼마나 큰 국새를 활용하느냐가 됩니다. 이건 땅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산천(풍수)도 땅이 주는 길흉보다 그 사람이 가지는 의지의 크고 작음이 더 중요한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