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고전

안연편

제라울 2020. 5. 17. 14:18

안연편

이것도 편집일거 같다. 대화들을 보면 알게 되는데 너무 형태가 비슷하게 되어 있다. 의도적으로 짜맞춘 것이다. 대화주제도 그당시에 이런 저런 주제로 대화는 했을 것이지만 이렇게 했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공자라면 또 이 제자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라고 상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건 한참이 지난 후에 제자, 제자의 제자, 제자의 제자의 제자 등등 그들이 만든 것이다.

녹화한 것도 아닌데 얼마나 기억해서이고 뭘 의도해서이고 어느 수준의 사람이 편집하고 이런 거라서 적당히 감안해서 읽을 일이다.

논어가 또 공자가 대단해서 이걸 읽거나 봐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거라도 읽어야 한다는 것으로 말하긴 했다.

개인적으론 이게 전부 우화라고 생각한다. 다 허구라는 것이다. 하나의 상황이고 누구나 어느 곳에서나 이런식의 사태에 처한다는 것이다. 그걸 실재처럼 잘 구성한 것은 있다. 말을 못알아 듣는 여러 유형, 의도적인 왜곡, 성급하게 이루려는 욕심, 허영이나 자아팽창과 교만 이런 것이 일상적인 것이고 그런 것에 대한 글을 제자와 공자의 대화로 꾸며서 모아둔 것인데 이런 것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자기에게 적용해서 이해해보고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는 것이 일차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런게 이렇게 있으니 이걸 쓰는 것이지 이 논어가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이걸 잘 짜맞추어서 편집해서 그런 것이지 경외해서는 아니다. 이런 발상은 에초에 어긋나는 접근이다.

 

안연이 인을 묻자

자왈 " 극기복례가 인이야 하루라도 극기복례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 인이란 자기로부터이니 어찌 타인으로 부터이겠나"

안연이 '그 세목을 듣고 싶습니다.'

자왈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아라"

안연이 '제가 부족하나 그 말대로 해보겠습니다.'

 

<누구나 아는 말인데 누구나 못하는 말이다.

이 단락은 길게 설명할 것인데 그만큼 중요하고 그만큼 이걸 모르고 있어선 안되는데 모른다.

극기복례라고 이걸 해석하지 않고 그냥 썼는데 익숙한 말이라서 굳이 이랬다.

인이 뭐냐고 하니 극기복례란다. 이러면 예는 뭔가? 하는 질문이 되어야 한다.

인이나 예나 비슷한 범주로서 예로서 인을 이해하거나 인으로 예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나 인이나 알 수 없는 어려움은 같다.

현실에서 이렇게 대답하면 빰 맞아야 한다. 이건 대답이 아니라 더 어려운 구렁텅이에 쳐넣는 것이어서 그렇다.

친구끼리 이렇게 대답하면 "말장난하냐" 하면서 쏘아부치겠는데 상대가 공자다.

난감한 것이다. 뭔가 있는 것인가 하는 갈등이 생긴다.

그래서 그 세목이 뭔가 하고 물으니 예가 아니면 어쩌고 어쩌고 한다.

역시 말장난이다. 예가 뭔지 모르는데 예를 기준으로 판단해서 행하고 말고를 하라는데 가관이다.

결국 가치판단의 기준이나 행동판단의 기준이나 그것을 예로 하라는 것이고, 즉 판단기준으로서 예를 말하고 있다.

그럼 예가 뭘까?

예는 우선 순서이다.

순서라고 하는 것이 일단은 어떤 일이든 어떤 상황이든 어떤 지식이든 어떤 사건이든 어떤 사람이든 그것이 뭐든 우린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하는 것이 쉽다. 칸트는 시간이 범주로서 우리가 사고하는 형식이라고도 한다. 사실은 범주라는 것 자체가 예라는 의미가 된다. 어떤 형태나 방식으로인가라는 것이 예이기 때문이다.

그중에 시간이나 공간을 말하면 인과를 알려면 시간순서로 해야 하니 당연히 이렇다. 소리나고 돌아보면 떨어진게 있어서 저것이 떨어지면서 소리났구나 하지만 소리와 떨어진 것은 그다지 연관이 없다. 다만 시간적으로 이어서 보았기 때문에 그리 생각하는 것이다.

길게 하루 일과를 말하면 일어나고 아침 먹고 커피 마시고 외출하고 들어오고 저녁먹고 이런 일상도 시간을 기준으로 해야 뭔 말인지 알고 말하기도 쉽고 기억하거나 인과를 이해하게 된다. 외출하고 일어나지는 않으니까 (물론 예에서 지로 넘어가면 시간순서나 공간순서와는 상관없는 자유로운 상상이 가능하고 더 작위적인 편집이 되어 재미있고 새로운 것을 창출할 수 있게 되지만 이건 예가 아니다. 예가 아니라고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구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꼭 그렇게 구분해야 하느냐면 알아서 하는 거지)

대문 들어가고 마당 나오고 뜰이 나오고 당이나 건물 나오고 그안에 거실 있고 방 있고 이런 공간적이든,

내가 누군가를 만나러 가도 요즘은 수위를 거치고 비서를 거치고 예약도 하는 곳도 있고 이렇게 뭔가 정해둔 것이 있다.

일단 이렇게 일의 순서가 있고 방법이 있게 된다. 뭐든 그 방법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어떤식으로 어떤방법론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면 어떤 순서를 지나면 어떤 것을 지키면, 이런식이 된다,

일을 시키거나 가르칠 때도 그냥 하라고만 하지말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고 여기서 저기로 가면되고 이걸 거치면 되고 이렇게 중간 과정을 말해주면 쉬워진다.

이런 것이 예의 기본적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보거나 대화하거나 뭘 할 때, 누군가 나를 보거나 대화할 때, 뭔가 일을 하고 싶을 때, 뭔가 해결하고 싶을 때, 뭔가 남들에게 이러하다고 알리고 싶을 때든 언제나 우린 순서와 방법을 정하고 말끔하게 정리한 계획을 세우는데 그래야 하고 이런 것이 예가 된다.

이게 어설프면 혼란이고 짜증나고 답답해지고 실수가 되고 서로 감정이 상하고 일이 그르치고 어지러워진다.

이런 것이 좀 크게 되면 법이고 규율이고 도덕이 되며 우리가 할 것과 하지 말것을 가르는 그 기준으로 된 것이다.

그런면에서 나라의 예가 있고 자기만의 예가 있고 보편적인 예가 있게 되고 이런 것이 가능해진다.

이런 예를 적절히 갖추는 것이 우선 공부이고 그것을 갖추는 것이 되면 한사람의 인격이 된다.

대개는 자기가 어떤 예가 있는지도 모르고 예를 가져야 하는지도 모르고 세상에 어떤 예가 있고 어떤 예를 따라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이 시키거나 하라는 것을 거부하려는 반항이 되고 법을 안지키고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 된다.

예가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고 왜 그래야 하고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고 좋은 예인지 아닌지도 판단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극기하려면 스스로 예에 대한 나름의 갖추어진 예가 있고 그것이 세상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력도 있다면 하는 것이다. 아니면 복종이 되고 주관도 없게 되는 것이라서 이건 노예기르기 일뿐이다. 어려운 것이 판단력인데 극기복례는 그이후에나 가능한 좀 어려운 것이다. 뭘 극기하고 뭐가 예이고를 모르면 판단을 할 수 없다.

분명 예는 자기로부터여야 하는데 자기가 예가 없으면 남이나 사회에 예가 있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고 이러면 그 예를 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말은 사회에 규율이 있다고 꼭 지켜야할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떤 것을 하자는 것인지 그런 것을 모르고 이런 것을 해야 한다더라로 습관처럼 익히고 알게 된 관례들은 또는 윤리들은 예가 아니다. 이건 납득하지 못한 예를 의미한다. 자기 스스로 예를 가져본적이 없어서 습관이고 관레이고 윤리이지 그건 예가 아니다.

우선 스스로 예를 가지는 그 배움을 해야 한다. 내가 어떤 판단을 하는지 기준을 어떤거에 근거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의 원리를 알아야 사회나 밖에서의 예가 어떤 근거로 하는지 왜 그렇게 된건지 알 수 있고 그렇게 유추해 가는 것이며 서로 접목하는 과정도 해내야 한다.

즉 자기의 삶의 원칙이나 규칙이 정해가는 것이 배움이고 그것 이후에 밖의 규칙을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의 원칙이 없으면 밖의 원칙을 지키거나 하는 건 애초에 성립이 안되는 것이고 이건 복종이라고 한다. 자기가 예를 세울 수도 없고 그저 따르기만 할 줄 아는 것이다.

사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행하지도 말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이런 엄격주의는 부작용이 되고  오해된다. 그래서 예의범절이라는 식으로 강요와 폭력을 쓰기도 했고 타인을 간섭하는 못된 버릇도 기른다. 

그런데 역사이래로 이렇게만 이해했고 지금도 내가 위에 쓴 것을 읽으면서 너무 답답하거나 지나치게 구속적인 감을 가지는 것이 된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라서 그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좀더 근원적인 이해를 하려고 해야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또 예는 일종의 우리가 누구나 해야 하고 하고 있는 그런 원리라서 그것을 인지하느냐 아니냐가 우선이다. 우리가 어떤 범주적인 것으로 사물을 이용하게 된다. 그게 시공이든 양이나 질이나 전체나 부분이나 이런 것들을 이용해서 사고하게된다. 그런데 꼭 이럴 것은 없지만 이러고 있다. 이게 너무 형식적이고 귀찮다고 할 수 없다. 이미 그러고 있으니까 우린 누구나 일반화 한다. 그 일반화 하는 것을 인지하면서 더 상위와 더 진지하게 일반화 하는 것이 보편성이 되며 예가 된다는 것이다. 꼭 그렇다고는 아니지만 일반화가 그럴듯하면 보편화가 되는 의미도 있음을 보고 감잡아야한다. 일반화가 보편화가 아니라 일반화가 근원적이고 좀더 깊어지면이다.

 

이랬을 때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는 범주로 올라가는 것은 나혼자서는 감정대로 내가 하고싶은대로 막해도 상관없다. 자기가 한 것에 자기가 책임지고 아니면 말고 이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공동체이고 사회이며 나라가 되면 그건 다른 것이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엔 근거가 있어야 하고 사유가 있어야 하고 그로인한 책임이 확실해야 한다. 사람이 많아서도 그렇고 기록되기 때문에서도 그렇고 내가 할 것을 빌미로 누군가가 자기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니 나쁜 모범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 따라할 수 있는 긍정적 모범도 있고 여러사람을 설득하고 이끌기 위한 그럴만한 객관적 근거와 사유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것이 예가 되어 지금으로선 논리적이다. 합리적이다. 보편적이다. 정합성이 있는 설명이나 이유이다와 같은 것이 된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그 명확한 구분과 분별이 있는 것이고 이런 것을 할 수 있을 지식을 배양하는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작은 일에도 순서는 있고 그림이 있고 범위가 있고 논리계형이 있는 것이라서 그런 것을 정하고 정해가고 상대가 어떤 예로 나오는지 보고 대하고 이런 것이라고 본다. 순서를 알면 그림을 그리게 되고 그림을 그리면 체계가 이루어질 수 있고 체계가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외부와 접촉하면서 그체계를 유연하게 들고 나면서 부드럽게 적용하면 이렇게 예로 돌아감이다.>

 

중궁(염옹)이 인에 대해서 물었다.

자왈 "대문을 나서면 손님 대하듯 행동하고 백성에 대해선 큰 제사 하듯하라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은 남에게 하지 않으면 나라에서 원망 받을 일이 없고 집에서도 원망 받을 일이 없다."

중궁 왈 '제가 부족하나 그 말대로 하겠습니다.'

 

이런 행동을 겉으로보면 예로 보이기도 하다.

그래서 앞에서 예로서 인을 말한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선 인에 대한 의미를 보여준다.

다만 말의 의도에서 보이지 인이 뭐다라고 정의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과거논법이 은글슬쩍이다.

이거면 이거라고 딱 말해주면 좋은데 이런식이다.

중궁이 사람들과 대인관계를 힘들어했는지 이걸 즐기는 사람인지 굳이 이런 주제로 인을 말한 것이기도 하고 인이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원망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거역시 중궁이 원망에 대해서 집착하는 사람일 수 있다. 굳이 이 단어이다. 다른 것도 가능한데말이다.

또 말의 구조가 집에서와 나라에서라는 두개의 장소를 대칭으로 두고 한다. 이후에도 여러 곳이 이렇다. 이들이 신경쓸 장소라는 의미이다. 집안과 나라이다.

사람을 대할 때 즉 대인관계에서인데 상대방이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더 잘살기를 바라고 좋은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인이다. 그래서 대인관계를 말한다.

그것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도 제시한다. 이런면에서 보면 상당히 친절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것이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건 기초적인 것이다. 최소한의 단초가 된다.

내가 싫은 것을 누가 남에게 시키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세상에 다 그러고 있다. 내가 가난하지 않고 싶은데 왜 남은 가난하게 하나 내가 아픈게 싫은데 왜 남을 아프게 하나. 내가 힘들기 싫은데 왜 남을 힘들게 하나 이런 식이다.

이게 이렇게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원리적으론 나를 아는 것이 되어야 하고 자기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남을 이해하고 남을 이해하면서 공동체를 세상을 이해하며 행동하라는 것이지 단순히 남의 감정을 눈치채려고 하고 좋아하나 싫어하나 이런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대인관계, 남의 원망을 신경씀이라는 맥락에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어서 이어지는 흐름이다.

 

사마우가 인을 물었다.

자왈 "인한 사람은 말이 더듬듯이 한다."

'말을 더듬듯이만 하면 인이라고 하는 것이요?'

자왈 "그것이 실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인데 말을 더듬 듯이 천천히 해야 한다"

 

사마우가 사료적으로 누군지 명확하지 않다는데 웃기는 녀석이다.

그런데 실재로 지금도 이런 상황이 너무 많다.

인이 뭐요?

천천히 하는 거

천천히만 하면 되요

쉽지않아 실천하는 것이라서,

이런 것이다. 이거만 하면 되요 저거만 하면 되요 하는 "~만" 이것을 쓰는 것을 잘봐야 한다.

물론 한문 원본이 이런 것라고 내가 장담은 못한다. 한문문법이나 정확한 단어 의미따지며 논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런데"~만"이라는 것이 말할 때 쓰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 말을 쓰지는 않았는데 현실에선 이말을 쓴거랑 같은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내 경우를 예로들면 처음에 도를 배우려고 또 날 간보려고 또 어떤 확신을 가지고 싶어서 등 여러 이유로 오는데 그 중에 이런 경우도 있다.

뭔가 확신을 바라는데 호흡을 하는 사람이 "저는 호흡을 하면 된다는 거죠?" 물었다.

그런데 이때 이분이 묻는 것이 '호흡만 하면 높은 경지를 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느껴진다.

화두를 하는데 "화두 이게 좋죠?" 라고 묻는 다면 이게 '화두만 하면 대각할 수 있죠?'

이런식의 질문이 되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걸 내가 남의 마음을 지레짐작해서 보는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다. 뭘까?ㅎㅎㅎ

 

사마우가 군자에 대해서 물었다.

자왈 "군자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만 않으면 군자인 것이오?'

자왈 "안으로 성찰(살피어)해서 문제될게 없는데 무엇이 근심이 되고 두려움이 되나"

 

역시 사마우는 똑같은 말버릇을 한다.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만 하면 되냐는 식이다.

앞에서 말한 듯이 그것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지 말이 어려운게 아닌데 말만 듣고 뭘 안다는 듯이 하려고 한다.

그런데도 성격이 좋은지 상대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담담히 방법도 말해준다. 이게 인위적인 편집이라서 이런 것이다. 실재로 공자가 이렇게 친절하지는 않았을 거 같다.

안을 실피어서 근심할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있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인데 이건 정말 중요하긴 하다.

다만 이것만을 자기성찰이나 관찰이나 알아챔으로 알면 안되고 그중에 이런 것도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떳떳하고 하늘을 우르러 당당해지려면 내적으로 그만한 정당함과 정합적인 행동원칙이 있고 그에 따른 책임에 대한 원칙이 섯을 때인데 이걸 위해선 예나 인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도 인에 대한 대답과 같다. 그걸 상대가 사마우라서 인이나 예라는 말을 꺼내지 않고 니가 뭐하는지 알고 감정의 흐름을 알라고 하고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고 자기의 감정부터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로인해 근심없고 두려움 없는데

이걸 저렇게 생략해서 말한다. 어쩌면 친절인데 어쩌면 알아듣거나 말거나도 된다.

어떻게 안을 살피면 그리되나 하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말은 한줄인데 그안에 의미는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어떤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하고 자꾸 따져서 자기가 실행할 수 있을 것을 찾아야 하는데 이 사마우라는 놈이 한다는 말이 그렇게만 하면 되요? 하면서 쉽게 할 수 있을 것처럼 한다. 이러면 더 말해줄 수 없다.

 

사마우가 근심하며 말한다. "사람들은 다 형제가 있는데 난 홀로 없다"

자하왈 '내가 이렇게 들은게 있다. 생사는 명에 있고 부귀는 하늘에 있고 군자는 공경하여 실수가 없고 사람들과 더불어선 예가 있고 사해내에서 모두가 형제이니 군자가 어찌 형제없음을 걱정하리오?'

 

이봐라 앞에서 근심없음을 말했는데 바로 근심한다. 그것도 겨우 형제 없음을 걱정한다. 이게 걱정이면 다른 걱정은 어떻게 감당하며 사는 것인가 말해주면 할 수 있을 것처럼 하더니 결국 이모양이 아닌가 이게 현실이라는 것이고 니가 이런 인간이라는 것인데 그걸 안을 살피고 알아내야할 게 니가 할 일이라고 말해주는데도 못알아 들은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자하라는 이 놈은 도대체 뭔 말을 씨부리는 것인가

군가가 이러한 것이라고 말하며 단정하는데 허풍이 우주로 날라갔다.

그당시엔 이게 세상의 전부이거나 이게 젤 큰거로 알아서 이랬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우주와 비교하며 교만의 극치를 이루었을 것이다. 아까 말했듯이 집안과 나라 정도이다. 이때의 나라는 우리나라정도나 좀 더 크거나지 지금의 차이나만한 것도 아니다. 근데 사해는 뭔가 갑자기 왜 이렇게 허풍으로 가는 거셔

군자라고 말하면서 한다는 말이 명이 이래서 이렇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건 잘난 놈의 태생을 부러워하는 비루한 심리이다.

사생유명이고 부귀재천이라는 것이 그럴듯한 말같아서 너도나도 쓰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말하는 사람은 대개 실패자나 열등감있는 자들이지 성공하고 승자는 하지 않는 말이다. 니체의 노예도덕이다.

근데 이게 잘 되면 내가 잘나서이고 안되는 건 조상탓이고 하늘탓이고 부러운 놈들은 태생이 저러니 하면서 좌절하는 것이다.

군자는 스스로인자이거나 스스로가 되려는 자인데, 명에 있고 하늘에 있고 이러면 스스로는 어디있나

실수 없음이 아니라 실수가 어디서 오고 가는지를 살피는 것이고 그것이 예가 되어가서 원칙에 융통성을 가미하는 것이다. 사해나 천지는 예와 같은 보편적인 것을 의미한 것이다. 거기에 형제를 집어 넣는 것은 이 자하가 어디서 들은 건지는 몰라도 지 맘대로 해석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나도 내 맘대로 해석한다. 힛

설마 같은 종교 아래에선 서로 형제이고 자매라고 하는 그런식의 개념은 아니겠지 이런 곳에서 이러면서 등처먹을 구실로 쓰는 것이 되는데 그게 아니면 서로간의 다름을 이해못하는 자들이 같음을 말하면서 퇴행시키려는 음모이다. 

어쩌면 이 자하가 이런 욕망이 있는 자일지도 모르겠다. 공자를 이용해 교단을 만들고 그로인해 종교적인 집단체제와 유풍을 만들려는 거 말이다. 결국 이후에 이것이 성공해 우리나라가 먹혔는데 우리도 참 등신들이다.

그리고 니들은 군자가 아니다 군자를 들먹이며 떠들지 마라

사해는 사면이 바다인데 천하보다 넓다. 천하는 하늘 아래라는 것이 떳떳함일 수도 있고 그렇게 보편적인 의미가 된다는 식으로 쓰는 것도 되고 나라만하거나 이다. 근데 사해란 섬이다. 아시아대륙이 결국 사해로보면 얼마나 큰 것이고 북남미대륙이 사해식으로 보면 얼마나 큰가 가장 대륙을 크게 보았을 때인데 이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땅을 본적이 없다. 그냥 상상한 가장 큰 땅의 크기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사고를 하기 시작하면서 배움은 옆길로 샌다.

 

자장이 밝음을 물었다.

자왈 "물에 서서히 젖어들듯이 하는 참언과 피부로 찌르듯이 가슴아픈 하소연에 경도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밝다 하겠다. 물에 젖듯이 참언하는 것과 피부로 찌르듯이 안타까운 하소연하는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밝을 뿐인가 고원하다고 하겠다."

 

이 논어의 편집자가 대단하다는 것이 또 드러난다.

정치하다보면 아니면 일상에서도 경계나 인식하지 못하게 많은데 관례라서 인맥으로 또 정으로 친하기 때문에 등등 이런 것으로 다가와 부탁하는 것이나 요구하는 것에 또 나도 모르게 이미 물들어 있고 이미 발담그고 있으며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를 그런 상황들도 있고 이러면서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쉽게 흔들리는지 안다. 또 가슴 아프고 눈물나게 어렵고 불쌍하며 고통스러운 공감과 동정을 가지게 하면서 다가오는 부탁과 하소연을 듣고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경험한다.

이런 것이 누구나 있는 일이고 그런데 지위있고 중요한 자리에 또 일에 참여되었을 수록 이걸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법을 만들거나 집행하거나 하면서 이런 것에 좌우되면 그걸 누가 신뢰하고 누가 이걸 이용해서 득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 크든 작든 이런 것이 있으니 그에따른 전후 결과나 사정을 자세히 해야 한다. 그외의 직업이나 일에서나 일반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이런 것을 알고 사고하는 체계를 길러야 하는 것이다. 이걸 분별할 수 있는 것을 밝음이라고 했다. 밝음이란 이런 맥락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아닌데 여기선 예에 대한 또 인에 대한 설명을 하다보니 이런 곳에서 말하는 것으로 편집을 했다.

 

즉 감정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고 그거보다 더 큰 그림이나 지향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며 예로서 원칙을 일순간의 유혹으로 저버려선 안된다는 것이다. 눈앞의 구원을 위해 더 크고 많고 깊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이건 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나의 생명을 희생해서 10명의 생명을 구하는 이런식으로도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는 지난하게 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도 그렇게 논의를 하지만 이번 코로나에서 그나라가 하는 짓은 전혀 이런 정의론과는 상관없는 정책들이다. 나라에 사람이 죽어가는데 경제가 중요하고 전체 면역을 따지고 그들이 죽어서 우리가 면역되면 된다는 논리를 생각하고 전염병으로 죽는 거보다 먹고 사는게 우선이게 된 사회이며 사람이 죽든 말든 자기의 정치적 야심이 중요하고 이런 것을 보면 말로는 하나의 생명을 중시하는 것처럼 하지만 막상 벌어지면 그건 탁상공론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여시 말로는 쉽고 이론으론 다 아는 자들이 이런다.

이것이 정치하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 자장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장이 그만큼 정치에 대해서 관심있거나 이걸 제대로 못할 거 같아서거나 그래서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아까 말한대로 자기의 예가 서있고 그로인해 세상의 예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 되어야 이러한 것에서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해야할 것을 위해 밝음을 가질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언제나 이로인해 갈등하고 고민하고 혼란으로 감정적인 고통에 시달린다. 판단한 것에 흔들리고 후회하고 미련이 남으면서 결국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예가 힘듦이고 자기의 예나 인을 지키고 나아가는 것이 힘듦이다. 그걸 말로 듣고 안다거나 말로 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이 얼마나 가당찮은 것인지 굳이 강조한 것이 앞구절이다. 그래서 편집이 그럴듯하다는 것이다.

 

자공이 정치를 물었다.

자왈 " 먹을게 족하고 국력이 족하고, 백성에 신뢰가 있다면 된다."

자공왈 '셋중에 부득이 하게 하나를 버린다면 뭘 버릴까요'

자왈 "군사를 버린다."

자공왈 '부득이 하게 둘 중에 하나를 버리면 뭘 버릴까요?'

자왈 "먹을 걸 버린다. 자고이래로 죽음은 있었다. 백성이 신뢰가 없으면 설 수 없다."

 

이건 좀 이상하다. 어차피 죽음은 있어 왔으니 그래서 먹을게 우선이 아니라니 이건 반대한다.

먹을걸 안주는 자를 신뢰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노력해서 다룰 수 있는 이유나 원인으로 죽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인명을 중시하는 세상이고 그것이 우리의 책임인 세상이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이게 뭔저고 저게 뭔저고 하겠지만 현실이 닥치면 우선 먹고 사는 것이 관건이다. 배고픈데 신뢰라니 밥을 신뢰하지 너를 신뢰하지는 못한다. 이걸 요구해서는 안된다.

사람에게 너무 처음부터 고원한 이상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어야지 배고픈데 배고파 죽을거 같은데 왠 이상론인가 사람은 이러한 것을 해결하면서 신뢰로 나아갈 수 있는 종족이지 그렇다고 무조건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처음부터 지향적인 의미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것인데 이게 예라고 했는데 헷갈려하나?

배고픔을 면하고 그러면 그다음의 의미를 찾고 더 고원한 것으로 추구해가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순서 건너뛰거나 순서를 헷갈려 하는 것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말더듬듯이 천천히 하라더니 여기선 너무 건너 뛰며 도약을 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도 경제발전이라는 이유로 신뢰를 버렸다. 그 신뢰가 다시 나타나는식의 기미가 요즘 사건으로 인해 나타나는데 한번 버린 것이 다시 나오는데 어려운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신뢰가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이해못할 것은 아니지만 이걸 알아보는 것은 극소수의 군자들이고 대개는 이런 것이 되지 않는다. 그 대다수의 현실을 보고 그에따라 해가면서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고 본다. 즉 현실은 비근하고 쉽고 간단한 것부터 해야한다. 형이상학은 그다음이다.

엄밀히는 경제발전이 아니라 배고픔을 면하는 것이다.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말에는 남들보다, 다른 나라보다 잘살고자 하는 열등감이 내포되어 있어서 조심해서 분별해야 한다. 더 더 더 바라는 욕구는 배고픔을 면하는 것하곤 다른 범주이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인지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인지가 된다.

우리가 먹고사는 것이 해결된건 오래전인데 그이후에 경제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정치하며 자기 이권을 차지하려는 것이지 그 의도의 불순을 보아야 한다. 신뢰가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지식인이 없는 것이다. 누가 이걸 아나 이건 서양문명에선 없는 이론이다. 철학책을 뒤져봐도 신뢰를 말하는 곳은 못보았다. 신뢰가 하나의 개념으로 구분되어 체계가 되는 것이 이후의 문명에서 관건이 될 것이다. 이걸 아는 공자가 대단한 건 사실이다. 공자가 안게 아니라 그 이전의 문화가 안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신뢰가 무조건덕으로 중요하다. 이건 진짜인데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신뢰를 쌓아가고 서로 신뢰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이런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우선 순위에서 먹고사는게 해결되어가면서 신뢰를 쌓는 것이 되기가 쉽다. 이것이 예인데 이걸 헷갈려하는 공자가 아쉬운 것이긴 하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긴 하지만 여긴 그렇다.

한 개인이나 소수라면 신뢰부터 되기도 한다. 하지만 수가 많으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건 잘 살필 이론이다.

'수가 많으면 다르다.'

신뢰는 오랜시간이 필요하거나 그럴만한 원인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서 이건 의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도해도 역시 시간이 누적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고 단기간에 한다해도 그걸 할 수 있는 역량이 이미 시간이 걸린 거라서 역시 오랜 누적이 없인 어떤 신뢰도 되지 않아보인다. 그런데 이걸 우선 내세운다고 할 만한게 아니기도 하다. 신뢰는 뭔가 하고 추진하고 정치하고 지도해가면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걸 하겠다고 의도적으로 기만하거나 요구하면서 할게 아니다. 즉 이 글은 원론적인 것임을 넘어가지 못한다. 실재 적용에선 좀 더 연구해야 한다.

 

극자성이 말했다. "군자는 질이면 되지 어찌 문해야 한다고 하는가?"

자공이 말했다. '저사람이 군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사두마차가 혀를 따라잡지 못하는구나 문이 질이고 질이 문인데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이 개나 양의 가죽과 같겠나'

 

<극자성이 공자의 제자들을 비판한 것이다.  군자라고 했는데 군자가 되려는 자들이면서라고 비꼬는 것일 수도 그냥 학인일 수도 정치하는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고 이상적인 인간일 수도 있는데 여긴 그냥 공자 문하생들이라고 한다.

거기에 자공이 비아냥을 한다. 사두마차가 혀를 못따라 잡는다는데 이게 얼마나 심한 비꼼인지는 감이 요즘과는 다르다. 아무튼 문과 질이 서로 함께라는 것을 호랑이가 맹수인데 그가죽과 개의 가죽 구분이 안된다는 의미로 하는 듯한데 비유가 좀 억지이긴 하다. 호랑이의 맹수 기질이 호피무늬로 나온다는 의미일거 같다. 문과 질이 함께여야 되는 것은 사실이다.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이면이다. 아니면 그로인해 의도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냥 질만이거나 문만이거나 또 문과질을 함께 한다는 것이든 의도적인 것이어야 한다. 의도적인 것이 인위적인 작위적인 것으로 오해하진 말아야 한다. 무엇을 행하는 것엔 예, 즉 그 이유와 체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하다보니가 아니다. >

 

애공이 유약에게 물었다 "올해는 기근이 심해 재정이 부족한데 어찌하면 좋겠소?"

유약왈 '어째서 십분의 일의 세법을 쓰지 않소?'

애공왈 "십분의 2를 해도 내가 쓸 돈이 부족한데 어찌 십분의 1로 줄이겠소"

유약왈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도 풍족한 것이고 백성이 부족하면 임금도 부족한 것이오'

 

<마지막 말은 원래 백성이 족하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고 백성이 부족하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족하겠습니까이다. 그래서 저렇게 해석했다. 이런식의 말도 관용어인지라 지금은 그다지 쓰지 않는 말투이다. 뭔가 도피하는 듯한 말이다. 그냥 백성이 굶는데 임금이 배부르나식으로 말하는 것을 백성이 굶는데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배부르겠나 라는 것이다.

완곡하게 한다고 하겠고 비겁하게 도망치며 말하는 것도 되겠고 공손하게 말한다고도 하겠고 그런데 아마 애공이 임금이라 하대했을 것이나 난 존대로 번역했다. 이유는 지금은 그런 신분이 없는 세상이다. 대통령이 신분이 높은 자가 아니다. 그래서이다.

그리고 애공이 하는 말좀 바라 이것도 돼지세끼이다. 기근을 말하면서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가 부족한 것을 걱정하고 있다. 이런게 왕으로 있으니 이게 나라냐 저게 왕이냐고 하것다.>

 

자장이 숭덕하는 것과 미혹을 분별하는 것을 물었다.

자왈 : "충과 신을 주로해서 의를 행해가는 것이 숭덕이다.

그리고 사랑하면 살기를 바라고 미워하면 죽어 버렸으면 하는데 살기를 바라다가 죽었으면 하면서 감정이 왔다갔다하면 미혹이다. '진실로 돈때문이 아니라 또다른 여자를 사귀는 재미때문이다'"

 

<마지막 부분은 시경에서 따온 것인데 이런식으로 시경을 끝에 인용하는 것이 훌륭한 것이라고들 그당시엔 알아서 이렇기도 한데 여기선 약간 뜬금없는 소리같기도 하다.

충과 신으로 의를 행하는 것이 덕을 숭상한다는 것인데 이게 해석이 좀 어렵다.

충과 신이라는 것부터 어려운 말이다.

충이 뭐냐는 것부터 서로 합의가 있는 것도 아닌듯한데 난 내맘대로 하겠다.

충이라는 것이 일종의 마음이 충일, 마음이 당당함,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그러한 충만되고 전일하게 이어져 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데 이후 말하는 미혹과도 비슷한 것이다.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이 자기가 생각하거나 마음 먹은 것에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충만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그건 고집이이고 신념이면서 오로지 한 길만 간다식으로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것을 하려는데 끝까지 관철하려면 그 하려는 것에 대한 지식이 확실해야 한다. 그것이 맞는거라는 확신도 있어야 하고 그러기위해 방대한 지식과 이해와 그걸 뒷받침하는 근거와 그것을 정말로 깊이 마음속으로 받아들여 확충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흔들리지 않는다.

사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인간이니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에 처하고 그러면서 갈등이 일어나는데 그런 흔들림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복원력이 확실하고 언제나 유혹되어도 그 마음을 무너뜨리지 않을 확신이 있어야 한다. 또 이러한 자기자신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충과 함께 신을 말한다. 내가 그렇게 할거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신뢰,

신뢰가 없으면 스스로의 불안감을 감당할 수 없고 이러면 충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 충은 신을 바탕으로 하고 신은 충을 근거해서 형성된 마음 상태이다, 서로 되먹힌다. 충이 신을 신이 충을 그렇게 서로 형성시켜주는 관계이다.

흔들리지 않으면 충이 아니다. 이건 고집이고 아집이 되며 신념에 종속된 하등의 인간이다. 흔들리기 때문에 신뢰가 있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으면 신뢰를 말할 이유가 없다. 신뢰가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위험, 유혹, 위기, 갈등, 번뇌가 있어서이다.

그래야 의를 행하는데 외부로 나가서 행하는 것에 이러한 내적인 체계가 있어야 하고 의지가 있고 판단기준이 명확하며 이런 것이 가능하게 한 것이 충과 신이고 그것이 외부로 드러나면 의이다.

 

그리고 미혹을 설명하면서 요즘은 양가감정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데 서로 상반된 두감정이 있는 것인데 사실 양가감정도 그다지 이상한 이론인데 두가지라기 보다 다양하게 더 있는데 두개만 발견하나보다.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바라는게 두가지라지만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 것도 있다. 이게 이상하다고 보지만 산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이 있고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는 욕구도 있다. 또는 사육하려고 하거나 맘대로 부릴려고 하거나 그런 것도 있는데 이건 산것도 죽은 것도 아니다.  감정이란 한 두개로 말하는 것이 어렵다. 그 복잡한 것에 굳이 한정지어서 볼 것이 아니다. 그런 숫자에 맞추어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여기선 이건지 저건지 결정내리지 못하는 판단을 힘들어 하는 것이거나 미련을 가지면서 자꾸 현실을 보기보다 과거에 얽매여 있다는 식으로도 볼 수 있겠다. 뭐든 판단을 하지 못하는 어리숙한 상태이다.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서 물었다.

자왈 "군군, 신신, 부부, 자자"

공왈 '좋군요 정말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 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면 비록 음식이 있다고 한들 내가 먹을 수 있겠소?'

 

<이게 좀 유명한 말이다. 정명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대답을 해준 것인지 애매하다. 이걸로 장황한 철학적 구상을 하며 열심히들 떠드는 것이지만 본문을 보면 너무 말을 안한 것이 아닌가

임금이 임금이고 아버지가 아버지라는 말장난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딸은? 어머니는? 그리고 그외 회사원은? 노동자는? 거지는? 아이는? 할머니는? 소비자는? 백수는?

차이나가 은을 멸망시키고 한다는 짓이 적통주의라고 우리 가족만 천자다라는 개소리를 하는데 그걸 좋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노예로 만족했다가 이렇게 춘추전국이라는 불만을 터트리고 내가 천자라고 하고 싶은데 그러다가 진시황이 나와서 드디어 나도 천자라고 하다가 죽는 일이 생긴다. 참 역사가 별거 없다.

임금이 어떤 자인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고 그로인한 책임은, 의무는 그리고 누가 임금이 되는 건가? 이런식으로 임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부터 난감함이다.

이당시엔 지금같은 선출이라는 생각은 못했나? 힘으로 강하게 때려죽인자가 임금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미개한데 우선 "누가 임금인 것인가" 라는 것부터 이때 고민을 하지 못했다. 그런면에서 이 정명론은 대단한듯이 말하기엔 너무 형편없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 않나? 누가 임금을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때려 죽여버리는 시대에 임금이 임금다워야 한다는 말은 개소리다.

질문을 막는 것이 이미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정명이 안된 것인데 하긴 여긴 인간이 없다. 임금, 아버지, 아들인데 임금이전에, 아버지 이전에, 아들 이전에, 인간인데 왜 인간이 없지?

인간에 대한 정명이 안되는데 그다음을 나가면 이래서 이런 것이 너무 말한듯이 보이지만 말이 아니라 엿먹이는 것이다.

그래서 경공이 말하지 않나 그렇게 되면 내가 밥을 맛있게 먹을거 같다는 황당한 말을 하지 않나 이 경공 내보기엔 천재다. ㅋㅋ

아니면 공자가 돌려치기 한 것인가? 경공에게 니가 임금인가? 라며 이런 질문은 이당시 안되는 것이니 마음은 굴뚝같으나 저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임금 같지도 않은게 와서 정치를 묻는데 내가 왕인데 너한번 정치가 뭔지 씨부려봐 하니 화가나서 그러는 니가 왕이냐 왕이 뭔지나 아냐? 이게 군군 왕은 왕다운 것이 있어야 한다인데 너같은건 왕답지 않아! 라는 말인가?>

 

자왈 "겨우 한 두마디 말만 듣고 송사를 판단하는 자는 유(자로)일 것이다."

자로는 허락한건 미루지 않는다.

 

<공자가 한말은 성급하게 자로가 판단한다는 식으로 이해한 것이고 전후 사정 다 봐야 하고 한쪽말만 듣고 판단하지 말라는 의미도 되는데 뒤에 말은 나중에 덧붙인것인지 뭔가 변명같다. 하락한것은 또는 판단한 것은 미루지 않는다는 결단력있는 행동을 말하는 듯하고 아니면 행동도 성급히 한다는 것인가?>

 

자왈" 송사를 처리하는 것은 나도 남들처럼 할 수 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송사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대의를 가지는 방법이다.

즉 변호사나 판사를 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송사가 없어지는 세상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바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이 되게 하기위한 판결이고 공부이고 듣고 분별하는 것이다. 일상도 먹고 싸는 것조차도 그것을 위한 것이 된다.

판사라서 판결하고 검사라서 죄를 심문하고 변호사라서 변호만 하는 것은 직업이다. 돈벌이지 이건 체면도 아니고 격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돈벌기 위해 남을 괴롭히는 자들일 뿐이다.>

 

자장이 정치를 물으니

자왈 "그 지위에서 타성에 젖는지 경계해야하고 행함에는 진심이어야 한다."

 

<습관되지 않는거, 허례허식이 되지 않는거, 길들여지지 않는거, 별 생각없이 행동하지 않는거, 당연한 일상으로 살지 않는거, 지루한, 그렇고 그런 일과로 살지 않는거, 이것이 중요하다. 이런 상태라면 사는 것이 아니라 안 죽고 있는 것이라서 죽은 무리라고도 하겠다.

언제나 새로워야 하고 신선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게 살기는 어려움이 있는데 어렵다고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군자라면 정치한다면 도를 배우려고 한다면 더 나은 존재가 되려면 이걸 해야 한다. 아니면 그냥 인간이다. 평범한.

이하나의 결의가 산자와 죽은자를 가르는 것이라서 그렇다. 내가 살고 있는가? 그러면 지금 하고 있는 그 행동에서 설레임이 있는가? 긴장하는가? 그전에 보던 방식으로 보는가? 다르게 보려고 하는가? 이런 것을 알아야한다.

거기에 정치는 더 심하다. 한 사람 한사람이 다른데 익숙하게 습관적으로 다루면 곤란하다. 사건이 같아도 사람이 다르면 다른 것이지만 익숙한듯 버릇처럼 다루고 그러다가 실수하게 된다. 나라는 크다. 그 큰 것을 항상 조심하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크게 된다. 진심이어야 한다는 말도 같은 말이다. 일종의 동어반복인데 진심이어야 한다는 것이 긴장하고 마음을 다해야 하는 것인데 마음을 다하려면 언제나 새롭게 보면서 일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자왈 "문은 넓게 배우는 것이고 예는 간략이다. 그러면 어긋나지 않는다"

 

<배우기 위해선 우선 견문이 필요해 방대하게 접근해야 한다. 여러 학설들 다른 의견들 반대되는 의견들도 배우는 것이고 다양한 경험과 지식들을 우선 겪어야 한다. 이거 저거 닦치는 대로 보고 익히고 나름의 체계가 세워질 때까지 가리지 말고 보고 배우고 겪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간략화인데 정리되어가고 체계가 형성되어가야 한다. 어떤 면에선 방대하게 접근해서 간략화 될때까지 다양하게 볼 필요가 있기도 하다. 처음부터 이거만 한다고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를 쭉해서 이룬 경지가 있으면 이룬 것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선 여러가지를 접하고 다루어보고 익혀보고 하는 것은 언젠간 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이라서 그렇다. 현장에서 배우고 익히고 결과내고 실천하고 다시 결과내고 하다보면 결국은 다양한 분야 다양한 사람 다양한 사건들이 된다. 여기엔 마음의 유연성이 있어야 하고 그 마음의 유연성은 지식의 유연성에서 나오고 지식의 유연성은 체험의 유연성에서 나오고 이런 식이라고 본다.

그렇게 정리가 되어 큰 대강의 흐름을 파악 할 수 있으면서 명확한 체계가 이루어지면 예라고 한다. 

그래서 예는 오랜시간의 배움이 모여서 하나의 체계를 완성한 것이다. 그냥 아무나에게 예가 있고 없고 예가 어떻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예의 완성이 대개는 어렵기 때문이다.

 

자왈 "군자는 사람들의 아름다운면은 돕고, 아닌면은 버리게 한다. 소인은 반대로 한다."

 

<쉽게 말을 하면 소인은 사람을 죄의 구렁텅이로 끌고간다. 유혹하고 같이 나쁜짓하기를 바란다. 범죄자를 소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극단적으로 이렇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이 하는 것이 이렇다고 하면 좀 화나니까 ㅎㅎ 소인들이 잘못된 것으로 이끌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좋은 거라고 아름다운 거라고 알아서이다. 의도가 나쁜 사람은 적고 의도가 좋다고 알아서 하는 것이 더 많다. 잘 모르면서 잘 안다고 생각하거나 그보다 아닌 것을 그런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자세히 알면 누가 그렇게 하나,

그래서 소인이라고 이들은 일반인들인데 그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지식의 부재이다. 지식이란 학교에서 배우고 박사가 된다고 지식이 있게 되진 않는다. 박사에게 지식이 뭐냐고 물어야 한다. 그럼 그들은 뭐라고 대답하나? 뭐라고 대답하냐가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답하려고 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다.

자왈 "정치란 정이다. 바른 것이다. 다스리는 자가 바르면 누가 바르지 않겠는가?"

 

<거꾸로 말해도 된다. 니가 바르지 않으면서 남보고 바르라고 하면 듣겠냐이다. 계강자가 권력자이니까 더하다.

"정자 정야" 라면서 약간의 말장난을 한다. 시에서 각운 맞추는 것인데 논어에 이런게 많다. 글배우면 처음에 하는 것이 이런 말가지고 노는 것이다. 나도 말가지고 이렇게 맞추면서 했더니 음~ 썰렁했다.

아무튼 지금도 정치하는 자들이 지도 하는 짓이 개같으면서 남 욕하고 물고 늘어지고 이런 놈들이 법을 만든다고 하니 가관인 경우가 느무느무 많아 훔,

그렇다고 정치인이나 이런 말에서 배우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도 자기는 잘한다고 생각하고 맞는다고 생각하고 그러면서 남을 비판하고 욕하고 남은 그르다 하면서 자기 성찰을 못한다. 자기를 살피면 미혹도 두려움도 없다고 앞에서 말하는데 말귀 어두우면 한말 또하게 하고 그러면 이렇게 돌려서 욕도 한다.>

 

계강자가 도둑이 많아서 걱정하며 물으니

자왈 "다스리는 자가 욕심내지 않으면 상준다고 해도 안한다."

 

<공자가 이 계강자가 어지간히도 짜증나나 보다. 앞에서 하는 말투와 비슷하다. 니가 욕심 안냈으면 도둑이 있었겠냐라면서 비아냥인데 이래도 되나? 아니면 계강자가 마음이 넓어서 이런 것을 받아주는 것인가 아니면 이걸 못알아듣나? 자기를 뒤통수 친걸 모르나? 아마 모르나보다 또 묻고 있으니 말이다.>

 

계강자가 정치를 물으면서 한다는 말이 "무도한 자를 처형하면서 유도(도가 있게)하게 하면 어떻소?"

자왈 '정치하겠다는 놈이 사람 죽이는 연구냐? 니가 선하고자 하면 백성도 선해져 임마!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라서 풀위에 바람이 불면 저절로 눕는다.'

 

<이바라 하는 말이 아주 대놓고 뒤통수 쳐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도 이상론이다. 소인은 의지가 없나? 자아가 없어서 자기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나 군자가 하라는 대로 그냥 하는 순종자야? 그래? 이건 아니지 군자는 소인을 이리 저리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갈 수 있게 자립시켜야 하는 것이지 소인을 군자가 되게 하는 것이지 이리 저리 가지고 노는게 아니다. 계강자 땜에 화나서 그랬을거 같아 이건 넘어가지>

 

자장이 물기를 "선비가 어떠해야 통달한 사람이라 할까요?"

자왈 '통달이 뭐라 생각하는데?'

자장왈 "나라에서도 소문나서 알아주고 집에서도 알아주는 거요"

자왈 "그건 유명해진거지 통달이 아니다. 통달이란 뜻이 바르고 의를 좋아하고 사람들의 말을 살피고 얼굴을 살펴 자신을 낮추면서 사려있게 대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통달한 것이다. 소문이 난다는 것은 얼굴은 인자하나 행위는 아니고 그 자리에서 타성에 젖어 나태한 것이다. 이걸 소문이 나서 유명해진다는 것이다."

 

<들을 聞을 통달한 것이라고 자장이 말한 것이다. 명예이거나 유명해지거나 소문이 나서 널리 알려진 것을 말한다. 이걸 達 통달한 것으로 말하니 이런 놈을 제자로 둔 공자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공자가 달이 뭐냐고 되묻는게 있는데 이런식의 대화를 할 경우 상대가 짜증나서일 경우도 있다.

"어떻게 하면 통달해요?"

'통달이 뭔데?'

통달이 뭔지 몰라서 되묻나 뭔 헛소리하는 건가 해서 되묻는 거지

역시나 집안에 또 전국에 유명해지는 것을 말하니 그럴줄 알았다는 것이라서

설명이지만 반은 화내는 것이고 반은 설명이다.

즉 자장이 앞에서도 게으르거나 타성에 젖거나 하는 습관적인 일처리 하는 것을 나무라는 말을 했는데 여기도 그걸 다르말로 하지만 결국 같은 말인데 이 자장이 그런 놈인 것이 된다. 의례적이고 안일하게 일하는 놈이다. 그래도 못알아 먹는다. 이렇게 말해도 같은 말 저렇게 해도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해주는데 이해를 못한다. 참 어지간히 멍청한 제자다.

뜻이 곧아야 한다는데 자장이 별다른 생각이 없는 인간이라는 말이고,

말을 살피고 모습을 살피면서 상대방이 지금 어떤 상황이지 볼 수있어야 한다는게 이게 항상 깨어있어서 습관적으로 사람대하지 말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신차리고 일해 시간만 때우지 말고라는 것이다.

이런 놈이 유명해지길 바란다니 어이없기도 하다. 거기에 화가 안풀렸는지 공자가 욕을 한다.

너같은 인자한척하지만 행동은 그게 아니고 하는 일은 하던대로만 하는 게을러빠진 놈이 유명해지면 안되 임뫄>

 

번지랑 같이 무우대 아래에서 놀다가 물었다. "덕을 숭상하는 것과 간사함을 닦아내는 것과 미혹함을 분별하는 것을 알고 싶습니다."

자왈 '질문이 좋은데, 먼저 일하고 그 다음에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다.

자신의 나쁜 점을 이기려고 하고 남의 나쁜 점을 치려고 하지 않는 것이 간사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번의 분노로 제정신 아닌 상태가 되어 그것이 부모에게까지 화가 미치면 미혹이다.'

 

<번지가 숭덕을 묻는데 일하는 것에 그 이득을 나중에 생각하라고 하는데 이 번지가 돈이나 이권부터 따지고 일하려고 하는 놈인가 싶다. 간사함이라는 것에도 니 잘못이나 먼저 알고 고치려고 하고 남의 잘못을 드러내고 욕하면서 따지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 역시나 번지 이놈이 간사한 놈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 화를 내도 제정신 못차리고 지랄발광하지 말고 그러다가 잘못하면 누굴 다치게 하거나 뭔가 크게 되면 집안 절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건 경고인데 그래서 질문 좋다라고 하는 것이 "너 말 잘 꺼냈다" 하면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마음에 담아둔 것을 이 질문에 끄집어내서 말하는 거 같다. 좋게 말하면 말할 타이밍 찾아서 한 것이고 적절한 때를 기다린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꿍하고 담아두고 한 번에 터트린 것이다. >

 

번지가 인을 물었다.

자왈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를 물으니

자왈 "사람을 아는 것이다."

번지가 못알아들으니

자왈 '곧은 사람을 등용해 굽은 사람과 함께 두면 굽은 것이 곧아지게 된다.'

번지가 물러나 자하를 보고 물었다. '지난번에 내가 공자에게 지가 뭐냐고 물었더니 곧은 자를 등용해서 굽은자랑 두면 곱은자도 곧아지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가요?'

자하왈 "말이 풍부하다. 순이 고요를 등용하니 불인한자가 멀어지게 되었고 탕은 이윤을 등용해서 불인한 자를 멀어지게 했다."

 

<번지가 말귀가 어둡다. 안다는 것이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을 안다는 것이란 현명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인데 문제는 번지도 순이나 탕이 아니고 자하도 당연히 아닌데 지들이 고요을 등용하고 이윤을 등용하는 것에 그리 난리일건 뭔가

내가 사람을 보고 똑똑해서 써먹겠다고 하면 이건 좀 이상한 면도 있다. 쓸만한지 보고 이득될지 보고 친구사귀어도 너무 괴상하다. 그런데 이들은 지들이 왕도 아니면서 왕이 사람 써먹는 것을 듣고 알았다는 듯이 한다.

자기에게 적용했을 때 자기가 누구를 알아보아 그사람을 어디에 쓸 것인가는 생각안해보나 공자 입장에선 사람을 보고 가르칠만한가 보고 선택했다면 뭔가 기분이 나쁘거나 열등감이 생기고 피해의식이 있게 될 수도 있는데 또는 편애이고 불공평한 것도 되는데 지들은 누굴 보고 될 놈 안될 놈 가르고 이용해먹을 생각을 하면서 저러는가?

"곧은자를 굽은자와 같이 있게 하면" 이 번지보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라 하는 것을 이렇게 돌려 말한 것이기도 하다. "너 같이 굽은 놈은 곧은 자와 같이 있어야 해" 이니까 한심하게 자꾸 묻지 말라는 것이지 딴데 알아보라는 것이고>

 

자공이 친구사귐을 물었다.

자왈 "충으로서 권고하고 선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안되면 말아라 그러다가 자신을 욕되게 하진 마라"

 

<이런데 자공은 친구에 대해서 묻는다. 자공이 좀 괜찮다. 이걸 편집한 사람도 이걸 생각해서 바로 뒤에 이런 것을 넣었을까?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번지나 자하보다는 나은 사람같다.

좋게 해설하면 좋은 방향으로 이끌다가도 친구가 마다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싫어하거나 상황이 아니면 너무 억지로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고 억지로 하는 것이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끝나면 안되는 것이긴 하다. 그렇다고 막무가네로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적당한 선이 있는 것이고 그 선을 알면서 밀당을 하라는 것이 된다.

포기해야 하느냐 아니냐도 관건이라서 그만두라고해서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포기하는 것도 아닌것도 아닌 그런 것인데 장기간의 가늠을 두고 하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말은 없으니 진짜 그런가는 모르겠다.

 

아무튼 문제는 내가 맞는가가 젤 문제이다. 내가 충고 그러니까 진심으로 권고한다고 말했는데 원문은 충고이다. 지금은 이 충고가 의미가 변질된게 있어서 오해할거 같아 "충으로 권하면" 이라는 의미로 번역했다. 다들 자기가 맞고 남은 틀리다고 한다. 그래서 아는체이고 가르치려들고 한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나 심각한 것일수록 무엇이 맞는지 누가 맞는지 알 수 없다. 그런 것에 자기가 맞으니 들으라고 하면 어째야 하는 것인가 누가 나의 정당성을 입증해주나

분명 아무도 입중해주지 않고 또 않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결국 불확실한 것에서 서로 논의하고 대화하고 고민하면서 실현해가는 것이지 딱 누가 맞으면 따르기만하거나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라서 이건 또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여기서 친구란 또래 친구가 아니라 광범위한 대인관계로 해석한다.>

 

 

증자왈 "군자는 문으로써 친구를 모으고 친구로써 인을 돕는다."

 

<문을 격식이라고 하면 격식으로 대인관계하는 것인데 격식이 옷이나 음식이나 만나는 장소나 대하는 방법이나 말투나 이런 것도 되고 상대를 대하는 자세같은 심리적인 것이기도 하고 사귀는 목적이나 배려하는 것이나 이런 어려운 것이기도 하고 상대를 감당하려는 마음의 준비이기도 하는 것이라 문이라고 하면서 뭘 말하는지 이걸 다 말하는지 그외 다른 것이 또 있는지는 사실 모르겠다.

그런 친구와 인을 돕는다고 하니 대인관계의 목적이 인이다. 내용은 분명 사람 살리는 것이고 살게 하려는 것이다. 요즘은 이런 목적으로 살거나 대인관계하거나 생계를 다루진 않는다. 그만큼 사는 목적의 다름이 커서 이런 글을 이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너무 높다. 아무튼 그런 지향성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이니 그에 맞는 문 즉 격식으로서 관계한다가 되나?

증자가 이런 정도의 인간인가 뭔가 맞는 말을 집어넣기위해 편집한 것인가>

 

좀 더 비약을 하면서 해석했는데 웃고 떠들며 상상의 나래를 ...

말이라는 것이 한가지 해석만이 아니라 다양하게 해석하게 된다.

화자가 이렇게 말했고 그 화자도 이런 의미로 말한다고 하면서 말했더라도 이미 말이라는 것이 의식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심층이 하는거라서 자기가 아는 내용대로의 의미가 아니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화자일 경우 내가 떠드는 말을 내가 보고서 내안에 이런 것이 있구나 

내가 상대를 이렇게 보는 구나 내가 이런 감정이 잇구나 하면서 알기도 한다.

이 안연편에 안을 살피면서 근심과 미혹과 두려움을 아는 것이 있으니 이렇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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