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설
논어 하권을 헌책방에서 구해 읽다가 내가 좀 해설하고 싶어서 쓴다
논어를 다 해석하는 것은 아니고 이중에 포함하지 않는 것도 많다.
그냥 해석하고 싶은 것만 모은 것이다.
번역이 내 수준에서 설명하고 싶은 것을 이런 고전으로 빗대어서 말하는 것이지 이 고전이 원래 이런 의미였다고 주장 할 생각은 없다. 이런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보기엔 이상하다.
그당시의 사회와 역사적인 발전과정이나 다양한 조건이나 사람들의 의식상태나 저자의 의도나 수준이나 이런 것이 있는 거라서 지금으로선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번역하는 사람의 의도만 있는 것이다. 내 의도파악도 어려운 것이고 남의 의도파악은 결국 곡해일 것이고 과거인의 의도파악은 시도하면서 공부하는 것이고 그로인해 나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만 해도 이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알 도리가 없다.
많은 사람이 아는 듯이 말하지만 역시 내보기에 나도 날 잘모르겠는데 남을 어찌 알고 그것도 수천년 전의 사람을 어찌 아나 전혀 정확하게 안다는 생각으로 해석할 맘은 없다. 그냥 내 의도대로 뭔가를 할 뿐이다.
도움되고 알면 좋을 거 같은 그런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 이상은 능력 밖이다.
과거의 것은 그냥 자료이다. 공자가 성인이나 뭔가 특수한 어떤 존재로 할 생각이면 애초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과거는 그냥 자료이다. 내가 쓰거나 남들이 쓰거나 그런 수단으로서의 대상이지 그것 이상으로 뭔가 의미심장하게 하려고 한다면 그 자신이 음흉함이 드러나는 것이지 그러면 이건 공부가 이미 아니다.
그것을 경외하거나 이런다면 그것도 자료로서 쓰는 것이라서 틀리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런 용도로서 과거의자료를 쓰는 사람이라면 걸르고 싶다. 그런 사람은 이것을 보지 말기를 바란다고 하면 사람을 제외시키는 것이 되어 안되니 읽어도 되는데 내 의도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하기위해 이런다는 것을 생각해주시길 바란다.
한문을 쓰지는 않을 것인데 한문에 대한 연구는 전문가가 좋아하는 사람이 할 것이고 그저 한글식으로 읽기 쉽게 일상어로 하고 싶을 뿐이다. 이런 고전도 한글로만 알려지고 한문의 원뜻은 뭘까 한문으론 뭘까 이런 궁금증이 사라지는 시대가 되엇으면도 한다. 한문으로 논어를 읽으나 한글로 논어를 읽으나 곡해는 여전하다. 조선시대에 한문으로 정밀하게 해석한다고 하던시대도 있었지만 그 당시의 유생들이 그다지 높은 성취를 이룬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를 원대하게 만든 것도 아니고 약자를 보호한 것도 아니고 지금 배울 만한 유산을 남긴 책도 없고 사상도 없고 뭐 그렇다.
서양인들이 영어로 번역한 것을 가지고 학문하고 그것으로 책을 쓰고 자기 학설에 근거로 하고 예를 들면서 말하는 것을 보면 한문과는 전혀 다른 해셕이거나 좀 이상한 해석이라도 별로 상관없다. 또다른 의미와 그 나라에 영감을 주고 창의적인 의미나 개념발전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 한문 원뜻이나 정확한 해석에 집착하는 것이 그다지 좋게만 보이지도 않아서이다.
지금 겨우 우리나라가 우리식의 말을 하기 시작햇다. 그전엔 원래의 말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요상하게 되었는데 다시 이젠 우리가 살아가는 것임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이 한글이다. 한글의 문자를 만든건 세종이지만 한글이라는 언어를 만드는건 결국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이제야 한글을 사용한다.
왕따라니 꼰대라니 이런 말이 그들의 절절한 현실적인 현장에서 나타나는 우리 말이다.
보디빌딩같은 근육이나 힘기르는 곳에선 역기 드는 것을 쇠질이라고 하고 먹방이나 혼식이나 다양한 응용 재미나고 쉽고 입에 착 달라붙는 말을 만들며 소통해가는 우리들의 일상이 좋다.
언어라는 것이 그 구성원들이 살아가면서 직접 맞닿은 그곳의 의사표현이다. 우린 이제 하루하루 스스로 살아가는 그 찬란함을 얻었다. 살아가는 자만이 말할 수 있다. 남의 말이나 시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고 겪고 감각하며 욕망하는 그것들 말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니 참으로 좋은 세상이다. 이보다 좋을 순 없을 것이다.
언어할 수 있다는 그의미를 안다면 우리에겐 지금이 또다른 창발의 위대한 시대이다.
우리가 하는 그 행위를 우리가 이름지어서 말하고 사는 세상이다.
남이 그리고 위에서 이미 정해놓은 언어에 맞추어서 살지 않아도 되는 그 자유를 얻은 것이다.
이 논어라는 고전이 결국 남이 그리고 위에서 정해놓은 언어이다.
이따위 것은 없어도 되는 것이고 없어야 하는 것이다. 언어의 자유를 안다면 이건 금기시 해야 할 책일 뿐이다. 이걸 경전이라고 뭔가 의미를 주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언어의 자유가 뭔지 몰라서 하는 것이니 안타깝다고만 하겠다. 사실 이걸 과거에 누구도 몰랐다. 지금이라고 아는 인간이 있지는 않다. 내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어디서부터인지 그것이 안되면 어떤 것이 되는지 그로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이걸 모른다. 그러니 한문을, 지금은 영어를, 남의 말을, 남의 개념을, 남의 체계를 말하고 자기가 말하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가 말하게 하기 위해 남이 말하는 것을 보고 배우는 게 아니라 남이 말하는 대로만 하라고 하기 위한 교육은 안되다는 것조차 모른다면 가르치질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데도 논어를 말하는 이유는 이미 설명한 것이 된다.
내가 말하려고 남이 말하는 것을 보고 처음엔 모방도 하고 고민도 하고 사고 재료로도 삼고 자꾸 우려먹으면서 수단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내 말을 가지기위한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