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말하는 이유엔 내가 울소라고 하면서 도를 배운 사람의 감정이나 행동이나 세상일을 하는 것에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일종의 예를 들기 위함이고 우린 도라고 하는 지향성과 방법론을 말하고 싶은데 이런 것이 고대에서부터 오래전부터 형성된 이치라는 것입니다.
그 중간에서 논어가 형성된 것이고 그 이전엔 당연히 우리 고대 종족이 한 것이라고 하고 싶은데 이러면 국뽕 일지 모르고 그보단 우리의 지금 이후의 미래에 이러한 것으로 나라를 또 세계를 이끌기 위한, 즉 복고입니다. 과거가 되돌아온다는 것이죠 과거 고대 종족이 하고자 했고 해왔던 지향을 지금 다시 일으키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했으니 다시 우리가 한다는 것이고 우리외에 다른 종족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이 정도 한 거니 거기에 우리가 할 걸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나 도나 이건 먼 일이니 난 울소라면서 작게라도 뭘 하려는 것인지 알고 행하라고 하는 것이고 그런 세상이 되는 것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얼마나 이해하고 따라왔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지속할 것이니 좀 더 힘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여기는 도를 배우는 곳인데 그러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 그저 변명같고 그저 의례적인 거 같고 추상적이며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일 것인데 난 분명 그러한 세상이 되게 하려고 이러는 것인데 언제나 이걸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논어에도 못 알아듣는 제자뿐이고 그것이 현실이죠 지금도 역시 알아듣는 분은 적을 것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의도한 데로 진행되어가는 것이어서 여러분들의 노고가 결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논어의 번역을 상당히 비꼬든가 삐딱하게 보는 것으로 하는데 이게 언짢게 보일 수도 있는데 너무 공자님이나 논어님의 번역으로 해서 진지하고 경전 보듯이 한다면 그럴 것인데 그냥 일상의 대화이고 사람 사이의 감정이고 지식이라서 일상적인 대화로서 그냥 해석하는 것이다.
글만 보고 분석한다면 딱딱하고 지루한 학문의미일 거 같지만 일상의 사람 간의 대화라고 보거나 또 어떤 학문이든 결국 일상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이어서 난 이렇게 번역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지 논어가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일상이 다시 사회가 공동체가 세상이 되어가는 것이니 그 작은 곳에서 큰 곳으로 이어져가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자로가 정치를 물었다.
자왈 "자기가 먼저하는 것이고 힘써해야 한다."
'더 말해주시죠'
자왈 "게으르지 마라"
<평범해 보이는 말이다. 자로가 가장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일부러 자로에게 맞추어서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이게 흔히 "니가 먼저 하고 그다음에 시민이 힘써 일하게 하라"라고 번역한다. 솔선수범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건 뭐든지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모범이 되고 그 후에 그걸 남을 시키는 것이 되게 하는 것인데 모범과 남시키는 것 사이를 난 더 구분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쉽게 남을 시키는 것으로 가지 못하는 것을 아는게 먼저이다.
우선 자기가 힘써 일하고 먼저 하고 그것뿐이다. 누가 보든 무엇을 위해서든 이런 것은 나를 넘어 다른 것이 된다. 그래서 우선 자기가 하는 것에서 그리고 끝까지 완수하고 이걸 잘하면서 그다음이 내가 하는 것이 모범이고 남에게 뭔가 의도를 보이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순서나 내적인 것부터를 모르면 처음부터 허영이다. 이건 경계한다고 앞에서 말했다.
이건 처음부터 정치이니 백성을 다루는 방법이라고 보는 것 같은데 범주를 자로 개인의 수양으로 한정하면 먼저 하려 하고 끝까지 해야 한다가 되기도 한다. 그다음이 먼저 하고 그다음에 시민을 시키는 것이다 라고 해야 한다. 예가 그러하다. 순서가 그러하다.
정치를 자로 개인에 수양에 한정하는 것이 이상할지 모르나 언제나 말은 정치 같은 것을 논하면서 자기가 뭐 된 양 한다. 예나 지금이나 분수를 잊고 더 크고 대단한 것을 논하면서 자기도 그것과 연관 있는 듯한 착각을 즐기면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수양이 부족한 것이니 그러면 안되고 언제나 자기로부터 이고 자기가 온전해지면 그다음으로 가는 것이다.
애초 자로 따위가 정치를 묻는 것이 허세 떨지 말라는 것이기도 하다.>
중궁이 계씨의 가신이 되어 정치를 물었다.
자왈 " 담당 관리가 전문가이니 그들에게 맡기고 작은 허물은 용서하고 인재를 등용해라"
중궁 왈 '인재를 어떻게 알아보고 등용합니까?'
자왈 "니가 알아보면 등용하는 것이고 못 알아보면 누군가 알아보고 쓰겠지"
<글이 재밌달까 웃기달까 도가적이랄까 아니면 그냥 냅두면 된다는 식이다.
전문가에게 맡기고 용서하고 인재 발탁해서 맡기라고 하면 이 중궁이 뭘 해야 하는 것일까?
게다가 니가 사람을 알아보면 발탁하지만 못 알아보면 마는 것이라고 하니 하라는 것인가 말라는 것인가?
이 정치에 대한 것은 임금에게 할만한 말을 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겨우 남의 가신이 되어서 뭔 정치를 묻나 하는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은근히 비꼬는 것인가? 임금이나 하거나 임금을 보좌할 경우에 하거나 하는 말인데 계씨의 가신 정도로 이게 되나? 하는 뭐 그런 별로인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계씨의 가신 정도면 그냥 요즘은 회사원이다. 아니면 권력자를 따라다니는 비서들인데 이런 정도가 정치를 하는 것인가?
'니가 아는 사람중에 인재를 뽑으라는 번역이 된다한다.' 난 니가 알아보면 뽑고 아니면 알아보는 남이 알아보고 뽑을거라는 식으로 번역했는데 어떻게 사람을 알아보냐고 물었기 때문에 내가 아는 사람중에 인재가 될만하고 아니고를 어찌 아나 하는 반복적인 질문이 가능하니 이거보다 니가 알아볼만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지 그걸 일일이 어찌 다 말해주나 하는 약간의 짜증이기도 하다고 난 번역했다.
그리고 잘못하면 내가 아는 사람이란 측근 발탁이라 인맥이나 연줄이라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서 이상하다고 본다. 이 중궁이 집안이 미천한 사람인데 그런 신분을 상관 않고 능력으로 사람을 봐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 사람인데 그래서 공자는 이 중궁을 남면 할 만하다고 했다 한다. 남면이란 임금이 앉는 방향이다.
그런데 여긴 다른 의미도 있다.
관리에게 맡기라는 것이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 그 분야에선 그 분야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니 잘 모르면서 나서거나 아는 척 이거나 하는 것은 정치에선 안 통한다.
한 번의 실수는 나라의 큰 문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 그것을 알아야 드디어 앎이 뭔지 알게 되고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이 뭔지 알게 되고 사람이 어떠한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정치하는 사람은 뭘 모르고 뭘 잘 못하고 뭘 도움받아야 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그 사람이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니 이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위의 말은 이런 의미가 함축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작은 것을 용서한다는 것이 감정을 내세우지 말고 사람을 볼 때 정치에 해가 될지 아니면 사소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라서 이것도 사람 아는 것이다.
작다는 것이 그냥 작은 것이 아니라 잘못이 있더라고 그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나 그 잘못이 이 일을 하는 것에 해가 되거나 문제가 없으면 용서하기도 하는 것이 된다.
그러려면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나쁘다 하는 것이라서 용서란 사람 자체에 대한 용서도 된다. 한두 번 잘못이 있다 해서 그 사람이 못된 인간이 아니라 행위가 잘못된 것인데 이건 사람을 그런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위로써 행위에 대한 판단을 하지 사람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항상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남도 그렇다. 그 사람이 어제 그러했다고 오늘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그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보려는 것이고 지금의 상황에서만 보려는 것이어서 그렇다. 그래서 사람이 어떠하다 판단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라고 고정된 사물로 보는 것을 안하는 것이다. 사람은 없다. 지금 뭔가 행하는 그 존재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사람이 어떤 사람이다라는 것은 없다. 지금 뭔가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실생활에서 하려면 정말 힘든 것이다. 누구나 사람을 미워한다. 그 행위를 미워하지 못한다. 이걸 구분하는 것은 너무 힘들어한다. 이성이 아니라 그런 행동으로 하는 것을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더 설명하려면 엄청 길어지는 것인데 사실 이 몇 줄 안 되는 것에 전제된 내용은 너무도 길다.>
자로 왈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시고 정치하려고 한다면 장차 뭐부터 먼저 할 것이오?"
자왈 '반드시 정명이다.'
자로 왈 "내 이럴 줄 알았다. 선생님은 참으로 시대에 둔감합니다. 하필 그런 바름이오"
자왈 "그러는 넌 무식한 것이다. 군자는 모르는 것에 함부로 떠드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하지 않고
예악이 흥하지 않으면 형벌이 적절하지 않고
형벌이 적절하지 않으면 백성은 손발을 둘 곳이 없다.
고로 군자는 이름에는 말이 있는 것이고
말에는 행함이 있는 것인데 군자는 그 말에 어찌 구차함이 있겠는가?"
<이것이 위나라 임금이 아버지가 다른 나라에 망명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와서 임금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니 거부하는 사건이 있는데 그런 때에 이런 대화를 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정명이 어쩌고 하는 것이 아버지에게 임금 자리를 주는 게 맞다는 것이 되어서 자로가 답답하다는 듯이 상황 파악이 그따구냐고 하는 말이다. 고지식하게 이론이나 나불 될게 아니라 현실의 사정을 잘 보라고 하는 듯하다.
공자는 여기에 빡쳐서 자로 보고 野야라고 하면서 무식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구차하다는 말이 너무 현실 중심으로 하면서 이권에만 매달리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말하는 것을 보면 이러면 이렇게 되고 다시 이렇게 되고 다시 이렇게 되면서 순서적으로 쭉 나열하면서 점차 확장하면서 말한다. 이것이 시적인 표현이거나 운율을 맞추려고도 하겠지만 그전에 맥락적인 사고를 해서 그렇다.
사고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사회에 일이 진행하는 것을 순차적으로 되어가고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일이 벌어져가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게 역학의 원리이고 세상이 변화하는 원리이고 또 공자 스스로도 이렇게 사고하는 습관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공부하면 맥락이라는 것이 보인다. 사회적인 맥락, 사람의 사고 맥락, 감정의 맥락, 이런 것이 이래서 이렇고 저래서 저렇고 하는 것이 순서적으로 나열되는 이해가 있다. 이것을 경험하거나 할 수 있으면 공자의 이런 말이 이해가 쉽다. 그래서 공자도 이런 것이 보여서 이렇게 말했다고 본다. 이게 공자의 말이 아니라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 흉내이기도 하다.
여기서 명이라는 것이 뭔가 하는 것이다. 正名정명인데 이름이라고 하는 이 명자가 뭐 그리 대단할 게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은 철학적인 소양을 가져보지 못하거나 공부를 해보지 못한 사람이 된다.
자로가 인문적인 공부가 뒤떨어지니 정명을 말하자마자 '아~ 또 그런 답답한 소리 한다. 시대 파악도 못하는 고리타분한 말'이라고 핀잔을 주는데 지금 이 시대에도 인문이나 철학적인 것을 싫어하거나 돈이 안된다고 하거나 쓸데없다거나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자로의 수준이라고 하겠다.
뭔가 사고하기 위해선 우선 단어의 정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로 그다음의 말들이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난 자연이 좋다"라고 말한다면 그 자연이 산천초목이냐 아니면 도덕경의 자연이냐라고 하면 어떤 의미의 자연이냐로 갑자기 골치 아픈 사고로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로는 답답해한다. 그런 먹물 먹은 자들이 하는 짓이 한심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어도 제대로 모르면서 말을 하면 그게 말인가 그저 감정을 토로하고 명령이나 하고 억압하고 자기 욕구를 분출하는 용도로만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임금이나 정치하면서 뭔가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을 한다면 말이 그럴듯해야 하고 정합적인 논리체계도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단어의 의미부터 고려해서 선택하며 말해야 하지 않는가? 이름이 왜 중요하냐고 하는 것은 말하는 것에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누구나 걷는 거라서 걷는 게 원리가 뭔지 몰라도 다들 걷는다. 그런데 다리를 다치고 관절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 걷는 원리를 알아야 고치고 안 다치고 관절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자기가 모르면 아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다. 자기가 하려면 그제야 다리를 연구하고 걷는 걸 연구한다.
즉 필요성을 느끼는 것인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고 관심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름이나 단어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사고하는 것에 깊이를 가지려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 되니 공자의 욕이 심해지는 것이다. 이런 무식한 쉐끼야!
그래서 이름이란 사물의 이름이지만 단어가 되고 정명이니 正은 규정하고 정의하는 것이다. 어떤 이름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단어의 정의를 하다 보면 아는데 이런 의미로 말할 경우 저런 의미로 말할 경우 또 내가 정의한 것과 듣는 상대가 알아듣는 것의 차이가 있는데 이건 내가 정의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의미와의 차이가 보이는 것은 내 단어에 정의를 해서 나와는 다른 상대의 정의가 보이는 것이다. 서로 간의 차이를 보는 것이 서로간의 사는 방식의 다름이 되고 그 사는 방식이 예악이 되며 이런 것이 될 때 정명은 왜 그렇게 정의하느냐의 이유는 그렇게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의 일치가 되는 것이 되면 그 형벌에 신뢰가 있어 원망이 적어지게 된다. 그래야 시민은 뭘 할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정명은 다시 이론체계 언어체계 사고체계가 된다. 이러한 정합적인 이론이 정합적인 행동이 되어가며 이것이 말은 행하게 되는 일치로 나타난다. 정명이란 행동하기 위한 정명이지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그러한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규정이라서 이건 행동 규정이다.
그건 그러한데 여기서 꼭 아버지에게 임금을 우선 물려주는 것이 정명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도 그렇다. 굳이 아들이 임금이 되고 있는데 가서 자기가 먼저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버지인가 순서라는 것이 머든 아버지부터인 건 아닌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아버지가 죽었거나 죽은 거와 같은 상황이거나 위급한 지경이거나 등등) 건너뛰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순서인데 공자가 고리타분한 것도 맞는 거 같다.
하다못해 공사판에서도 자기들이 쓰는 전문 용어가 있다. 그것이라고 하면 그것이라고 딱 알아듣고 일하는 것이 된다. 그걸 다르게 알아듣고 일하면 어떻게 일이 진행되나 또 일상에선 그다지 못 알아듣는다고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그게 쌓이면 다투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이름은 사용하는 장소나 공동체나 그 시대나 장소에 따라서나 다르게 정의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자기가 속한 곳이나 시대에 따른 말이 있고 용어가 있고 법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정확하게 인지되어 있어야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고 행동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에 어떤 규칙이 있는지 알아야 그것을 준수하든 아니든 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그 규칙을 형성시켜야 한다. 규칙을 형성시키는 방법이 이런 것이 있다고 말만 해서는 안되고 직접 이건 이러한 것이라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임금이 그 규칙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그 규칙이 실효성이 허물어지는 따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름을 정해 가는 것이다. 이름이 정해가는 것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데 이득이나 이권이 있는 곳에서도 그들끼리의 개념이 있고 통하는 의미들이 있는데 서로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면 같이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말할 땐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하면서 말하고 누구의 말을 들을 땐 그 사람의 의미가 뭔지 명확해질 때까지 들어야 하고 알려고 해야 한다.
그래서 군자는 모르는 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고 시작하는 것이다. 공자가 뭔 말을 하는지 듣지도 않고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대뜸 비아냥을 하는 것이 경솔한 것이다.
이것이 나라와 정부로 가면 그들의 정책이고 말이며 법이 되고 원칙이 되어간다. 그런 것에 그만한 체계와 정합성이나 합리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누가 그 말을 믿고 따르게 되겠나 거기에 말한 대로 실천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나라도 아니고 정책도 아니고 더 말할 게 없다. 나라에서 이름을 정해 가는 것이 이런 이름이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름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이건 어떤 곳에서도 그러하다.
우리 가정에선 욕하면 안 된다고 아버지가 말하지만 그러면서 아버지가 욕하면 이름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욕을 하지 말아야 그것이 이름으로 그 가정에 정해져 가는 것이다. 말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행하고 있고 그런식으로 서로 인지하고 있고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이름이기도 하다. 근데 아무도 이걸 무엇이라고 이름 짓지 않아서 그게 뭔지 모르는 것이기도 한 그런 것도 있다.
그리고 이름이 여러 개가 정해지기 시작하면 이름끼리의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러면 하나의 철학 체계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어떤 사상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말인지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 말을 하면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기반이나 바탕적인 이론이 뭔가? 어떤 근거로 말하나 어떤 정합성을 근거로 말하나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체계나 사상체계가 사고체계가 있으면 아무렇게나 말할 수 없고 그 말은 그러한 사상적인 바탕을 근거로 말하게 되어 있다. 자기의 지식을 바탕으로 말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면 그 말은 행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런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행동할 수밖에 없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론체계와 말을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면 일이 이루어지고 예악이 된다.
예악은 문화이다. 그 나라나 지역에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지는 현상이 있으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데 그것도 하나의 이름이나 말이 이어져서 오랜 체계를 형성해가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즉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규칙을 알고 그렇게 습관이 되어가면서 그지역에서의 예악이 되어간다. 이름이 그러해서 그러한 예악이나 문화가 된 것이기도 하고 그런 문화라서 그런 이름과 말을 하게 된 것이기도 하면서 서로 뒤섞일 것이다.
즉 우리나라 사람이라서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남을 배려하고 남을 욕하는 사항이나 사건들이 있고 칭찬하는 사건이나 사항들이 다른 나라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문화가 예악이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이름과 말 행동이 그런 예악과 문화라는 것이 되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면 이름은 자기가 정해 가는 생각이고 예악이나 문화는 사회나 밖에서 정해가는 생각이다. 개인의식과 집단의 의식이 있다고 해야 한다.>
번지가 농사짓는 방법을 물었다.
공자왈 "난 늙은 농부보다 모른다."
다시 채소 기르는 것을 물었다.
자왈 "난 채소 기르는 늙은 농부보다도 모른다."
번지가 나가자
자왈 "번지는 소인배이다. 위에서 예를 좋아하면 시민이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위에서 의를 좋아하면 시민이 따르지 않음이 없고, 또 위에서 신뢰를 좋아하면 시민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러면 사방의 시민이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모여 오거늘 농사짓는 것을 묻냐?"
<우선 격이나 체면을 기준으로 말하면 우린 정치하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고 시민에게 뭔가 더 나은 길로 나아가게 하려는 사람인데 농사짓는 것이나 물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범주가 다르다는 것인데 그런 기술을 몰라도 그들을 이끌 것이고 몰라야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엔 농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사람, 다양한 인종, 다양한 기술직, 종교적 성향, 전공의 차이, 남녀나 소수의 성들이 있을 것인데 그런 하나의 전문적인 것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농부 기술을 알면 농부만 편애한다는 인식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것만으로 나라를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잘 아는 것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상식이니까
또는 번지가 지금 니가 배울게 그게 아니라 우선 정치를 배워라 그다음에 다른 것을 해도 되는데 지금 순서가 틀렸다는 것이 된다. 학문이 안되고 있는데 다른 것에 눈 돌리니 완물상지라고 뜻이 엄한 데로 가고 있는 것이다. 뭣이 중한지 그걸 모르니 답답한 것이다.
또는 공자 스스로의 말이 사실이기도 할 것이다. '난 농사 모르고 채소 기르는 거 모른다'이다.
그걸 알 필요는 없다. 공자가 그걸 안다고 더 위대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논점이 흐려지는 것이다. 우리가 공자에게 바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농사하는 것에 남다른 지식이 있다고 해서 대단하다고 하면 안 된다. '머 대단하시네요' 이런 비아냥 아닌 비아냥이 다다. 거기에 대고 "우와 대단하세요 그런 것도 할 수 있고" 이러면 아부다.
그런 거 익힐 시간에 학문이나 수양을 해서 이상한 짓이나 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파악해야 하고 그런 것을 위한 학문이 있고 지식이 있어야 하고 도와줄 사람을 차 자아야 하고 할게 얼마나 많은데 겨우 기술이나 익히고 있나 그에 아니면 최소한 언행일치라고 말한 것을 지키기라도 바라는 것이 얼마나 많던가 공자도 그런 것을 익힐 시간에 공부한 것이다.
또 그런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농사일을 가르치면서 뭘 하려는 것인가 농사로 가족을 부양하는 것과 학문으로 나라를 부양하려는 것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번지 놈이 참으로 한심하다 할 것이다. 공자를 농사나 가르치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라서 그렇다. 도를 능멸하는 것이다. 이러면 정말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다.
정 알고 싶으면 그런 것은 농부에게 물으면 될 것인데 그것을 굳이 공자에게 묻는다. 이렇게 눈치 없고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놈이 제자란다.
공자가 평생을 꿈꾸어 오고 한스러워하며 살아가는 그 치열한 것에 왜 하필 농사를 물으면서 기빠지게 하는 것인가
공자는 뭐든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이것도 웃기는 일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 왜 다 알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보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
항상 말하는 그것이 있는데 그것 이외에 이것도 알려달라고 하고 저것도 알려달라고 하고 이러면서 이미 응석이다. 응석으로 넘어가면 가르침이 의미가 없다. 배우려는 자세도 없으니 그냥 내쳐야 한다.
이런 범주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은 것인데 흔히 하기도 하는 짓이다. 수학을 평생을 가르쳐 온 사람에게 그건 댓고 양자역학 좀 가르쳐 줘 하는 것이다. 이건 존재 무시이다. 수학을 가르치면서 자기 인생의 존재성을 구가해 왔는데 갑자기 이건 뭔가
그리고 불경, 불복, 불용정 이런 말을 각운 맞추어서 한다. 여기에 ~莫막을 써서,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 복종하지 않음이 없다. 좋아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는데,
공경이 지금은 그다지 쓰지 않는 말이다. 이것이 위 사람이나 나이 든 자나 직장의 상사나 노인공경같이 꼰대나 갑질이나 이런 것과도 연결되는 거라서 그런데 이건 경자를 잘못 이해해서 그렇다.
예를 좋아하면 불경하지 않는다는 것이라서 내가 부드럽게 대하면 남도 브드럽게 대해온다는 것이다. 자기는 엿같이 행동하면서 나이나 직위로 공경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런 식의 논리는 애시당초 없다. 자기가 하지 않고 남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것이 오히려 불경이다. 상대가 하지 않는 것에 참견하는 것 역시 예가 없는 것이다. 항상 어설프게 배운 것이 헛짓을 하니 이상하게 변질된다. 분명 위에서 예를 좋아하면이라고 전제를 한다. 이런 전제를 하지 않을 경우 불경하는 것이 맞다는 것으로도 된다. 이런 전제 없이 떠들거나 행동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걸 알아야 한다. 전제된 것이 있어야 한다.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래도 되는 명확한 이유와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가 무례한데 내가 예를 지키면 간사한 놈이다. 아니면 상대를 뒤통수치는 것이다. "넌 무례한 인간이지만 난 예를 지키는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거만해지는 것이니까
그래서 지도자가 무례하면 내치거나 그에 다른 절차를 밟는 것이 맞다. 그래야 더 큰 나라의 분란을 막는 것이다.
상대가 뭐라 하든 뭘 하든 따르기만 하면 이건 이미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버린 것이다.
그래서 '복종하지 않음이 없다'라는 것도 상대가 의를 행할 때이다. 의로운 자에게나 의로운 것에 따르는 판단으로 대 할 수 있다. 그게 아닌 불의한 자에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뢰가 있는 사람에겐 情이라고 하는데 좋아한다고 번역했다. 믿음이 미덥다가 되고 사람에 대한 신뢰는 감정으로서 무한 신뢰라고 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자왈 "시를 300편을 외우고도 정치를 맡겨도 잘하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보내어도 제대로 응대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
<시경이라고 하는 것으로 내려온 것을 말하는데 이게 뭐 대단할 것으로 말하지만 그냥 유행가이다. 시라고 하면서 또는 시조라고 하면서 공부한 자들이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역시 노래 가사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말하고 싶은 욕구의 드러 남이라서 같은 것인데 형식이 다름으로 더 대단하고 덜 대단하고로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건 다르다. 이건 다르다 식으로 뭔가 차별을 두려는 심뽀는 무조건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여기서 시를 외우는 것을 대단한 듯이 하는가 시를 외우면 정치도 잘하고 외교사절로서도 잘하는 듯이 말하는가라는 것인데.
이건 지금으로 말하면 예악이라는 것이 문화인데 그중에서 시는 연예예술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국운을 만들 때 영화, 노래, 미용 같은 것이 먼저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건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 잘 표현하는 것이고 그 시대의 흐름을 가장 먼저 나오게 하는 것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노래를 아는 것이 지금의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처음이다. 이것이 사회를 이끄는 처음이기도 해서이다. 그래서 시를 안다는 것이 상대를 아는 것이고 사회를 아는 것이고 세상을 아는 것이 된다. 현실을 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자기 이념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을 보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시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시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떤 시가 만들어지고 유행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까지 가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걸 아는 것이어야 해서이다. 그렇게 유행을 알고 사회의 흐름을 알아야 정치할 수 있고 사람 응대하고 영업하고 외교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왈 "자신이 바르면 법령이 아니라도 행하고,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법령이라도 따르지 않는다"
<이게 한문이라서 명확하게 번역하는 것이 애매하다. 其身正이라서 그 사진이 바르면이거나 몸이 바르면이거나 할 것인데 과거부터 정치인이 권력자가 바르면 시민은 알아서 따를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리고 지금으로선 그냥 내가 바르면 법이 아니라도 행하고 바르지 않은 자는 법이라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개인의 수양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바르지 않는 놈은 법도 안따르고 불법적이고 제멋대로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법령이 단순히 한 사람의 명령이 아니라 법으로 만들어진 규율이다. 그래도 정치하거나 법을 행하는 자들이 그에 따른 인격이 아니면 별로 법에 따라 행하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요즘 같은 대규모 사회와 인구에선 이런 것이 과거와는 다른 부분이 있기도 하다. 민주주의이고 법치주의라서 역시 다르다. 정치하는 자나 법을 행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 이건 그와 상관없이 법을 준수하는 것이 좋다.
이유는 그것이 사회에 이롭고 더 나은 세상이 되며 정치인이나 법을 행하는 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서 그렇다. 과거엔 정치하는 자들 임금이나 그들을 위해 하는 듯도 해서 그랬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아니라 더 큰 세상이고 사회이며 스스로 책임을 지고 판단하면서 사는 세상이라서 그렇다.
분명 이건 대단한 사회발전이다. 다스리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고 사회 공동체 전체가 주인이다. 물론 주권이 시민에게 있는 것은 맞는데 그런 것이 개인에게 있다기보다 개인 전체라는 말이 좀 이상하지만 이런 식이다. 그 누구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체계라는 것이다. 이런 개념이 과거에는 없었던 것이 된다. 지금도 명확한 것인지는 애매하다. 아직도 민족이나 인종을 들먹이기 때문이다. 민족이 하니라 사회이다. 이건 다른 것이다. 사회 구성원은 인종도 종족도 민족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성 구분이나 다양한 취향이나 차이들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이런 개인에 종속된 사회가 아니고 소수집단이나 종교가 차지한 것도 아닌 그 이상의 체계로 인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이 뭘 하든 어떤 인간이든 그리고 사회에 어떤 사람들이 있든 상관없이 우린 준수해야 할 건 하고 옳다는 것을 행할 의무가 생긴다. 더 큰 체계에서 보는 그것이 우리가 보는 기준이라서 그렇다. 권력자를 법을 다른 규율이 아니라 그런 것을 다 합친 사회체계이다.>
공자가 위나라의 공자 荊형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는 재산을 잘 관리했는데 돈이 처음 생겼을 때 말하길 '이러면 적당하지'라 하고,
좀 넉넉해지려고 할 때 말하길 '이러면 되었다' 하고,
부유해지니 말하길 '이러면 보기 좋다'라 말했다.
<苟合-구完-구美 이런 말인데 이게 일부로 말을 만들면서 운을 맞춘 건지 모르겠는데 '진짜 합당하다. 진짜 완전하다 진짜 아름답다'식이다. 이 구라는 것이 진실로 이거나 구차하다거나 그런 의미인데 의미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있으니 이게 뭔 말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게 "그런데로"라는 의미식으로 풍족한 것도 그렇다고 부족한 것도 아닌 그 둘 다이거나 그 사이 어디거나라서 애매한 말이고 이런 애매한 말을 하는 것이 풍족해서 들뜨거나 부족하다고 쳐지는 것을 경계해서 적당한 감정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겠다.
'그런대로 합당하고 그런대로 갖추었고 그런대로 아름답고' 라면서 돈으로 인한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없어서 좌절하거나 아쉬워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라서 이걸 칭찬하는 듯한 말일지 모르겠다. 돈이 무조건 무시하거나 더럽게 여기는 것도 세상 물정 모르는 것이고 너무 집착하는 것은 탐욕일 뿐인 거라서 그 적당한 마음 다룸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을 하는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것이다. 분명 이러지 못함이 인격의 기준으로 된다.>
공자가 위나라 갔을 때 염유가 수레를 몰았다. 자왈 "사람이 많구나"
염유왈 '사람이 많은 다음에 뭘 해야 할까요?'
자왈 " 부유하게 해야지"
염유왈 '부유한 다음엔 더 뭘 해야 할까요?'
자왈 "교육이지"
<상당히 상식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많으니 먹고살게 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문제가 줄어들고 더욱 활기찰 수 있다. 그리고 배가 부르면 지식욕이 생기는 것이고 뭔가 자기를 발산하고 싶은 것이니 그걸 해야 하는 것이다. 배부르고 등따수면 고상해지고 싶은 것이니까 이게 당연한 것이라서 이런 방향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다.
더 잔소리를 하면 부유해지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어느 정도까지 부를 원하느냐이다. 지금 보면 무한한 돈에 대한 탐심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산다. 한 사람이 지구 전체를 소유해도 부족하다고 할 상황이다.
이건 그렇게 알게 해서 그렇고 그런 정도의 세계적인 교류가 일어나서 그렇다. 단순히 사람이 욕심이 끝이 없어서가 아니라 국제적인 관계망이 또 문명의 변화 양상이 그런 소유를 해도 어쩌면 부족하다고 느낄 만한 변화와 세상이고 그렇다. 이 말은 내가 뭔가 생산해도 마을에서나 유통하는 정도이면 소유욕 또한 마을에서 좀 더 가지는 사람이지만 나라와 유통하는 지경으로 가면 마을 정도의 크기를 소유해야 하는 것이 되고 국제적인 유통이 되면 나라 정도의 부를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그러면 행성 간의 교류를 하게 되면 행성 단위의 부의 수준이 되는 것인데 이건 활동영역 생활영역들이 크고 작고로 인한 단위의 변화이다.
사람이 대단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뭘 하느냐로 그에 따른 수준과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 된다. 즉 단순히 돈이 얼마나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큰 영역에서 활동하는 가가 되는 것이다. 이걸 말하고자 한 것이다. 돈이나 모아서 뭘 하려고 하는 것은 돈 모으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교육이라는 것도 그렇다. 배워서 어딜 가나 뭘 배우고 왜 배우고 배움의 극한은 어디고 그 질적인 것은 뭐가 있고 양이 있는 것은 뭐고 이런 것이 있다.
교육이라고 그냥 학교나 다니는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기술을 배워 더 윤택한 삶을 가질 수 있거나 자기실현으로 인생에 대한 충만을 추구하거나 그러한데 그이 상의 더 수준 높은 배움도 있을 것이다. 그 경지를 간 사람들만이 아는 그런 경지도 있는 것이다. 항상 아래에서 위를 짐작하기 힘들고 적은 사람이 많은 사람을 이해하긴 힘들다. 그렇다고 꼭 많이 가지고 더 높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자기 수준에서 좀 더 나아가는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다. 너무 앞서가면 실현됨이 어렵고 너무 낮게만 원하면 만족도가 떨어진다. 그러면서 양이 질이 되는 것인데 양은 수의 양이 아니라 고민의 양이기도 해서 그렇다. 고민한 만큼 우린 더 깊은 곳을 가게 된다.>
자왈 "진실로 나를 써주기만 하면 1년이면 가닥이 잡히고 3년이면 성과가 있을 것이다."
<苟 구를 만약이라는 의미로 쓴 것이다. 진실로 나를 써준다면인데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별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의미도 되니 재밌는 말이다.
1년이면 뭔가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자기가 할 것을 보아서 하는 말인지 자신감인지 모르겠는데 자신감으로 이런 말 하면 당치 않는 것이고 뭘 할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대강의 그림은 그리고 하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가 잘 보면 음흉한데 이건 치밀하게 전후 따져가면 말하는 성격으로 보여서이다. 이런 사람을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다. 너무 요즘 정치인들은 대가리가 없다.
자기가 할 것만 보고 뭘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내가 뭔가 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저항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해소해가며 할지를 따져서 뭘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항상 자기만 보는 근시안들이라서 자기 할 것만 보기 때문에 언제나 한다 하지만 결국 안 되는 것이 된다. 상대를 계산에 넣지 못하는 한심 함이다.>
자왈 "선인이 백 년을 나라를 다스리면 간악함이 없게 하고 살인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정말이다.
<전해 내려온 말이 이런 말이 있나 보다. 간사한 놈이나 살인이 사라지게 하는데 백 년밖에 안 걸리나 너무 쉽게 보는 것이 아닌가 잔인할 殘 하고 殺인데 잔인한 놈과 살인인지 살을 사형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 당시에 사형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번역하는 것을 보면 엄청 빈번했을 수도 있다.
사형을 없애야 하는 것으로 알고는 있었는지 애매하다. 이건 더 어려운 일이다. 살인이 없어지길 바라는 건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공감하기 쉬워서인데 사형수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은 서구인이 인권으로 지금에야 가능한 공감을 얻어내고 있는 것이고 공산주의 국가에선 아직 이걸 납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안다. 그만큼 힘겨운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명을 존중해주는 경지까지는 아직 안 갔는데 이건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할 우리의 숙제이다.
다른 곳에서나 과거 현인이나 위인들이 어떻게 하면 사형을 없앨 수 있을까를 논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반대자들을 죽여버릴까를 논하는 것은 많다. 반대파 숙청은 흔했으니까 이 논어에 있는 것조차도 실현하기 힘겨워하고 이게 중요한지 감을 못 잡는 것이 참 어리석음이 심하다.>
자왈 "왕도가 있다 해도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나야 어질게 될 것이다."
<仁인을 너무 고 답스럽게 볼 건 없고 백성들이 조금은 어질게 되는 것 정도이다. 조금은 어질게 가 타인에 대해 배려심이 나오는 감정을 가지는 정도이다.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한세대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데 이건 그 이전 세대는 이미 고정관념이 있어서 새로워지는 사회를 받아들이기엔 어려움이 있어서 새로운 세대는 새로워진 시대의 가치관을 받아들여 그렇게 성격이 형성되니 이렇게 된다.
이건 잘 살필 말이다. 아무리 내가 정치하고 세상을 이끈다고 해도 그것이 이전과 너무도 다른 것을 하려고 한다면 이 새로운 정책을 기성세대들이 납득할 만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선진국이 된 지 꽤 되었지만 기성세대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자기가 자라던 시대의 나라 모습을 지금의 나라에 투영하면서 보고 자기의 열등감을 나라에 투사하면서 보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고 현실을 받아들이긴 너무나 요원한 일이다. 사람들이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정치해야 한다. 사람의 의식이 변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보라는 것이다.>
자왈 "진실로 자신이 바르다면 정치를 하는 것이 어찌 문제가 되겠는가 자신이 바르지 않는데 남을 어찌 바르게 하겠는가?"
<앞에서 한 말과 비슷하다. 그만큼 권력자들의 자질을 중시한 것이 된다. 그 자신부터 인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다들 자기가 잘 낫다고 보고 잘한다고 보고 좋은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뭘 기준으로 그 사람이 바른지 알 수 있나 기준이 애매함이 있다.
범죄를 저지르고 사기를 치고 이득을 위해 수단 방법 안 가리는 놈도 정치하려고 한다. 자기가 바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뭔가 누구나 자기가 바르다고 생각한다. 살인자보다 살인자가 나오게 한 사회를 바꾸지 못한 것이 더 나쁜 놈인데 이런 기준은 없다. 정치를 잘못해서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정치인은 살인자보다 나을게 뭔가 더 극심한 살인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보다 더 힘들고 고통 속에서 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있는 것인가 그런 사람이 있는데도 자기는 바르다고 한다. 바르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당연하듯이 행동하는 것이 바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잘못을 안다면 행동이 다른 것이다. 말은 입으로 하는 것이 전에 몸으로 하는 것이다. 의사표현이지 입방구가 아니라서이다.
자기 자신부터 바름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무엇을 바름이라고 할지가 관건이다. 여기선 정치와 연관시키니 사람들과 사회와 관련해서 바름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어떤 행동이나 감정이나 사고가 전제적으로 먼 곳까지 보면서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자기 사는 것을 추구하면서 성공을 원한다면 그다지 이럴 것은 없다. 하지만 정치이고 더 큰 것을 원한다면 결국 그에 걸맞은 수준의 바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개체의 수준이냐 보편의 수준이냐 식으로 간단히 말할 수는 있다. 다만 단정하는 우려를 건널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하겠고 아니면 오해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세상과 연관해서 바름을 가진다는 것은 감정도 세상과 연관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사소한 일상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럴 정도로 즉 감정마저도 공적이고 정치이고 사회적인 크기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게 신비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경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니 그렇다. 그래서 사욕을 그렇게 경계하는 것이다. 그런 정도의 감정으로 정치하면 나라가 결국 거기까지인 게 된다.>
염자가 퇴근하고 왔다 자왈" 왜 이리 늦은 거냐?"
대답하길 ' 정무가 있었습니다.'
자왈 "사적인 것이겠지 정무였다면 내가 대신이 아니라 참여하진 못해도 나도 무슨 일인지 들었을 것이다."
<뭔가 전후 사정을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추측이 난무하게 되는데 내 맘대로 해석하겠다는 말이다.
우선 염자가 염 구라고 한다면 이 사람이 정무라고 했으니 조정에 불려 갔었나 하는 것이다. 朝라는 말을 썼으니 이건 임금이랑 회의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계씨의 가신이기 때문에 조정을 간 게 아니라 계씨와 회의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엇인가는 사실 모르겠다.
고대엔 전자, 후대엔 후자라고 해석한다는데 무엇이든 공자는 어딘가 비아냥이 든 말로 마친다. 사적인 일이었을 것이다라는데 지금으로 보면 갑질이다. 자기 사적인 일을 위해 더 부려먹고 늦게까지 일 시킨 것이다.
또는 사장이나 과장이나 자기 부하직원을 이상 짐 나르는 것에 쓸 정도로 공과 사를 헷갈리는 것들이 있고 남편의 벼슬이 자기의 벼슬로 착각하는 덜떨어진 것들도 있는 것이라서 이런 일이 지금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도 있는 것을 보면 이런 것이 인간의 못된 습성이기도 한가보다. 남을 억누르고 우위를 점하려는 습성이다.
뭘 시키든 그렇게 늦게까지 부려먹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같으면 노동착취라고 하겠지만 이건 그런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것으로 공공것인양 부려먹거나 사사로운 것을 공공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염구나 멍청하다는 것이다.
바르지 않은 것에 그렇게 애쓰는 것이 웃기고 바르지 않는 것을 바르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멍청함이 또 웃기다.
즉, 일로 나누어진 구분을 신분의 구분 즉 애초 인간 존재가 그러하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무식함이 과거에도 지금도 있는 것이다. 과거엔 왕이라는 것이 이미 일의 구분이 천부적인 신분으로 정립된 아주 고약한 정치제도이다. 사실 이건 정치제도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정치제도라는 것은 여러 정치제도가 가능하고 그중에 왕권도 있다고 하는 서구인들이 알아낸 개념인데 과거엔 왕권밖에 없고 다른 것은 상상해서도 안 되는 것에선 이런 식으로 왕권을 객관적으로 대할 수 없는 것이라서 정치제도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았던 바보 같은 나라였다.
그런데 공자가 이런 구분을 하려고 하는 것이 보이니 남다를 수밖에 없다. 사적인 것으로 일을 너무 부려먹는 것을 말리는 것이기도 마땅치 않게 보는 것이기도 하는 듯하다. 그 이상으로 왕권이나 신분이라는 그 당시의 전제주의적 국가체제를 개혁할 사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이런 감정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러면 이런 개혁적인 말을 하면 대화는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정공이 물었다. "한마디 말이 나라를 흥성하게 할 만한 게 있소?"
공자가 대답하길 '말이라는 것이 그런 것은 아닌데 기미는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길 "임금 노릇도 어렵고 신하 노릇도 쉽지 않다고 하는데 그대가 임금 노릇하기 어려움을 안다면 이 한마디 말이 이 나라가 흥할 것을 아는 기틀이 되는 것이죠'
정공이 또 말하길 "한마디 말이 나라가 망할 것이 있소?"
공자가 답하길 '말이라는 것이 그런 것은 아닌데 기미는 있죠. 사람들이 말하길 "내가 임금 돼서 즐거움은 없는데 다만 내가 말하는 것을 어기는 자들이 없다." 만약 선한 것이면 어기지 않아도 되지만 불선한 것이면 어쩌겠소? 아무도 어기지 않는다면 어찌 되겠소 이 말로 나라가 망할 것을 아는 기틀이 되죠'
<정공이 임금이니 자세히 말한 것이다. 이 정도면, 지금은 이렇게 말하면 먼 말이야 하며 짜증이 나지만 분명 상세한 말이다. 즉 말이 무슨 힘이 있어서 그것이 나라를 망하고 흥하게 하겠는가 다만 어떤 말을 하는지 보고 그 나라가 어찌 될지 대강 짐작한다는 말이다.
임금 노릇하기 힘들다는 것이 임금의 자리에서 일하는 것의 어려움을 안다는 것이 책임을 아는 것이고 자기의 판단으로 인한 앞으로의 일어날 것에 대한 것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 지위에서의 파급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어기거나 반대하거나 대드는 자들이 없다고 하는 말은 이건 폭력배나 하는 말이다. 내가 젤 강해서 내 말에 모두가 복종한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것과 같다.
누가 나를 어기나 하는 것에 관심 있다면 그 정도의 의식 수준인데 이건 사춘기 때나 가지는 경쟁심리이다.
겨우 이런 미숙한 정신으로 임금이 되어 있다면 그 나라는 앞날이 뻔한 것이다.
다 큰 성인이 돼서도 누군가 내 말을 반대하거나 어기나 관심 가지고, 누가 날 잘 따르거나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즐거움을 가지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면 이건 성인이 아니라 애일뿐이다. 그런 거 이상의 다른 판단기준이 있어야 하고 의미 파악하는 지성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겨우 이런가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애 따위가 임금이라면 더 볼 것도 없다.>
섭공이 정치에 대해서 물었다.
자왈 "가까운 사람은 기뻐하고 멀리 있는 사람들이 오게 하는 것이다."
<섭공이 꼬마 임금 같은 자이니 뭔가 쉽게 말하는 것이긴 하다. 근데 정말 이런 대화를 한 것인지 애매한데 이런 꼬마가 와서 정치를 물을 리가 없는 것인데 아무튼 그렇다 하고 가까운 사람이 기뻐하면 먼 곳의 사람이 여기가 좋은가 하고 이사 오고 이민 오고 하는 것이다. 이때는 나라 간의 이사가 잦은 것이라서 나라가 맘에 아들면 이웃나라로 가고 자기 나라에 이사 오는 사람이 많은 게 자랑이기도 한 시대라서 그렇다.
이건 정말 좋은 거 같다. 나라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지금은 그다지 쉬운 게 아닌데 이걸 자유롭게 편리하게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긴 하다.
다른 민족이나 인종이나 종족에 대해 배타적이고 색안경 끼고 보는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인간이 아니다. 어떻게 사람을 생긴 것이나 용모로 판단하며 배제하려고 한단 말인가 결코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판단할 때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판단은 책임이 따르고 수준이 있는 것이다. 알고 분류하고 구분하는 것이어야 한다. 구분은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야 비로소 구분하는 것을 한다 말하는 것이다.
나라가 다르다고 다른 나라를 배타적으로 보는 것도 사라져야 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나라가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고 어떤 나라 사람인가 피부색이 뭔가 어떤 인종 인가로 보는 것이 말이 되겠나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을 방해하는 민족성, 나라 간의 감정, 인종적인 것들은 분명히 미천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더더군다나 학문을 하는 사람이 이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가지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일반인의 미혹이다. 내가 한국인이지만 그렇지만 한국인 이전에 사람이고 나이다. 내가 한국인으로서 분류되거나 구분되거나 판단하는 분야가 따로 있다. 그 외엔 한국과는 무관한 판단이고 삶이고 존재이다. 그런 세속의 어설픈 구분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
자하가 거보의 읍재가 되어서 정치를 물었다.
자왈 "빨리 성과를 내려고 하지 말고 작은 이로움을 보지 말라
빨리 하려 하면 이르지 못함이 있게 되고 작은 이로움을 보면 큰일이 성취되지 않는다."
<이로움은 이득도 되지만 소소한 성취나 쉽게 이루어지는 일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작게 뭔가 이루어지는 것을 하려다가 큰 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자하가 읍재가 되는 것 종도에 뭔 정치를 묻고 하나! 그 정도의 지식도 배우지 않고 그런 자리에 가지 못할 것은 아닌데 굳이 묻는 것은 취직한 것을 자랑하는 것인가 예의상 묻는 것인가?
근데 공자는 너무 빨리 뭔가 이루려고 하지 말라하고 작은 것 보다가 큰 거 놓치지 말하는 것인데 동어반복적인 면이 있다.
이 자하가 크게 보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 작은 것에 마음을 쉽게 빼앗겨 그다음의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근거리 시야가 있는 정도가 아닌가 한다.>
섭공이 공자에게 자랑하듯 말한다.
"우리 무리에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가 양을 훔치니 아들이 증언했습니다."
자왈 '우리 무리의 정직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숨겨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숨겨줍니다. 정직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이 문단은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예전부터 그랬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정보 부족으로 쉽게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아버지가 양을 훔쳤다는데 이게 한 번인지 전과가 있는 것인지 또 무엇 때문인지 먹을 게 없어서인지 도벽인지 훔친 이유가 중요한데 그런 것도 없다. 그래서 단순히 아들이 아버지를 증언하고 안 하고 이전에 아버지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분명 잘못이 있다면 아버지를 증언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걸 숨겨주는 것이 맞다고 한다면 범죄자의 자식도 범죄자가 된다.
유교는 가족 간의 정을 중요시 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허물을 숨긴다고 한다면 이래서 부정을 저지르고도 지들 무리끼리는 감싸주고 뻔뻔한 짓을 하게 된다. 원문에 吾黨오당이라고 우리가족이 아니라 우리 당이다. 끼리끼리 모여있는 자들이다. 지들끼리 나라를 말아먹어서 욕을 하고 판결이 유죄로 나도 지들끼리는 뭐 잘못한게 있나 하면서 감사주고 뻔뻔한 짓을 하는 것이 수없이 보고 있고 평생을 보고 있기도 하다. 이런 것을 보면 이 문단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한다. 이런게 정직이라고 해버리니 이걸 근거로 그놈들이 그렇게 인면수심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기도 하겠다.
공자가 말하는 부자끼리 서로 감싸는 것이 작은 범죄나 실수 정도의 것은 그래도 가족간의 정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현실의 상황은 언제나 이론이나 생각보다 더 이상하고 별난 것이 많은 것이라 무조건 이론에 때려 맞출 수 없는 것이 있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재량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때그때에 맞추어서 판단하는 요령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 법으로 숨 막히게 적용하면 답답한 것이고 너무 정에 얽매여 공사 구분이 어려우면 우매한 것이기도 하다.
좋게 설명해서 정직이라는 의미에 대한 이해인데 무조건 있는 그래도 말하는 것이 정직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변통이 가능한 것이어야 정직이라고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이것이 역시 사실이기도 하니까 그렇다. 언제나 정해진 대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어려움이 있고 현실은 언제나 이론을 비껴가게 되어서 그 차이를 좁히는 것이 더 철저히 알아야 하고 이렇게 곧이곧대로의 것이 아니라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하기도 하다. 정직이 곧을 직 直인데 이러하다는 것이다. '직선적인 것이 곧음이 아니다'를 알아야 뭔가 아는 자가 된다.>
번지가 인을 물었다
자왈 "일상생활에서는 공손하고 일할 대는 공경하고 대인관계에선 충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이건 어디에서든 외국에 가서도 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恭, 敬, 忠이다. 우선 번지가 어리고 소인배이다. 그러니 어려운 말 해줘 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 해야 할 경구 날리듯이 간단하면서 외워서 따라 해야 할 것을 말해준다. 이런 것을 아무렇게나 해버리면 꼰대이다. 이게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거만한 것이라서 '누가 물어봤어?' 식이다.
암튼 여긴 사제지간이고 물어봤으니 또 어리고 소인이니 이렇게 말한다.
평소의 일상에선 공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 일 할 때 그리고 대인관계 할 때의 세 개로 나누어서 말한다. 그중에 공손이 일상에서 항상 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기본 바탕으로 깔고 해야 하는 것이 된다.
일상이란 우리 마음의 아래에 있어서 이걸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일상의 평범한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다. 항상 들고나고 있는 마음과 행동들이 무의식인데 그걸 무의식이라고 하니 가려져 있고 숨겨진 것으로 아는 것인데 왜곡이다.
이럴 때 공손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라서 우선 사람의 바탕이 공손으로 하게 해야 한다. 자기를 낮추고 그렇다고 노예근성을 가지면 안 되고 마음을 평평하게 두는 것이다. 흥분하거나 뭔가에 쫓기듯 하거나 긴장되어 있거나 그런 감정에 휩싸여 있지 않으려 하고 과거를 후회하면서 부정적인 것에 빠져있어도 안되고 별다른 생각이나 감정이나 그런 것에서 점차 사라지면서 소소하게 일상을 활동하는 것이다.
작게 작 게이다. 그냥 어느 정도 느긋하게 느리게 천천히 행동한다. 일 할 때는 공경한다는 것은 일할 때 집중하라는 것인데 누구나 일할 때는 집중해서 그것을 성취하려고 한다. 요즘은 이건 잘한다. 돈이 걸리는 것이다보니 일은 열심히 한다. 일할때 나태하면서 남이 일한 성과를 무임승차하는 자들도 있는데 이런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5명이 일하면 그중에 한두 명은 논다. 일해도 힘을 안 쓰는 요령을 피운다. 항상 이런 자들이 있다.
그다음은 대인관계에선 충으로 하라는 것인데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하라는 것이다. 충은 마음이 허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너무 상대를 쉽게 보거나 만만히 보거나 익숙하게 습관적으로 대하면서 안일하면 충이 아니게 된다. 우린 친할수록 충을 잊게 된다. 친하니 쉽게 습관적인 관계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도가 아무나 해야 하는 누구나 번지 정도는 되니 다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마음에 담고 행동하며 사는 사람은 난 결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논어 읽은 사람조차도 그다지 못 보았다.>
자공이 물었다 "어찌해야 사(선비)라 할 수 있겠나요?"
자왈 '자기가 한 것에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고 외국에 가선 왕의 명을 욕되지 않게 하면 사라 하지'
"그다음은 뭔가요?"
자왈 '가까운 친척들도 효라고 말하고 주변에서 우애 있다고 하면이다'
그다음은요
자왈 '말엔 반드시 신뢰가 있고 행동엔 과감하면 깐깐해서 소인이지만 그래도 그다음이라 해야지'
"지금 정치하는 자들은 어떤가요?"
자왈 '아~ 직업으로 하는 인간인데 논할 가치가 있나'
<우선 예가 일상에 마음 저변에 깔려서 판단기준이 되어 있음을 본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식으로 공간을 나에게서 점차 멀어지며 넓게 확장해서 보는 것인데 이것이 순서이다. 이런 기준이 명확해야 사고하는 것에 도움되고 판단하는 것에 기준으로서 작용한다.
가족을 위한 판단인지, 나라를 위한 판단인지, 보편성을 위한 판단인지를 이런 식으로 기준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친척끼리도 촌수가 있는데 이것도 판단기준이다 가까운 촌수에 더 마음 쓰고 먼 촌수는 덜 쓰는 식이다. 뭐든 이런식으로 구분하고 정리해서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행동에 과감함이 있고 신뢰가 만들어진다. 기준이 항상 하니 매번 비슷한 것엔 비슷한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어서이다.
이게 저절로 되지 않고 이걸 확실하게 자기 사고의 기반으로 단련해야 한다. 논어를 잘 보면 이런 기반에서 말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게 마음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일단 지금 정치하는 인간들부터이다. 이들은 두소지인이라고 한다. 斗소라는 것이 두는 한 말을 말하고 소는 닷되 정도인가 본데 이걸 속 좁은 인간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지금으로선 돈 벌려고 하는 짓이라고 하는 게 나을 거 같다.
먹을 거 때문에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무조건 남보다 더 차지하고 남보다 더 힘 있고 남보다 더 더 더 하는 미친 것들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게 스승이 과거엔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지금은 직업으로 선생이다. 선생은 스승이 아니다. 직업으로 하는 것이지 않던가 이런 것하고 같다. 정치인이 선비인 건 과거이고 지금은 그냥 직업이다. 직업인데 그들이 신분이 높은 것인 양 으시데거나 목에 뽕들어가는 짓을 하거나 그러면 돼먹지 못한 놈이 된다.
뭘 알고 해야 비판도 하겠는데 애초 지식이 없으니 직업인이다. 더 대우할 방법은 없다. 이게 그러한데 회사에서 상사라고 하는 자들이 윗사람 인양하니 이것도 정말 웃기는 것이다. 그런 상하관계는 조선이 망하면서 사라진 좋은 거 중에 하나인데 아직 그랬다는 것이 한심하다. 그나마 꼰대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사라져 가고 있지만 조심해야 한다. 언제나 이것들은 자기들의 어깨에 별을 달고 싶어 하니까
그다음이 적어도 말에는 믿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행동은 과감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을 지키지도 않는다면 이건 여기에 포함시키지도 않는 거 보면 한참 아래이다. 등급외라서 논할 가치도 없다.
과감한 행동이 해야 할 것이면 그냥 하는 것이어야 한다. 판단도 흐리고 판단한 것에도 다시 할까 말까라면 뭘 기대할 게 없는 것이 된다.
자천(수도)도 그러한데 한다했으면 하면 되는 것을 왜 안될까 왜 잘 못하는 것일까 하면서 머리로만 생각하고 동정심을 얻으려고 자기가 잘 안된다고 하소연한다. 이런 건 참 머라 해야 하나. 신뢰도 과감성도 없는 것이 그런가 한다.
이래도 소인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이런 면이 있다. 오직 그것이고 그것만이고 타협이 없어서 믿을 수 있긴 하다. 흔들리지도 않아야 하는 것이고 행동은 이미 정해진 것이 있으니 과감했다. 소인이지만 선비라고는 한다.
그다음이 효와 우애이다. 이건 대인관계를 말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평가가 나고 있는가이고 체면이 되고 객관적인 인격의 증명이다. 그냥 효도이고 그냥 우정이고가 아니다. 부모와 가족과 어떻게 잘 지내는가이다. 부모를 봉양만 한다고 효가 되지 않는다. 그 가족끼리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 간의 교류를 잘하는 것이다. 이걸 오해하면 멍청한 효도가 된다. 우린 사람과 사는 것이라 사람과 어떻게 지내고 어떻게 상대를 배려하고 어떻게 대화하고 어떻게 판단하는 것인지가 중요하게 된다.
그다음이 자기가 한 것에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인데 거만해지지 않아야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도 사람간의 일이라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일하기 위해서이다. 지나치게 기뻐하면 질시도 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기뻐하지도 못하게 하는 빡빡한 것은 아니다. 서로 간의 사이가 좋으면 상대가 감정표현을 지나치게 해도 봐준다.
문제는 사이가 좋고 나쁨 서로간의 관계의 긍정성인가 부정성인가이다. 평소에 긍정적이면 조금 보기에 기분 상할 수도 있는 것에 인정해주는 것이고 받아주는 것이 된다. 그러한 평소의 사람들 간에 사이가 좋게 하기 위해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자기를 되돌아보는 것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된다. 자기를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알 수가 없다. 무엇에 부끄러운가 누구에 부끄러운가 그리고 나에게 부끄러운가이다. 내가 정한 원칙에 벗어나면 부끄럽고 남에게 피해가 가거나 무시했거나 배려하지 못한 것이면 부끄럽고 어떤 사건과 상황에서 자기의 위치를 보고서 무엇을 한 것인지 알지 못하면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부끄러움은 그저 수치심이 아니라 자기를 냉정히 보고서 따져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평소에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어서 서로 간에 원만 한 대인관계가 평소에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또 그래야 외교 사신으로서 잘한다고 하는데 이건 정치적인 것이고, 지금의 우린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왕명이란 결국 왕의 의도를 알고 그것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니 지금으로선 내가 사람들의 바람이나 의도를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의도 파악이 되지 않으면 뭘 해야 하는지 당장 헷갈리게 된다. 뭘 하라는 것인가 뭘 해야 잘하는 것인가 어떤 성취를 해야 하는 것인가 어떤 기대에 부흥해야 하는 것인가가 된다. 남의 의지에 종속되는 것일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의 의도부터이다. 내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사는 이유가 뭔가 이게 같은 것이다. 날 알아야 남을 알고 그 아는 것이 이러한 의도나 목적을 아는 것이다. 그래야 일하게 된다.>
자왈 "중을 행하는 자와 함께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광견(미친것, 고집불통)과 함께 하고 싶다.
광자는 나아가 취하려고만 하고 견은 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것을 공자가 중을 행하는 자와 함께 하지 못하면 미친놈이나 고집만 부리는 놈과 차라리 같이 있겠다고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럴 것 같기도 하다. 광이 미칠 광이니 미친놈인데 진취적이라고 해서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다. 지나친 뜻만 높은 것을 말하는 거 같다. 말로만 뭔가 한다 하고 행동은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현실은 등한시하고 생각만 황당한 것이기도 하다. 일종의 자아 팽창이나 허풍일 것도 같다.
견은 고집 있는 것인데 말이 안 통하고 유통성이 없어 고집불통이다. 그런데 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 한다 하면 하지만 최소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안 하는 것도 된다.
이런 사람들을 칭찬한 것으로 알지만 그렇다기보다 중을 행한다는 것의 다른 설명이기도 하다. 너무 미친놈처럼 나설 것도 아니고 너무 견처럼 고집만 부려도 안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하는 것은 기어코 하는 것이고 뜻은 높아야 하고 천박해지면 안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광과 견이 적절하면 중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자왈 남쪽 사람들의 하는 말에 "항심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원도 못한다." 이 말이 좋다.
주역에 "그 덕이 항상 하지 않으면 수치를 당할 것이다."
자왈 '점치지 않을 뿐이다.
<恒 항상 한다는 이 말이 관건이다. 이걸 꾸준히 항상 하지 않으면 무당이나 의원을 못한다는 것인데 이런 건 너무 당연한 상식이고 그리고 그다음이 있는데 항이라는 것이 그저 오래도록 항상 하는 마음이라고 하기엔 다른 의미가 있다.
그건 일관성 같은 의미인데 의미의 일관성이다. 무당이나 점치는 것이나 즉 역학이나 의학이나 이게 딱 정해진 것이 없다. 그 사람 따라 그 사건 따라 의미가 다르고 시대 따라 다르고 그러한 변화하고 다른 것에서 어떤 맥락을 찾아야 하는 것이라서 이런 항자를 쓰게 된다. 그 제각각 다르고 알 수 없는 것에서 뭔가 찾고 알아내어 짐작하고 치료하려면 그만한 노력이라고 해서 항일 수도 있고 의미 맥락이 보일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 게 그 맥락이 항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그 흐름이 보여야 한다. 서구 의학이나 과학처럼 항상 같은 의미와 같은 결과가 나오거나 같은 병에 같은 치료라는 식이 아니라서 그렇다. 항이 언제나처럼 항상이기도 하고 다른 식으로 항상인데 자기가 노력해서 얻어진 그제야 보이는 맥락이다. 그런 항상이다.
덕이라는 것도 한 번의 덕이 아니라 비슷한 맥락에선 항상 그렇게 행동하는 덕이어야 한다. 아니면 수치를 당한다.
그런데 그 비슷한 맥락은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본다. 누구에겐 그것이 변덕이지만 누구에겐 같은 것이기도 한 것이 정말 어려운 것이다. 일상의 상식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은 일반인이고 덕행을 하는 사람은 그 이면이나 깊은 의미를 알고 하는데 그런 것을 알려면 그만한 맥락을 보는 지식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점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건 주역을 공부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주역을 치다 보면 내 마음의 흐름에 따라 주역괘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걸 알면 점을 치지 않아도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런 경지를 가봐야 하는 것인데 그만큼 자기 마음의 흐름에 대한 관찰이 있어야 한다. 여러 잡념 여러 감정들 이런 것을 우선 잠재울 수 있어야 하고 내 마음, 남의 마음,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 마음이 동하는 이유, 그 방향을 아는 것이고 진짜 마음과 거짓 마음과 일시적인 것, 의미 있는 것 들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이 되어야 점치지 않고도 점과 같은 마음의 흐름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마음이 맑으면 그 안이 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누가 하는지 모르겠다. 점치는 것에 대해서 이런 말 하는 것은 이곳뿐이다. 어느 누구도 이걸 말하는 사람을 못 보았다. 자기가 잘 맞추었다고 주역을 잘 안다고 잘난 체하고 으스대기나 하지 이런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이걸 알지 못해서이다. 이건 항이라는 것이 그렇게 깊은 의미 맥락을 찾을 수 있을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어떤 것이 잘될지 안될지 알고 싶어서 주역점을 치다 보면 이미 마음의 저변에 흐름이 무엇이 될지 알고 있다는 것이 관찰 할 수 있게 되고 그다음에 주역 괘사를 보면 그 마음의 흐름과 같은 효사를 얻게 되는 것을 발견하다. 이걸 미루어 살피면 결국 마음을 잘 관찰하면 미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점치지 않아도 된다.
다르게는 덕을 말했으니 옳은 일을 하는데 잘될지 안될지를 따질 필요가 없다. 되면 좋고 되게 하기 위해 애쓰지만 안된다고 억울해하거나 한스러워할 지경까지는 안 간다. 그 진행하는 사정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치지 않아도 되는 현상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되어갈지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덕을 운운할 필요가 없다. 이건 미래예측과는 다른 것인데 덕을 행한다고 했으니 지금의 덕을 보고 그 덕이 가야 할 방향을 보는 것인데 이런 것이 보이면 점과는 상관없는 일의 진행이 있는 것이다. 점과 상관없지만 점도 그 덕에 따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점이라는 것이 이유 없는 길흉이 아니라 그것에도 흐름이 있고 판단함이 있는 것이라서 그렇다. 점 그 자체의 판단을 알면 주역이 필요 없다. 이건 내가 해봐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주역을 자기 관찰하는 용도로 썼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왈 "군자는 화이부동이지만, 소인은 동이불화 한다."
<이건 유명한 말이다. 아닌가?
그래서 그냥 원문을 발음만 썼다. 군자는 화이부동한다는 것인데 同이 같을 동이라서 같지 않다는 것이다. 차이이고 다름인데 이걸 힘들어하면 군자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조선시대에 자기와 다르면 역적이 된 것을 보면 이들은 군자가 아니다. 역시 소인이었다. 어찌 자기가 읽은 책만을 읽고 자기가 입은 것만을 입게 하고 자기가 하라는 것이 아니면 하면 안 되는 것이 어찌 군자이던가 지금도 종교라는 이유로 가르침이라는 이유로 어떤 이유로 이것만을 하고 이것만을 보고 이것만이 옳다고 하는 것을 보면 역시 군자는 아니다. 다르다. 그리고 달라야 한다. 남이 나와 다른 의견을 내는데 화가 나면 역시 군자가 아니다. 또 나와 같은 의견을 내어도 역시 군자가 아니다. 달라야지 왜 같나!
그래서 내 말에 다른 의견을 내지 않으면 실망인 것이다. "군자가 아니네"이다. 이건 좋다. 군자가 아니니 군자가 되려고 공부한다는 것이라서 그런데 공부한다는 사람이 자꾸 이렇게 군자 아닌 짓을 반복하면 그러면 '군자가 아니네가 아니라 군자가 될 생각이 없네'이다. 이미 포기 일지 모른다. 스스로를 포기하는 자는 답이 없다.
이럴 수 있으면 이미 和이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다르길 바라고 그렇게 서로 대할 수 있다는 그것이 이미 화가 된다.
소인은 같은데도 불화한다. 서로 같은 의견인 것인 양 하지만 겉으로만 그렇지 사실은 다른 이유로 서로 같이 있는 것이고 같은 척하는 것이다. 대개 이렇다. 정말 원하는 것이 뭔 가이다.
사실은 그 이전에 같음이 뭔지 알지 못한다. 정말로 사소한 것까지 지식이 필요하다. 지식이 기반이 되지 못한 말이나 행동이나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보지 못하니 같은지 다른지 알 수가 없고 그것이 드러나게 되어서야 서로 얼굴 붉히고 다투고 갈등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같다고 하면 의심하게 된다. 이런 것도 된다. 내가 뭔가 강의를 하면 누군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듯한 행동을 하는데 이런 사람일수록 못 알아 들었었다. 같다는 듯이 하지만 사실 아니라서 화하지 못한다. 열심히 설명하지만 그래서 알아듣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그다음 행동은 전혀 아니다.
분명 이렇다고 했는데 저렇게 행동한다. 물어보면 그게 그거냐고 되묻는다. 이런 것처럼 같지만 불화하는 이유가 같다는 것이 뭔지 우선 모른다. 뭐가 같고 뭐가 같을 수 있고 어떻게 같아지고 어떻게 가능하고를 알아야 안 되는 것 같아서는 안되는 것 같아질 수 없는 것을 알고 그래야 같고 다르고를 임으로 할 수 있다.
이것을 임으로 할 수 있어야 화하게 된다. 내가 상대와 같을 것인지 다를 것인지 상대가 나와 어디서 다르고 어떻게 같은지 아는 것이다. 그래서 화한다. 내가 나를 알고 상대를 알아가며 상대도 자기를 알고 나를 알아오는 것이 되어서 화한다.
이런 것이 같고 다름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게 아니니 잘 안되는 것이다.>
자공이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가요?"
자왈 '그게 옳은 것은 아니다.'
다시 물었다. "그럼 마을 사람이 모두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가요?"
자왈 '옳은 건 아니지 마을 사람 중에 선한 자가 좋아하고 불선한 자가 싫어하는 것만 못한 거지'
<이런 것을 보면 민주주의가 꼭 옳은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고 할 수도 있다. 다수가 좋다 하는 것이 꼭 옳은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도 한데 여기선 모두라고 했다. 이것 자체가 좀 공론이 되어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다수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인데 굳이 마을 사람 모두인가 정말 모두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게 가능하다면 그 사람은 옳은 사람이 아니라 공포스러운 사람이다.
사람을 모두 암시시킬 수 있을 이상한 방법이 있거나 속임이 있거나 군중심리이거나 분명 이상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책이나 이론들이 어설픈 완벽주의를 들어내면 곤란하다. 멍청한 인간들은 이걸 정말 현실에 구현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 반대하는 자들을 숙청시키는 그냥 죽여버리는 것도 아니고 가족까지 연대책임인지 싹 죽이는데 이게 얼마나 무지하고 잔인한 것인지 모르던 시기가 있게 된다. 이런식으로 모두에 맞추려는 짓거리를 하지 않던가 그냥 책이다. 말이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식으로 얼버무리거나 한다면 이 인간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자이다. 그렇게 변명하고 빠져나가는 인간이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더 나은 것이긴 하다. 다수가 어떤 의견을 가지는 지 보는 것이지 그것이 옳은 것이다. 진리이다. 정답이다라는 것은 아니니까 소수가 어떤 의견을 가진 것인지를 보기 위함도 되고 그들이 있다는 것도 그래야 확인되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다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소수를 드러내는 것도 되지 않던가 드러내서 죽여버리는 것은 아니어야 하고 강압하고 왕따 시키는 것도 아니어야 하는 것이 또 다른 시민 의식이긴 하다.
그리고 공자가 또 선한 사람들이 좋아한다거나 불선 한자들이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도 대충 그럴 수 있으나 엄밀히 따져가면 누구를 뭘 기준으로 선하다 아니다고 정의할지 그게 어렵다. 나라 입장에서 일 것이지만 이게 정치와 연관되는 말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치 기준이 아니라 개인적인 기준, 작은 공동체나 가족이나 철학적, 과학적, 다양한 기준이 있으니 선과 불선을 나누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시대이다. 그래서 이것도 역시 지나친 완벽성을 요구하는 것이거나 너무 세상을 쉽고 간단하게만 보는 것이다.
다만 누군가 나를 칭찬하거나 좋아할 경우 그에 맞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있다. 날 잘 이해 못하거나 내 말을 깊이 이해못하거나 내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좋다거나 칭찬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잘 모르는데 좋아한다는 거짓이거나 다른 것을 보고 있거나 다른 요구가 있거나 그저 끌려오는 것이거나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그에 따른 당위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긴 하다.
이것이 어릴 때부터 내가 신경 쓴 것이긴 하다. 누가 날 알아주나 하면 날 알아줄만한 사람인가가 우선 보게 된다. 내가 누굴 비판할 때도 내가 그 사람을 비판해도 되는 근거가 있나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한 건 내가 논어를 20대 후반에 보았다. 집에 책이 없는 가난이라 나중에 억지로 돈 모아서 산 것인데 이런 글도 그렇고 다른 글들을 이미 난 그러하다고 생각 끝에 결론내고 지키고 있었고 하려고 하는 것이었고 해서 놀라웠다. 왜 내가 생각한 것이라고 한 것이 이미 2천 년 전에 쓰여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러면서 내가 고생해서 아는 것을 누군 너무 쉽게 아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돼먹지 못한 비루한 감정이 일어나기도 했다. 역시 잘 나가다 이렇게 삼천포로 빠진다. 겨우 이전도의 수양이었던 거지>
자왈 " 군자는 섬기기는 쉬워도 기뻐하게 하기는 어렵다. 기뻐하는 것은 도로 써인 경우에만 기뻐해서이다.
사람을 일을 맡길 때는 그 그릇을 보고 한다.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운데 기쁘게 하기는 쉽다. 기뻐하는 것이 도가 아니어도 기뻐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일 시킬 때는 다 갖추어서 못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
<간단히 하면 직장 상사에게 아부하기 쉬운가 아닌가 이다. 기쁘게 하기 쉬운 것이 도가 아니어도 즉 그게 허용되지 않거나 불법이거나 상관없이 돈이나 환락이나 대충 기분 맞춰주면 좋아라 하는 자인가 아니면 도가 아니면 좋아하지 않고 정당한 것이 아니면 좋아하지 않는 가이다.
일을 시킬 때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거나 일이 성취되게 적절하게 시키고 분배하면서 하지 않고 못하면 면박이고 그것도 못하면서 뭐냐고 하는 식이다.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아래를 욕하고 위에 아부하는 인간이다.
또는 군자는 섬기기 쉽다. 같이 일하기 쉽다. 이건 군자는 대강 그렇다고 하면서 관계하고 일하고 어울리기 때문이다.
선입견이 적거나 다룰 수 있고 사람을 가리지도 않고 정당하게 일처리하고 말이 통하고 들어주고 하니 같이 일하기 쉽다.
그런데 그렇게 일하기 쉽다고 그 사람이 기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 기뻐하는 것은 도로써야 한다.
도로 써이니 도가 뭔지 알아야 군자가 뭘 좋아하고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뭘 하려고 하는지 아는 것이 된다. 언제나 오직 도로써라는 것이어야 한다. 상대가 어떤 도가 있는지 그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지만 본인들이 도가 없거나 그게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니 이걸 기준으로 산다는 것을 알 수가 없기도 하다.
나도 웬만하면 대강 그렇다고 하고 산다. 하지만 정말 말하게 되면 도로 써이다. 도가 아닌 것은 난 관심 없다. 이게 그렇게 사람들에게 어려운 것인지 살면서 점점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일거수일투족이 도로써여야 하는 것인데 전혀 그게 아닌 사람들의 모습에 나로선 당혹스럽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가 도이어야 한다. 이걸 이해해야 한다.
돈 좋아하고 먹는 거 좋아하고 옷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고 이거 저거 다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정말 좋아하냐고 하면 도로써이다. 같이 일하는 것이지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은 언제나 도이다. 도가 아니면 아닌 것이 된다. 이걸 언제나 명심하며 사는 자가 군자이다. 판단기준이 언제나 도라는 것을 이해해주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사는 것조차도 이해해주지 않는다. 이런 것이 있는 것조차도 모른다. 그러니 이렇게 되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왈 "군자는 태연하나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나 태연하지 않다."
<泰를 태연이라고 번역한다. 크다는 것인데 커서 거만해 보이기도 한 그런 큼이다. 그래서 교만하지 않다고 하는데 이게 커다랗게 보이는데 잘못하면 교만해 보이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어떤 권력을 가지면 뭔가 대단해 보이고 대단한 듯이 하기도 한다. 그것이 태라고 하면 그것이 교만함이 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근데 교만한 당당함인지 아닌지는 그 후의 일을 처리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런 면에서 태연이나 교만이나 모두 그 당시의 모습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행위에서 드러나는 것이라서 한 순간에 판단할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기준에 따라 사람마다 교만하다 아니다 할 수도 있는 것이어서 역시 쉽지 않은 것이다. 누가 소인인가? 스스로 소인이라고 하는 자는 거만한 것을 숨기는 영악 한자이니 누가 소인인가? 누가 소인이고 싶나? 모두가 소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군자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태연과 교만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할 것이다. 딱히 의지가 있지도 않고 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 행위가 그때그때 변덕이기가 쉽다.>
자왈 "剛강, 毅의, 木목, 訥눌 강직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한 사람은 인에 가깝다."
<한문을 자꾸 보여주는 것은 한문을 아는 사람에게 사고의 길을 가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강은 강직이라는 자기에게 강하게 하는 거라서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남은 용서하고 나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식의 말이 있으니 그런 것이다. 항상 자기는 뭔가 실수하고 충분하지 못한 그리고 쉽게 하려고 하고 나태해지는 것이 보이고 대충 넘어가려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말한다. 근데 너무 지나치면 부정적인 성격이 되어 이것이 문제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강직이란 자기 자신을 비판하지만 나약해지지 않을 강함이고 자기를 칭찬하지만 교만해지지 않을 강직이다. 나약해지지 않는 것에도 강함이 필요하고 거만해지지 않는 것에도 강직이 필요하다.
의는 굳센 것인데 뭔가 한다고 하면 끝까지 하는 그런 인내가 있는 것이다. 설렁설렁 이거나 마무리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완수하고 일을 이루어내는 끈기라고 하겠다.
강직이 외부로 일하는 행위로 드러나서 하는 것이라서 대인관계나 일처리에서 해야 할 것을 관철 할 수 있는 끈기이다. 해야 할 것은 하는 것이고 좌절하지 않고 그렇다고 들떠서 일을 그르치지 않는 그러한 굳셈이다.
목은 통나무 같은 거라서 질박하고 순박한 것을 말한다. 사람이 교묘하거나 영악한 것이 싫어서 그럴 것이다. 잔머리 굴리고 딴마음 품는 것이 아니라 굳세게 갈려면 결국 마음이 순박해야 그것에 관철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는 것이다. 영리한 만큼 끈기가 없거나 이거 하다 저거 하고 저거 하다 이거 하면서 혼잡한 것이 성취를 이루기엔 곤란함도 있어서이다.
눌은 말로 뭔가 때우고 교묘하게 빠져나가고 변명이 황홀하고 언제나 핑계 대고 그럴듯한 설명으로 현혹시키는 것을 싫어해서이다. 이건 행동하고 성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약한 심성 즉 강직이 부족해서이다. 또는 자기만의 편의와 이로움만을 추구해서 그렇다. 그 이기적인 것이 싫은 것이다.
이러면 인에 가까운 것이지 인은 아니다. 이 정도로 인이라고 할 순 없다.
굳세어서 끝까지 가야 하지만 모든 게 그렇게 굳세기만 해선 융통성이 없어 주위가 피해보기도 한다.
순박한 건 멍청한 것이기도 하다. 영리해서 요령을 모르면 순박을 유지하기도 힘들다. 아닌 걸 알아내어야 정확한 길을 찾아가는 것인데 아닌걸 아닌 것으로 모를 정도로 하라는 대로만 하면 그건 곤란하다.
어눌해서 말을 잘 못하거나 안 하면 즉 설명하지 못하면 당하는 것이다. 당하는 것이 나쁜 건 아닌데 그 당함이 억울이 되기 때문이다. 한이 되어간다. 그보다 어눌함으로 적절한 대처를 못할 경우 시간이 지나면 기정사실이 되어 돌이키지 못하는 사태로 나아가서 그렇다. 나중에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아는데 어눌함을 유지하면 이건 등신이다. 덕이라고 했고 그것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알아서 점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거 동양의 가치가 서양보다 못할 건 없고 더 나을 수도 있지만 말하지 못해서 못한 것이 되었다. 서구인이 동양을 비하하고 비판하고 할 때 그것이 그런 것이 아님을 말하지 못하는 어눌함이다. 그때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서 지금은 정말 그런 것인지 알고 스스로를 열등감으로 알게 되었고 우린 안되나 보다 하고 알게 되었다. 이런 사정인데 말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기도 하다. 그건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그렇고 뭐가 나은 것이고 아닌고를 알지 못하면서 어눌하기만 해서 그렇다. 말할 때 말할 수 있을 능력을 가지고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지 그냥 어눌함은 멍청함이다.
이제 차차 그동안 말하지 못한 우리들의 가치와 세계관의 진실이 나올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선 열등감에서 벗어나야 해서 그걸 위한 나라의 부강함을 위했다. 그것이 조금 이루어지면 우리가 가진 정신과 열정과 욕망이 나타나게 되고 그것이 왜 그런지 알게 될 것이다.>
자로가 물었다."어떠해야 선비라고 말할 수 있나요?"
자왈 '절절시시로 서로 책망할 줄도 알고
이이여로 서로 화목하면 선비라고 하겠다.
친구에게 절절시시하고
형제에게 이이여하는 것이다.'
<切절偲시, 怡이如 이런 한문인데 갑자기 의성어인지 의태어인지 이 같은 것이 툭 튀어나온다.
자로가 자기주장만을 일삼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서툰 것일지도 모른다. 친구 끼리 책망하는 것을 받아줄 수 있어야 한다. 조금 비판하면 성내고 절교하거나 싸우거나 하면서 서로 간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면 안 되고 형제끼리는 싸우거나 다투지 말고 지내라는 것이다. 이런 간단하고 별거 아닌 것을 자로에게 선비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자로라는 인간의 수준이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인 것도 같다.
그런데 나같이 친구 없는 인간이 그렇게 말할 수 있나도 생각해보면 자로 같은 사람은 친구가 많을 거 같다. 저런 사람이 남자들 간엔 인기가 있는 것이긴 해서이다. 남자답다고 할까.
그런데 정치나 이권이 들어가면 이상하게 될 것이지만 아마 이런 이권이 있는 곳에서의 친구지간 일지도 모르겠다. 아무 이해득실이 없는 곳에서의 친구는 잘 지낼 수 있다. 하지만 이권이 들어간 곳에서의 친구는 다르다. 그냥 친한 게 아니라 이권으로 서로 간에 관계가 구성되며 그럼에도 친하다면 이게 정말 친구일 아닐지 잘 모르겠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뱃는 것이라서 사회생활하기 위해서 싫어도 좋은 척이고 친한 것인지 친한 척인지 그건 다르니까
책망이나 화락이나 이건 과거의 주석에서 따온 번역이다. 나도 이게 뭔 말인지 몰라서 그냥 그것에 따라 번역했다.
절절시시 같은 말이 지금 쓰이지 않는다. 자로가 남의 책망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할 거 같다. 남을 책망하지 당하는 것을 싫어는 것이 다들 그렇기도 하고 자로가 더 심하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맞춤 교육하듯이 이렇게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왈 "선인이 시민을 7년을 가르치면 전쟁에 나가게 할 수 있다."
자왈 "가르치지 않고 시민을 전쟁에 나가게 하는 것은 버리는 것이다."
<어떤 면에선 전쟁시키려고 시민을 가르치나 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현실에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다. 분명 전쟁이 없어지는 세상을 위해 무관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무조건 전쟁반대만을 주장하면서 비폭력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이 시간에도 죽고 있는 것이고 폭력에 전쟁에 희생되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쟁 없고 폭력 없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 전쟁하고 폭력을 휘두르나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논리를 전개하면 답이 없다.
개인적으론 분명히 전쟁 없는 시대는 올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그때까지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는 못한다. 그리고 전쟁으로 황폐화되는 대규모의 전쟁은 분명 없어야 한다. 이건 역사의 발전으로 전쟁없는 사회가 되는 것에 뒷걸음이기도 해서이다. 전쟁없는 시대가 오려면 그러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시민들이 대다수가 되어야 한다. 다시 전쟁으로 배고픔으로 떨어지면 의식 수준도 다시 땅에 떨어져서 다시 수세대를 거쳐야 지금의 의식 수준에 다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을 가르쳐서 전쟁을 한다는데 이때 뭘 가르치냐이다.
사람 죽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쉽다. 그냥 쉽다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매일의 훈련으로 어느 정도 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그러한 사람 죽이는 기술이 사람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폭력을 없애고 전쟁이 사라지는 세상을 위해서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도 같이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요즘도 이종격투기나 무술을 배운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이 길바닥이나 다른 곳에서 폭력을 휘두르거나 사람을 패면 비난을 받고 더 심한 비난을 받는다. 그건 그런 기술을 배우는 것이 경기를 위함이고 자기의 만족이고 정해진 규칙에서의 자기 강함을 증명하는 것이지 사람을 때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정도는 이해하는 수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누구나 이젠 이해하는 시대가 된 것이지 않던가 무슬을 배운다 하지만 사람과 이유 없이 싸우지는 않은다는 것이다.
전쟁 훈련은 한다. 하지만 정당하지 않는 전쟁은 하지 않는다. 가 된다.
그러려면 정당한 것과 아닌 것, 싸워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분하는 가르침을 해줘야 하고 알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살인기계가 아니고 뭐겠나 언제나 사람은 사람이어야 한다. 전쟁이 아니라 어떠한 극한에서도 사람은 사람이어야 한다.
자로를 자주 욕했지만 죽을 때 갓 끈을 매고 죽는 모습은 장렬하고 눈물 나게 하는 것이다. 사나 죽으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사람이어야 사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위에선 소인이라고 했지만 선비 중에서 그래도 소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조차도 안 되는 것은 소인도 아니고 선비는 더더욱 아니다. 그 이하이다.
어느 상황에서도 사람을 짐승 다루듯이 해서도 안되고 짐승이 되어서도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