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고전

위령공

제라울 2020. 7. 8. 14:22

위령공

 

위나라 영공이 공자에게 전쟁에 쓰는 진법을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길 "조두에 관한 일은 배웠어도(예법은 배웠어도) 군대에 관한 건 배우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있었을 때에 식량이 끊기어 병들고 아사될 거 같은 지경에 이르르니 자로가 성질내며 물었다.

'군자도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자왈 "군자는 곤궁해도 견디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대들더라"

 

<우선 위나라 영공이라는 놈이 묻는게 가당치 않습니다. 

전쟁 잘하는 방법을 묻고 있죠 물론 그때 쯤 병서 읽으며 재미들리고 있을 수도 있고 하다보면 그런 것도 물을 수 있고 자기딴엔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질문 한 것일 수도 있는데 이 글은 상징적으로 하는 말이니 위 영공이 진법이나 묻는자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거기에 조두지사인데 제사지내는 제기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런 것이 예법이라고 하는 듯합니다. 

제사지내는 것이 뭐 대단할 건 없습니다. 그냥 물 떠놓고 지내는 것이나 여러 제사  음식을 차리고 복식하면서 절차 따져서 하는 것이나 그다지 다를 건 없습니다. 

인간들이 자기가 만들어낸 사고체계에 신성함이나 중요함을 덧씌우지만 그건 인간 입장입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제사에 집착하는 것은 제사에 집착이 아니라 이런 것을 하면서 다른 것도 이렇게 하겠다는 그 본보기와 같을 겁니다. 

뭐든 격식이 있고 예가 있고 방법이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격식이 사람을 살리고 돕고 이득되게 하는 방법이고 격식이죠 그런데 자기권력을 과시하고 자기 이득을 위해 쓰니 답답한 것이긴 합니다.

공자는 그런건 배운적 없다고 거짓말하고 나가 버리는 것 같습니다. 거짓말이라고 하는 건 분명 앞장에선 제나라를 치러 가겠다고 했던 적이 있으니까요 명분이 되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죠 

쓰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른데 안다고 아는 것을 무조건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어디에 언제 쓸지를 아는 자가 진짜 지성인이고 아는 자이긴 합니다. 이런 단계로 나아가는 지식인이 없긴 하지만 분명 이런 구분은 과거에서부터 내려오던 구분입니다. 분수는 언제나 있죠 그 나누어진 순서에 따른 분수죠

그렇게 꼬장꼬장한 짓을 하다가 결국 굶주리는 지경에 가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융통성 없음은 이런 곤궁함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이유가 공자를 시기한 다른 나라 대부들이 자기나라에 오지 못하게 하려고 일을 꾸며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어려운 상황에 처하니 당연히 자로부터 대듭니다.

거기에 공자가 하는 말도 다분히 감정이 섞인 말입니다. 소인같은 놈의 쉐끼가 대든다고 합니다.

힘드니까 그동안 가르치는 스승도 안뵈냐는 것이겠죠.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그동안 옳다고 생각한 것들을 버리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짓이지만 이것이 일상인 것이기도 해서 뭐라 할 것은 또 없지만 배우는 자들이 이러면 그건 자격이 문제되긴 합니다. 

편하고 배부를 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지 하면서 아는 척을 하지만 힘들고 극한 상황에 처하면 결국 진짜 속이 나오는 것이죠 이 속이 나오는 것을 변형시키지 못하면 그게 배움이겠나요

감정체계라고 했는데 감정을 일으키는 그 체계 자체를 바꾸는 배움에서 무엇을 잘못 이해한 것이지.>

 

자왈 "사야(자공), 너는 내가 많은 것을 배워서 그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아느냐?"

대답하길 '그렇잖아요 아닌가요?'

자왈 "아니지 난 일이관지인거야"

 

<이 일이관지가 참 별난 말이 되었습니다. 

아마 세상 모든 것을 관통한다고 설명하거나 해석하기나 하기도 할 것입니다.

모든이라는 말을 과장으로 쓴다면 모르지만 듣는 사람은 또 그것을 진짜로 알기도 해서 단어 선택은 잘해야 합니다.

불교의 선종같은 황당한 것들이 또 이후에 유행하기도하면서 각성에 대한 의미팽창이 미쳐가기도 하고 지금은 자기 열등감을 이런 것에서 보상받으려고 하는지 자기는 별거 아닌데 과거 누군가는 또는 신은 또 영웅은 또 선각자는 자기 스승은 자기 깨우침은 도는 뭔가 절대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투사를 합니다.

학문을 하다보면 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이 되는데 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이 이치들의 관련성이거나 규칙성이거나 내적인 원리이거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경지에 도달합니다.

이러면 내가 전공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도 되는데 이 지식은 개념이해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또는 그렇게 이론이 정립되는 또는 그러한 논리를 하게 되는 또는 그러한 개념을 전개하는 또는 그런 관념을 형성하는 원리를 안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수학을 설명해주면 이해합니다. 물리학을 말해주면 말해주는 사람보다 더 많은 논리적인 가설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이건 그렇게 이치들의 원리가 보여서 하는 말이지 그 전공자들보다 더 세세히 알거나 더 정확히 알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아는 것인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 아는 것으로 보이거나 다 잘하는 것으로 보이거나 입니다.

일이관지라는 것도 단계나 위상이 있습니다.

어떤 분야에선 나름의 일이관지가 되어서 대강 다 압니다. 하지만 좀 너무 다른 학문에선 전혀 모르거나 잘 이해를 따라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도 위상이 있고 분야가 있고 종류와 방식이 있는 것이라서 "일이관지다" 하면서 뭔가 다 안다거나 다 할 수 있다거나식으로 이해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래서 일이관지라고 말하는 그 말투를 듣기만 하면 그사람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허황된 곳을 보고 있거나 막연한 말이거나 그렇게 자기를 숨기기 위한 거거나 대화를 전환하려고 하거나 나름 대단히 영리한 의도로 쓰고 있는 것인데 본인이 자신의 말 구사하는 방법을 모르면서도 이렇게 하는데 모르면서도 말의 의미라는 것을 정해진 한가지의 의미로 쓰지 않으니까요

이게 보이기 시작하면 말하는 것을 다 안다고 할 수도 있죠 이것도 일이관지입니다. 한마디로 다 안다식이죠

자기가 단어를 어떻게 쓰고 있는지 스스로 모르는 것이라서 더 재밌습니다. 하지만 보는 사람입장에선 그 말하는 의도가 보이니 그렇죠

이 자공과의 대화도 일이관지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이거 저거 익히는 것이 아니라 이거저거의 맥락을 찾아서 굳이 외우지 않아도 할 수 있을 방법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당시엔 추상이라는 말이 없으니 논리계형이라는 말도 없고 위상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도 안 할 것입니다.

위상을 다르게 하면서 보면 그 규칙성이 보이고 원리가 보이기도 하는 것이데 그래서 원리라는 것도 위상에 따른 맥락이지 위상이 다르면 다른 원리라서 원리라고 해도 그게 전부는 아닌 것이긴 합니다.

위상은 상하의 관점 변화인데 좌우의 관점변화도 있는 것이라서 이런 관점의 자유로움을 이해하면 더 쉽습니다.>

 

자왈 "유야(자로), 덕을 아는 자가 너무도 드물구나"

 

<덕을 아는 자가 드물다고 합니다. 그것도 자로에게 말하는데 자로를 비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하는 말인지 자로가 뭔가 하는 것을 보고 낙담한 것인지 알 수가 있나요?

그때나 지금이나 덕을 아는 자가 드물긴 합니다.

그런데 덕을 아는 자가 드물긴 해도 있긴 있어서 지금 같은 세상이 되고는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의 세상이 말세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니 저 당시에 은둔자들이 공자 비꼬면서 쓸데 없는 짓 한다는 투의 말을 많이 했으니까요 

지금 현재도 세상이 또 우리나라가 망해간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전혀 이러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생각이 없는 경솔한 자들은 있는 것이라서 역시나 뭐라 하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구분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도 드물더군요 이런 것을 아는 자도 못본 입장에선 세상이 암울해보인다고 하겠습니다만 그건 아닙니다.

무엇을 보는 지는 다르죠 말을 함부로 하는 자들만 본다고 그 말의 발로도 보지 못하면 안되니까요 말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넘어도 보고 그 다음도 보고 한다면 다른게 보이죠

어느 시대나 언제나 뭔가 아는 자는 극소수입니다.

뭔가 안다면 안다는 것이 뭔지부터 아는 자여야 하는데 이 한 단계 넘어가는데 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대가리 굴리는 이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덕이라고 합니다. 나도 덕을 가르치지만 덕을 말할 만한 상대가 드눕니다. 그저 일상 대화를 하지 덕을 말하지는 않으니까요

서구의 연구에 의하면 내가 그것을 알고 상대도 그것을 알고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상대가 알고 나도 상대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알고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상대가 알고 상대가 안다는 것을 내가 다시 알고

상대가 그것을 아는 것을 내가 알고 내가 안다는 것을 상대가 다시 알면,

이것도 하나의 설명하기 위한 말입니다. 이렇게도 말한다는 것이죠

덕을 아는가? 이런 대화하려면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상대의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상대와 나 사이에 저러한 교류가 일어납니다.  그런 교류가 있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대화가 다른 지경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넘어가서 다다른 결론이 있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얻은 결론이 아니면 상대가 무엇을 안다거나 이건 뭐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그런 일상의 대화로 말하는 것으론 안된는 것이 있음을 압니다.

이런 상태의 대화를 하다가 상대가 이런 상태의 대화를 못하는 일이 생기면 이런 상태로 말하던 것들이 모두 갑자기 헛소리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이러면 한쪽은 좌절감을 보게 되죠 이건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같이 대화하던 사람이 달라지면 그대화는 무효가 된단면 그 공허함이 있겠죠>

 

자왈 "무위로 다스리는 자는 순임금이다. 어찌 하였을까? 공손히 남면을 했을 뿐이다."

 

<이런식으로 과거에 대해서 무조건 선하거나 좋다거나 하는 것은 듣기 거북합니다.

과거가 좋다라고 하는 자들은 현실이 나쁘다는 것을 우회로 말하는 것인데 현실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 뒤틀린 것이라서 이러면 덕을 논하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도 다루지 못하는 자가 덕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렇다고 모두가 이런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과거에 하는 것으로 할 수도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만히 남면만 했다고 들으면 안되는데 그건 남면하면서 의도하는 것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위라고 하는데 하지 않음이면서 다스려지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랬다고 하는 것은 다른 면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말로하고 행동으로 하고 이치를 따지고 예를 정하고 이렇게 겉으로 들어나는 것이 다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로 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것이 있고 이치로 설명해줄 수 없는 것들도 있고 위에서 말한대로 아는 사람끼리 어느 경지에서 보게되는 그 나름의 것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을 생략해서 말한 것이지 그저 남면만 했다고 곧이곧대로 들을 순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할 말이 많고 너무 의미가 절실한데 다 말할 수가 없으니 한마디입니다.

이런 대화를 해봐야 하는데,

우라노스 "뭐하셨는가?"
순          '남쪽을 보고 왔네'

우라노스 "끝나던가?"

순          '이리 했지'

우라노스 "그렇지">

 

자장이 행하는 것을 물었다.

자왈 " 말에는 충신이 있어야 하고

행동엔 독경이라면 비록 만맥의 나라에 가도 행이라 할 것이다.

말에 충신이 안되고 행동엔 독경이 안된다면 비록 마을에서조차도 행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서 있을 땐 수레끄는 네마리 말이 일렬로 서 있는 것같이 믿음직스럽고

수레를 타서는 네마리 말이 멍에에 연결되어 수레에 힘을 모으는 것과 같다. 그런후에야 행이라 한다."

자장이 이말을 허리띠에 적었다.

 

<행이 뭐냐고 묻습니다. 행이라는 것에 대한 의미규정을 한다는 것이죠 그냥 행동하고 활동하는 일상의 신체움직임에서 그 이상의 개념규정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식수준이 한단계 상승하는 것입니다.

이걸 하게 되면 이제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인생이 됩니다. 다른 사람처럼 살고 활동하는 것이긴 하지만 행이라는 의미규정을 한 이후는 그러한 평범하고 사소한 행위에서 다른 경계로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행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고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행하고 있었구나, 내가 행하고 있구나, 내가 행하는 것이구나, 그 내가 그리고 그 행이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경지를 간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이 자장이 왜 그 경지를 간건지 간 것으로 착각한 건지 질문을 강요당해서 하다보니 얻어걸린거니 그냥 흔한 질문이어서 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런 것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공자는 말에는 충신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충이나 신이나 같은 것인데 내외가 다른 것이나 범위가 다르거나 대상이 다르거나 입니다.

충은 사람 사이에서 지금 일어나고 조직 내에서 지금 일어나고 대상들과 함께 할 때 일어 납니다.

신은 그에 대한 평가나 규정된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신은 아무때고 말할 수 있는 의미이고 충은 지금 그러하고 있는가가 됩니다.

그사람 신이 있다고 하면 그사람에 대한 말이 되는데 그사람은 "충하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충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도 대충 충이 있다고 하겠지만 충이라는 것은 현재진행형으로 써야 하는 것이죠 충할 어떤 것을 지금 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임무수행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죠

그리고 신은 그 개인적인 규정이고 충은 범위가 있는 것이어서 넓게 여러 사람과 관련해서 뭔가 행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이 신은 있는데 충은 아닐 수 있습니다. 신뢰가는 사람이지만 충이 아니라서 같이 일하기엔 어려울 수 있죠 지금 같은 개인주의 시대에선 신뢰있는 사람이지만 일할 땐 그다지 협력적이거나 유기적으로 하는 것이 서툴기도 합니다. 어울리는 것을 잘 못하기도 하니까요

뒤에 나오는데, 도가 다르면 같이 도모하지 않는다는데 그 사람이 신이 있어서 좋은 사람인데 우리 도에 충이 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걸 구분하지 못하면 이상한 것이 되는데 사람은 좋은데 또 신뢰가고 훌륭한데 우리와는 사회보는 방향과 세상에 행세하는 방법이 달라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막말로 당이 다르다고 해야겠죠 당이 다르다고 다른 당의 사람을 인신공격하거나 지나친 모욕을 주거나 어느 이상 선을 건너는 행위는 곤란한데 그건 충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해서입니다.충이 다른 것이지 없는 것이나 부족한게 아닙니다. 이런 구분이 확실해야 행하는 것에 기준이 섭니다.

자기만 나라에 도움되고 자기만 나라를 위한다거나 자기들만 그렇다고 하거나 이런식이면 충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입니다. 충 이전에 남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것이라서 의식수준의 문제입니다.

행에서는 독경해야 한다고 합니다.

독이 두터운 것인데 강하고 넓어서 오래도록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이 어떤 것을 끝까지 갈 수 있는가라는 인내와 견디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을 강조해서 독경입니다. 앞에서 충신과 같이 이것도 독과 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긴 한데 독은 짧은 시간에서의 행동이 충실히 하는 것이고 경은 오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건 안배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소홀하지만 오래 하는 것도 있고 지금은 열심히 하는데 오래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안배해서 지금도 열심히 그리고 오래도록 열심히 하는 그런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말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이 후반부의 말인데 이건 다산의 설명을 따라했습니다.

말이 수레를 끌려고 서있는 것이 일렬로 네마리가 힘있게 서 있는 모습에서 신뢰있어 보이고 잘 달릴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달릴 때는 그 4마리의 말의 힘이 수레에 전달되어 한 곳으로 모이기도 하고 4마리가 서로 힘을 분배해서 그렇게 오래도록 달리면서 목적지까지 갈 수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장이 이걸 허리띠에 적었다고 하는데 그럴 듯해 보이는 행이긴 한데 대개 이러면 고리타분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이걸 지키겠다고 고집스럽게 행동하겠죠.

우리 스승이 이래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옳다. 오직 이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순간 이미 그 말과는 다른 것이 되어가고 있다는 정도는 알아야 하는데 대개 이런 사람은 그렇지 못하죠. 

말은 충신이고 독경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딱잘라서 말하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우선 없습니다.

시기와 상황과 사건과 현실에 맞게 어떻게 이것을 적용하고 활용해가며 행할 것인지를 모르면 결국 고집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라는 것을 구분하고 "행한다"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다!!는 것인데 그 사이에 긴 간극이 있다는 것이고 그 간극에서 사유를 하는 것이고 찰라로 멸하고 찰라로 생하는 위대한 창조의 길이 있는 곳이라서 선택을 하는 것이죠 암튼 이 구분의 의미를 우선 알아야 하죠 거기까지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하나 알기도 벅차하니까요>

 

자왈 "곧구나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어도 화살같이 곧고 나라에 도가 없어도 화살같이 곧다.

군자라는구나 거백옥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한다고 하더니 나라에 도가 없으니 물러나서 숨는구나"

 

<이 번역은 내가 좀 변형한 것입니다. 거백옥은 군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도가 없으면 물러나서 마음에 재능을 품으라고 하는데 그건 사람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 가장 힘든건 시민들이 됩니다. 그런데 물러나서 있는 것이 군자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공자가 거백옥하고 친하다고 해서 편드는 걸까요?ㅋㅋㅋ

하지만 여기도 이론과 현실이 다름이 있습니다. 무조건 도가 있으나 없으나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을 보고서 행할 때와 아닐때를 안배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독경이라서 힘쓸 때를 가리는 것이고 이것은 힘씀으로인해 효과가 배가되고 정말 제대로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요한건 도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관건이지 무조건 말대로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게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도가 아니라고 말하다가 죽어버리면 이건 안됩니다.

도가 되게 하기 위해서 방법을 고민하고 배려하고 복선깔고 떡밥 뿌리고 이거저거 해야 할께 많은 것입니다. 즉 언제나 말대로가 아니라 현장에선 현장에 따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거백옥이 잘 한 것이죠

내 해석이 이랬다 저랬다 입니다. 이게 맞다고 하다가 저게 맞다고 하고 결론의 방향이 한결 같으면 읽기가 쉽습니다. 이방향으로 결론 낸다는 것을 알면서 읽으니 당연히 이해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 결론의 방향이 자꾸 바뀌면 오해하게 됩니다. 이쪽인지 알고 쭉 읽어서 그런지 알았는데 나중에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제서야 확인하면 이상하게 이런 말인지 알았는데 저런 말이네 하게 됩니다. 우린 글을 읽을 때 대강 결론의 방향을 짐작하고 읽어서 그와 다른 결론을 끝에 내버리면 못보거나 당황하거나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이 사고의 재료가 되라고 하는 거라서 결론의 방향을 주장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사고계발입니다.>

 

자왈 "가히 더불어 말할 상대인데 서로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읽어버리고,

더불어 말할 상대가 아닌데도 서로 말하게 되면 실언을 하게 된다.

지자는 사람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다."

 

<서로 말할 수 있는 사람과 서로 말하기 어려운 사람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돼먹지 못한 짓이긴 합니다.

내가 사람을 보고 말할 상대는 되는구나, 말할 상대도 되지 못하는구나 하면서 구분한다는 것을 상대가 알면 오히려 내가 더불어 말할 상대가 되지 못하는 건방진자가 됩니다.

그래서 이건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또 사람을 만나보면 그다지 상대의 말을 안듣고 자기 말만하고 상대를 무시하거나 중하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가 나를 그다지 중하게 안보는데 내가 열심히 상대에게 내 말을 해봐야 어렵기만 합니다. 말을 무시당할 때처럼 기분 가라앉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말은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입니다. 그다음에 또 내가 말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전에 그다지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시 또 말을 해야 하나 하는 갈등이 있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그래도 말해야 하는 처지가 되거나 아니면 말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말을 들으려고 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기다림은 세상 끝날때까지거나 그 사안에 맞는 시간에서거나 입니다.

말을 들을 생각이 없으니 우선 말을 들을 생각이 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언제나 말을 해도 듣지 않는 것이 반복되죠 그러면서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계속 눈치를 줘야 하죠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 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나도 내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때 들은 것은 무시했었고 그것을 나중에 알았을 때 반성을 하지만 이건 반성으로 될 것도 아니고 우리 인간의 마음이나 행위가 그렇게 밖에 안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항상 최선을 다한다지만 모든 능력을 매순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지금 허용하는 어느 정도의 활동이 될 뿐입니다. 그 허용되는 활동의 크기가 언제나 매순간 내 능력의 최대치는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하니까요

근데 난 지자가 되지 못하나봅니다. 말을 많이 잃어버리거든요 말하다보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 떠벌리는 좀 과한 것이 많았습니다. 이건 성질이 그래서 말처럼 하기가 어렵습니다. 맺고 끝는 것이 아질 서툴러서리>

 

자왈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인을 해치면서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죽어도 인을 이루려고 한다."

 

<그 유명한 살신성인이라는 말입니다. 가당치 않는 말중에 하나죠

인이 뭔지 모르는데 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어디있어요 

흔히 조금 의로운 죽음을 살신성인이라고 하겠죠 우리도 그렇게 배웠으니 대강 아무데나 살신성인이라고 떠들 것이구요 

말이라는 것이 자꾸 아래로 내려와서 쓰게 되는 것이기도 해서 이걸 또 그렇게 뭐라 할 것도 없죠 다만 학문적으로 접근해서 엄밀한 정의를 해가면서 원리이해나 공부를 할 때는 제대로 알건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도 이런 글에서 자세한 말을 하면 상식에 반하니 대강 여기서 끝내고 ㅎ

 

엄밀히 인이 뭔지 알고 그길을 가는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내 평생 인을 가려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좀 해보라고 하다가 속터져 내가 죽는지 알았습니다.

목숨바쳐 일하는데 감정 상하면 그만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실에선 목숨보다 자기 기분이 더 중요합니다. 기분 나쁘게 하거나 뭔가 손해보는 듯하게 하거나 억울하게 하거나 이러면 목숨보다 더 쉽게 마음을 바꿉니다. 목숨은 사람이 흥분하고 먼지 몰라도 그것이 옳다고 다그치면 정말 그런지 알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거 다 알고 뭔가 찜찜하게 하면 점점 뒷걸음치죠 심하게 말하면 단기적으론 목숨 아깝지 않게 행동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변심이 생깁니다. 이 장기간을 지속적인 마음을 견지하는 것이 진짜가 되지만요

그래서 목숨 바쳐서 죽은 사람들이 뭔가 알고 그러는 경우는 별로 없고 있어도 그 한계가 있고 또 다른 위상에서 보면 좀 안타깝기만 한 것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인을 행하거나 지사는 결국 그들의 뜻을 위해 목숨바치게 되고 그럴 각오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일상에서 평범하게 보이고 별로 그런 각오들이 안보이는 나태한 모습일 지라도 이건 그럴 상황이어야 나타나는 것이라서 그걸 보기는 쉬운건 아닙니다.

엄한 짓이나 괜한 고집으로 목숨을 버리는 얼토당토 않는 것은 치지 않고 그리고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기준에서 목숨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인을 해롭게 하거나 인에 걸맞지 않거나 이런 것이지만 문제는 그 인에 대한 정의가 다르니 그렇습니다. 저기 논어에도 누가 인을 알던가요?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그 제자들보다 나은가요? 분수를 알아야 말과 행동의 범위가 정해지고 그 한계 넘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이런 것을 알아야 하지요

즉 인이 뭔지 아냐? 뜻이 뭔지 아냐? 뜻이 있나? 그런 것을 우선 건너야 합니다.

다들 뜻이 있다고 하지만 뜻을 가지는 것이 뭔지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남 따라 하는 것이거나 얻어들은 것으로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역시 이것도 장기간을 보면서 두고봐야 합니다. 기분상하거나 다른 이해득실이 생길 때 어떻게 나오는지요 자로도 대드는데 난 안그럴 것이다. 이러면 역시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내가 뜻이 있어야 한다하니 자기도 뜻이 있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 뜻이 있는지는 행을 보고서 알게 됩니다. 아무리 봐도 없는데 스스로는 있다 합니다. 이런 저런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죠 그건 머리가 자기를 속이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게 좋다하니 나도 하나 가지는 그런 정도 입니다. 그 행에서 보이는 것인데 행이 뭔지 모르면 곤란하죠 이 첫 글처럼 행이 보이던가요? 행을 자기 활동에서 구분했나요? 이걸 안한 사람은 뜻을 말할 자격이 일차적으로 없죠 그다음은 당연히 나가지 못하고요>

 

자공이 인을 실천하는 것을 물었다.

자왈 "기술자는 일을 잘하기 위해 우선 그 공구를 예리하게 한다.

나라에 살면서는 그 대부 중에 현명한 사람과 함께 일하려고 하는 것이고 선비중에 어진 사람과 사귀는 것이다."

 

<결국 이런 말이 나오게 됩니다. 앞에서 고리타분하게 이거면 된다고 그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론이 나오게 됩니다. 이걸 하기 위해선 어떤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그 요령을 말합니다.

막말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일하는 게 아니라 공구가 일 한다고도 합니다. 목수가 망치가 없으면 목수가 아무리 대단해도 할 일이 없습니다. 도구 없는 기술자는 쓸모 없습니다.

인을 한다는 사람이 그에따른 수단이 없다면 말만 하는 자가 되기 쉽습니다.

말을 할 때는 그 경로가 대강 보여야 합니다. 어떻게 하고 누굴 만나고 어떤 방법을 쓰고 그런 현실적인 그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론과 현실에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습니다.

누구나 뜻은 있고 목적도 있고 거창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 따른 수단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그저 공리공론이기 쉽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 결과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과정이 맞는데 결과가 안나온다면 그건 일시적이고 결국 결론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과정이 결론을 만든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과정이 좋다는 것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되고 과정에서 지식도 얻은 것이 있고 다시 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미 대세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결론만 내는 것은 그냥 결론만 하게 된 것이고 과정이 있다면 그 과정은 반복되게 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결론을 제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인사 대천명의 다른 의미입니다. 사람이 할 것은 사람이 다 한다는 것이 과정을 한다는 것이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은 결과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이미 결과를 그렇게 일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강을 파서 길을 내면 물은 그리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길을 내면 그길 따라 가는 것이니까요 그 길을 내는 것이 과정이고 그로인해 결과는 아직 없어도 결국 그런 결과로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허락 따위는 없습니다. 그저 인간이 얼마나 깊이 알고 결과를 제어할 수 있는가만 있습니다.>

 

안연이 나라 다스리는 것을 물었다.

자왈 " 하나라의 역법을 쓰고 상나라의 수레를 타며 주나라의 관을 쓰고 음악은 소무로 한다.

정나라 노래는 내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정나라 노래는 음탕하고 간사한 사람은 위태롭게 해서이다."

 

<이게 안연과의 대화라고 하는데 그다지 별로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이렇게 저렇게 위에서 맘대로 정하려고 하는 못된 심리를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 나라 시민들이 스스로 찾아가고 스스로의 발산하는 감정에서 나오는 그 정상적인 발로를 이해하려고는 추호도 없습니다. 이런 건 강요이고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기 나라의 시민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폭력을 쓰게 되죠 죽이는 건 당연하고요

인을 행한다고 하는데 이걸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말을 하니 인과 다른 말입니다.

인은 긍정적으로 보고 능동적으로 일을 해결해야 하며 우선 포용하고 서서히 바른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한 은근한 도움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살게 해야 하는 것이라서 입니다. 산다는게 생명만이 아니라 마음도 살고 기분도 살고 생각도 살고 그런 능동적인 감정들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강요하는 듯한 거만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음탕한게 뭐가 어째서요 세상에 이성을 만나거나 연애하고 살기도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욕구를 무조건 제어해서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만 즐기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다른 일도 하고 다른 의미도 추구하면서 즐기면 좋은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한류가 일어나고 그러면서 잘되기도 안되기도 하면서 수 십년을 흘러 왔는데 사람들은 조금 위기가 보이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하면서 훈수두듯이 뭔가 의도적으로 제어하려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 문화입니다.

문화는 자연스러운 발산이고 욕구이며 성향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것을 제어해서 원하는 것을 취하겠다고 하면 이상한 짓이 됩니다. 우리가 언제부터인지 이런 것이 있어서 뭐든 계획해서 억지로 만들거나 통제하려고 하는 걸 하지만 그런 것도 이제 그만두어야 할 때가 지났습니다. 지금은 제어해서 할 것과 제어하는 것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현명함이 있어야 할 때이기도 합니다. 점점 세상은 복잡하고 그복잡함에  한가지로 제어하거나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정밀하게 각각의 사안에 각각의 해결법이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그 현실의 사정을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과거엔 하나의 도량형이면 되었지만 지금은 그 전문적인 도량형이 따로 있어야 합니다. 분야마다 다른 자로 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문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고 그 상위의 지도자는 이치이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전문적인 정밀한 지식을 알지는 못해도 개념은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자왈 "사람은 멀리 고려하는 것이 없고 반드시 가까운 근심만 있다."

 

<번역을 멀리 고려는 없고 가까운 것만 근심한다고 했습니다. 군자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해서 좀 비꼬는 투로 말했하고 번역한 것입니다. 군자라면 멀리 고려하고 가까운 것도 근심한다고 하겠죠.

발등의 불만 본다는 것입니다. 발등의 불을 끄다가 멀리서 오는 차에 치여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중요해 보여도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당장의 것과 시간이 흐른 후에서야 드러나서 인생의 관건이 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둘 다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경이라고 하고 안배라고 했습니다. 가까운 계획과 먼 계획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

 

자왈 "끝났구나! 난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듯이 하는 자를 본적이 없다."

 

<좀 상스럽게 말하면 남자들이 말하는 주제가 대개가 성적인 것입니다. 일상에서 말하는 대화의 주제가 주로 무엇을 가지고 하고 무엇을 가지고 대화할 때 제일 흥이나게 되나요?

그건 이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성에 대한 것만 나오면 집중이 됩니다. 

내가 20대 쯤에 여기저기 비정규칙 일하러 다니다보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성정인 농담과 대화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것이 대개 일상입니다. 그 대화가 얼마나 쌍스럽고 덜하고이지 결국 대화주제는 이성입니다.

이성이거나 연애 이야기거나 결국 색일 뿐입니다. 이걸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 그 정도의 구분입니다. 이성 좋잖아요 근데 어느 이상이면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정도가 관건입니다. 얼마나 집요한가 얼마나 오래하는가 얼마나 헤어나지 못하나 얼마나 빠져드는가 얼마나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심한가 이게 심한가 저게 심한가죠

젊어선 젊어서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이러면 그 정신의 수준이 의심스럽게 되죠 

어리숙한 것들이 정신연령 낮은 것을 농담삼아 말하거나 자랑하듯 정신 연령이 초등학교 수준이다. 난 정신연령이 낮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데 자학에 가깝습니다. 자기가 못났다고 하는 것도 어느 이상이 되면 학대입니다. 자학은 분명 병입니다.

이런거 이전에 무엇이든 객관적인 말을 하려고 하는 의식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거만한 것보단 낮지만 그것도 과하면 거만한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가르쳐보니 거만하거나 자기 비하나 공부하기 어려운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튼 그만큼 색에 대한 것을 당연한 감정의 발로라서 쉽게 떠들고 언제나 하고 싶은 것인데 그럴만큼 덕을 말하기를 좋아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말만하면 의미있는 것을, 좀 더 공부에 도움되는 것을, 더 깊은 대화를, 좀 더 건설적인 대화를 하려고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이들면 색에 대한 건 줄어드는데 정치나 타인이나 다른 것을 비판하고 비꼬고 성내는 말만 하게 되더군요

정치나 남을 말하거나 이런것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게 또 정상이기도 하니까요 또 그런 것이 중요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어느 정도냐가 있습니다. 나이들어가면서 자기의 소외나 피해의식이나 불만족을 정치를 욕하며서 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말을, 어떤 대화를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그 대화가 또 말이 자기의 감정 하소연이고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것이고 잘난척이면 곤란합니다. 나이들수록 더 그러합니다. 이건 더욱 수양이 되어가야하고 더 현명해져야 하는데 그 반대로 가면 문제가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아량이 생기고 여유가 생기고 타인이나 사회를 더 깊이 보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인생이 허무하거나 불안함으로 결론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의 말에 인생의 결과가 드러나게 되는 시기입니다.>

 

자왈 "장문중은 그 지위를 도적질 한 것이다. 유하혜의 현명함을 알고서도 발탁하여 같은 지위에 있게 하지 않았다."

 

<서로 정치 견해가 다를 수도 있고 서로 뜻한 것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인해 사람에 대한 평가가 자기 맘대로여선 안될 겁니다. 객관적으로 봐야 할 땐 객관적으로 봐야하고 그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다른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하겠죠. 내가 감정상한 사람이라고 무조건 싫어할 놈이되면 안되고 내가 싫어하지만 능력 있어서 같이 일하고 나와 다른 종교나 당이나 길이지만 그사람이어야 나라가 세워지면 같이 일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또는 싫어하는 것으로 사람을 봐서는 안되죠

언제나 평등하게 마음을 두고 기준이 생길 때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사람을 보고 같이 일하고 말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럴려면 뜻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당시엔 불교가 없으니 먼저 공이나 무아를 전제해서 평등하게 사라을 보고 사안마다 그에따른 기준으로 사람을 분별하는 것을 한다고 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해도 되겠죠)

 

그 뜻을 행해 나가는데 사람이 어떻고 하는 것입니다. 감정이나 다른 것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뜻에 따라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뜻을 가졌다는 것이 결국 사람을 보든 사물을 보든 사건을 보든 어떤 것을 보든 그 기준이 명확하다는 것이고 그 뜻에 따라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각오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존심 상하거나 억울하거나 모함받거나 경제적 손실이 있거나 고통스럽거나 힘들거나 번뇌가 있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어떤 것이든 목숨을 잃어도 견지하는 그 기준을 가진 것이 됩니다.

그래야 사람을 사람으로서 보고 사건을 사건으로서 보고 일처리하고 일이 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자왈 "스스로 자신은 엄정히 책망하고 남은 적게 책망한다면 원망이 덜할 것이다."

 

<책망이라는 것이 책임 추궁이기도 하고 비판이기도 하고 넓게 쓴다면 다양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은 잘한다고 생각하고 남은 잘못한다고 하는 것이라서 난 별로 죄가 없고 남은 크다고 하는 것이고 난 그다지 책임이 없고 남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비난하면 이미 비난하는 잘못을 하면서 하는 것이라서 이러한 기본적인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오류를 알아야 합니다. 이정도를 모르고 한다면 그냥 남이 싫은 것이고 감정적으로 욕을 하는 것이지 전혀 지성적인 행위는 아닙니다. (단 말로는 안다고 하는 자는 제외입니다. 이런 자는 더 가증스러운 자입니다. 말을 잘하는 자로서 지극히 꺼리는 자이죠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행동으로 하지 않으면서 알기만 하는 것은 쓰잘데기 없습니다.)

즉 기본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인가 대화가 아니라 욕하고 싶은 것인가를 정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자신은 더 심하게 비판하고 남은 덜 한다는 것으로 하나 더 나아가는 것은 지금으로선 어려움이 많습니다.

아직 욕의 단계에서 머무는 것이 더 많고 객관적으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을 하기도 벅찹니다.

나를 더 심하게 비판을 바라지도 않고 그저 객관적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내가 더 심하게 당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손해보고 억울해 하는 것이 일반이라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만 더 심하게 책망해도 억울함이 늘어나는 것이지 내가 나를 그렇게 심하게 대해서 좋다 못합니다. 내 마음도 상처받으니까요 그래서 객관적인 잦대를 가지려고 애써야 합니다. 나도 남도 객관적인 판단으로 보려는 것을 항상 훈련해야 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재밌는건 내가 더 심하게 책망을 받는다면 상대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그것도 부족하다고 할지 모릅니다. 이런 정도의 의식수준에 머문 것이 지금의 현실이기도 해서 이 글처럼 하기엔 더 강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런 세계관으로 살려면 그만한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객관적으로"라는 것도 다들 쓰는 것이라서 도대체 누가 또는 무엇이 객관인가하는 의문도 있습니다.

항상 난 당한 것이고 남은 이득본 거로 받아들이는 것이라서 어떠한 기준이나 객관도 믿지 않는 시대가 되기도 해서입니다.어디선 삼권분립을 이해못해서 법이 판단한 것을 행정부에 따지는 짓도 하는데 사회의 기준이 사라져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뢰를 가장 중시한 덕목이기도 합니다. 서로 신뢰하지 않는 사회는 서로를 증오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기만 하는 강요를 서슴치 않는 사회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장에서 공자가 신을 그렇게 강조한 것이기도 하고요>

 

자왈 "이렇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하는 것인가라고 구체적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나도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막연히 뭘 해야 하나가 아니라 어떻게 하고 어찌 하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하면서 세세하게 하는 방법을 구상하는 것이어야 거기에 뭔가 더 해줄 수 있는 것이 있게 됩니다.

그냥 막연히 다 해주길 바라거나 어떻게 해주겠지 하면서 수동적으로만 있다면 어찌 해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쉽고 남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쉽습니다.

이렇게 하면 된다더라 하면서 어떻게 해주는 것을 바랍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하는지 자신이 찾으려고 하고 자신이 구상하고 계획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안그러면 뭘 해줄 수가 없죠 스스로 가는 것인데 스스로 갈 방법을 스스로 찾는 것은 당연한데도 사람들은 뭔가에 복종하기를 바랍니다. 뭔가 외부에서 해주길 바랍니다.

어찌 해야 하는지 자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나도 모릅니다.>

 

자왈 "하루종일 모여서 떠드는 말이 의에 미치지도 않고 잔대가리나 굴리면서 있다면 쓸데없는 인간들이다."

 

<누구나 모이게 됩니다. 친구 만나고 동료 만나고 이런 모임에 저런 모임에 조직이 있고 공동체 생활을 하니 누구를 만나든 만남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대화가 의에 미치지 않는다면 그런 모임은 욕구 분출이겠죠 그저 감정 남발하는 것이기 쉽습니다. 그런 것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험한 세상을 제정신으로 살아가죠 그럴만큼 우리가 사는 방식이 참으로 험난합니다. 

그리고 의를 논하는 만남도 해야 합니다. 뭔가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를 하는 사람들도 만나야 하고 이것을 위한 자기 정신건강이나 응어리를 가지지 않기 위한 다른 이탈입니다.

즉 의를 위한 이탈적인 것이지 이탈을 위한 의가 아닙니다. 본말을 전도하면 곤란합니다.

사람이 많으면 다르다고 하는 것에서 간단히 누구나 의이어야 한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모든 사람이 꼭 이렇게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그 종목이 무엇이든 이건 일어날 수 없는 강요이고 폭력입니다. 이것이어야 한다. 이걸 해야 한다. 이걸 하면 안된다 이런 것은 되지 않는다는 거죠 이유는 사람이 맣으면 별별 사람이 다 있고 그 들마다 사정이 있고 사연이 있으며 다른 욕구이고 다른 삶이며 다른 존재로서의 존중입니다.

사람이 다르면 전혀 다르고 너무도 다르고 완벽히 다릅니다. 그래서 내가 옳다고 보는 것을 남은 그르다고 할 것도 되고 내가 맞다고 해도 남을 그르다고 합니다. 난 할 수 있어도 남은 못하고 남이 하는 것을 난 못합니다. 이런 것을 염두하지 않으면 이념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무언가를 남에게 요구하지만 그건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상대가 그걸 힘들어한다는 것을 보지 않는다면 내 눈이 병든 것이죠 그래서 이거 아니면 저거이거나 모두 아니면 아무도 안되는 그런식의 극단이 아니라 그 중간의 여러 정도의 차이들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부적인 항목들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사정들을 전제하면서 사람을 세상을 봐야 합니다. 이거 아니면 저거, 저거 아니면 이거라는 식의 극단적인 것은 결국 다툼이 되고 갈등이 되어갈 수 있습니다. 재량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유격을 가지고 적절히 하는 그런 판단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왈 "군자는 의를 기반으로 해서 예로 행하고 공손하게 만나고 신으로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군자이다."

 

<의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결국 지향성이 의라는 것입니다. 의란 세상이 가야할 길을 모색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즉 세계관이 형성된 것이지요 사실 사람들은 그다지 명확한 세계관이 없고 자기가 행하면서 어디에 기준으로 한 것인지 모르고 삽니다. 있어도 있는지 모르니 있는게 아닌 것이라서 없습니다.

자기의 세계관을 확인하고 그것을 확충하며 다시 그것으로 외부일을 해가는 것이 의입니다.

그렇게 뭔가 도모해 갈때는 예로서 하게 됩니다. 규칙성이 있고 방법이 있는 것이라서 즉흥적인 것이 아닌 어떤 보편적인 기준에서의 활동이라서 그 보편성의 내용은 의가 되지만 그 보편성으로 성취해 가는 게 예가 됩니다. 즉 보편성을 만든 건 예가 된 거라서 예가 아니면 의가 없게 됩니다. 예가 의를 형성시키는 것이니까요 예가 여러 학문과 행동과 경험에서 간략화나 추상이나 나름의 성취와 경지이룸이 되어 세계관이 되고 그런 사람으로서의 삶이 이루어지면 예가 된 것이고 그런 성취된 세계관으로 이후에 살게 되면 의를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순서상 어릴 때나 처음엔 인입니다. 살아가는 것이고 욕구발산이고 그 활발한 활동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고 살기위한 다양한 감정들입니다. 이런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서 인에서는 강요나 제어나 그런 것이 없고 오직 칭찬과 능동성과 긍정적인 사고를 하면서 원하는 것을 쟁취해가는 너그러운 심성입니다.

이런 다양한 활동 감정 지식 대상에서 하나하나 정리해가고 중요한 것이나 원리적인 것이나 맥락을 찾은 것이나 불필요한 것들이 보이거나 이러면서 체계가 이루어져 가면 예입니다.

무조껀 뛰고 열심히만 뛰고 그러다가 기술이 깊어지고 요령이 생기고 에너지 효율이 좋아지면서 생기는 능숙함이 예가 되겠습니다.

의는 그런 예로서 살아가게 되면서 생기는 사회나 남이나 세상과의 관계 저항 갈등 투쟁들에서 지키고 견디며 힘든 것을 겪으면서 더 완숙해지고 노련해지는 것이 됩니다.

이러면서 또다른 수준의 경지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지입니다. 이 경지는 아까 말한 "순은 남면한다"와과 같은 것입니다.

인을 거쳐 예가 되고 의를 지나면서 형성된 그곳입니다. 그래서 저 말을 해석하려면 저걸 다 말해야하는데 심히 복잡하죠 근데 그것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가 다시 현실에 나타나고 또다른 주기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되어서 세상이 끝나지 않습니다. 또다시 봄은 오는 것이니 그 지가 다시 땅에 내려와 인으로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이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고 활성화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워서 고집부림이 되는 것이 아래에 나옵니다. 자기가 믿는 의이든 지이든 선이든 그것이 현실에서 드러날 때 인으로서 한다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시대는 변하고 변화가 신이니까요 그러면 그렇게 알던 지나 신념이나 사상이나 그것은 인으로서 현실적인 먹고 사는 것과 당연한 힘겨움 아픔을 보면서 비근하고 유치하게 아래에서 다시 시작되어가는 변화를 보아야 합니다. 자기가 알거나 원하는 것으로 하지 않는 세상이나 사회나 현장을 힘들어하면 스스로가 인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은 그렇게 되어가게 됩니다. 인과 예사이에 전환이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다면 이 말은 전부 구라가 됩니다. 하지만 됩니다. 왜냐하면 신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유가 아닙니다. 당연한 과정입니다.

그런 신이 가능한 것은 다른 인의예지가 있어서 입니다. 인은 신이 있어서 인을 하지만 신도 인이 있어서 신이 됩니다. 다른 것도 같습니다.

 

어떤것이 의냐 하면 보편성이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가 됩니다.

대인관계는 공손함으로 하고 결국 신뢰가 아니라면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공손함이 아니면 대인관계는 자기 잘난 척이거나 지나친 자기비하이기 쉽습니다. 공손이 자기를 낮추기만 하는 것으로 알기도 하는데 자기를 낮추어 의를 행해야하니 그건 방법상으로 그런 것이지 낮추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성사시켜야 하는데 무조건 그래서는 안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어렵고 오해도 쉽고 그러니 적절한 자기 다름을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신뢰가 아니면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안되고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느면 흐름이 없으니 멈춘 것이고 끝이 난 것이겠죠 지나가고 되어가고 흘러가고 결국은 변화해 간다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자왈 "군자는 능력 없음을 걱정하지 남이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물론 남이 알아주는 것을 걱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본이 되지 않고 말일 뿐이게 됩니다. 저러한 사소한 감정 복잡한 여러 감정들이 없지는 않는데 그러한 것이 주이냐 부이냐 본이냐 말이냐의 구분이 있는 것입니다.

 

능력없음을 걱정하는 것은 해야 할 것이 있어서 입니다. 그것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해야 하는 것에 부족할까봐 그것에 내가 해내지 못할 까봐 언제나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자신 있다고 한다면 이미 거만해진 것이고 하고자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됩니다. 하고자 하는 그것은 언제나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된다 안된다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서 그러한데 왜냐하면 그건 현실이라서 그렇습니다. 그 현실은 정해진 것도 정해야 하는 것도 아닌 것으로 노력하고 애쓰지 않는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그 불확실함을 안고 가는 것이라서 언제나 능력 없음이 두렵게 됩니다. 이것이 없다면 군자가 이미 아닌 상태입니다.

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정해야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하면서 뭔가 의도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꼭 정해야 한다가 아니라 그것도 해도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죠 그러니 불안함이 있는 것입니다.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고 아무도 안하는 것을 하려는 두려움도 있는 것이고 기댈 곳이 없다는 것도 되어 스스로의 판단과 길이라는 것이고 무엇이든 불안함과 불완전함이 있어서 불안합니다.>

 

자왈 " 군자는 죽을때까지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즉을 때까지이든 죽어서든 이름나지 않는 것을 두렵게 여깁니다. 이건 이름이 나고 싶다는 것이 아니죠

그런 일을 하지 못할 까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분명 뭔가 의를 행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아낳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아까 말한데로 된다 안된다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함을 안고 사는 것이라 될 수도 안될 수도 있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돤다고 말한다면 이미 아니라는 그것을 명심해야 하죠

그래서 이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잘 안될까 실패하지 않을까 내가 하려는 것이 잘못 된 것은 아닐까가 언제나 걱정입니다.

그걸 이름이 불려지는 것이 유명해지는 것인데 뭔가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사회에서이고 그로인해 명예가 드날리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는 수양이나 자기 공부나 성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일은 사회에서이고 사회적인 거으로 입니다.

그래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름이 드날리는 것이 아니라서 이것도 본말을 전도하면 안됩니다.>

 

자왈 "군자는 자기에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뭘 구하는 것인가요?

내가 할 것을 남에게 의지 한다는 것을까요 남이 해결법을 안다는 것일까요

자신을 돌아보고 잘잘못을 따진다는 것일까요 남이 잘못했다고 남에게서 잘못을 찾는 것일까요

남이 해줄거라고 하는 걸까요 자기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요

 

남도 그러는데 난 왜 안되?

남은 뭐라 안하면서 왜 난테만 그래?

난 왜 도움이 없어? 왜 항상 운이 않좋아?

이런 사고가 진행된다면 이 글에 걸리는 것이겠죠>

 

자왈 "군자는 자긍심이 있는데 그것으로 다투지는 않는다. 공동체에 속해 있어도 다른 공동체와 다투지 않는다."

 

<자꾸 경구 날리면서 훈계하는데 상당히 꼰데같은 짜증이 있긴 합니다.

이렇게 편집해서 쉽게 익혀 이런 것을 흉내내며 남에게 잘난 척하면서 이런 경구를 외워 말하면 진짜 재수없습니다.

그건 이미 자신으로부터이지 남에게 나아가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는 이러한 일관된 맥락을 모르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런 남만을 보는 저질적인 수준이 일을 만듭니다.

자긍심은 그냥 나오지 않고 이것도 성취한 공부가 있는 다음에 나오는 것입니다. 공부는 수양이죠

그런 것도 아닌 사람이 자긍심이 있다고 한다면 역시나 자신으로부터 구하는 것이 아닌 자입니다.

자긍심이 있어야 남과 다투지 않을 수 있고 모르거나 못하는 것에 솔직합니다.

다툼은 자신이 아는 것에서 더욱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나도 아는데 나도 할 수 있는데 내가 더 잘 아는데 니가 나보다 나을 것도 없는데 니가 뭔데 이런 감정이 든다면 이미 자긍심이 아닌 것입니다.

대개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을 말하고 그 말하는 것에 다른 의견을 말하면 화냅니다. 

이런 것이 겨우 그정도인 것이라서 군자와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뭔가 공부해서 나름의 경지를 얻음이 있어서 그로인한 마음의 충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경지란 남이 내가 아는 것에 안다고 자랑해도 인정할 수 있고 다른 의견을 내어도 배울 수 있을 마음을 가지는 경지입니다.

내가 뭔가 안다고 내 것을 자랑하는 것으론 자긍심이 아닙니다. 그건 배타성이 되고 자기 고집이 되는 것이지 그런 것으로 안다하지 못하고 자긍심이라 하지 못합니다.

이것도 못하면서 당이나 조직에 속하면 더욱 가관이 됩니다.

당이 또는 조직이 시키면 물불안가리고 대들고 나서고 지랄 발광 하는 자들을 너무 자주 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직 미숙함이라는 것을 언젠간 알게 되겠죠>

 

자왈 "군자는 말하는 것을 보고 사람을 등용하지 않고 사람이 별로라고 해서 그사람의 말을 무조건 버리지도 않는다"

 

<말하는 것을 보고라는 것은

말을 잘하면 사람들은 현혹합니다. 지식인이나 종교인이나 정치인이나 뭔가 말로 잘 설명하고 잘 보이게 하고 그럴 듯하게 말하면서 정말 그럴 거 같게 합니다.

이런 것에 사람들이 혹하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강의나 미디어에 나와서 말할 수 있고 잘 아는 듯이 잘 하는 듯이 무엇이 맞다는 것인지 무엇이어야 하는 듯이 말을 잘하는 것은 어디서나 보입니다.

하지만 그건 말이고 그 말이 행위와 실천으로 가는지를 또 보아야 합니다. 말이 실천으로 가는데는 시간의 지연이 있는데 이런 것을 기다리면서 성급하지 않게 봐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은 별로이고 이상한 놈이라도 그 말이 그럴 듯하면 그말은 인정해 줍니다.

말만은 맞는 것이죠

이건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싫으면 무조건 싫어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을 싫어하거나 사람을 뭐라해서는 안되고 그 말이 실천 안하면 그 실천 안하는 부분을 탓하는 것이고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그 잘못한 것만을 탓하며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고기에 파리가 앉았다고 고기 전체를 버릴 순 없습니다. 파리 앉은 것만 씻거나 도려내거나 하면 됩니다. 사람도 하나로 그사람을 전체를 판단하지 말고 다양한 모습이 있으니 그 다양한 것에 구분지어 판단해가야 합니다. 이건 좋은데 저건 도적놈이고 이건 잘하는데 저건 죽일놈이고 이런 식으로 해가야 합니다.

무언가나 누군가를 마음을 닫아버리면 내가 마음 닫은 사람이 되는 거라서 마음을 닫는 것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건 모르겠고 누구에게 마음 닫은 놈이 됩니다. 언제나 마음은 열려있어야 합니다. 현실은 변화하고 있고 달라지고 있으며 다른 곳으로 진행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마음 닫은게 작은 잘못이 아니라 이거만큼 큰게 없음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기도 합니다. 마음 닫음의 잔인함.

닫으면 이미 변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자공이 물었다. "한마디 말로서 종신토록 행할만한 것이 있나요?"

자왈 '그건 서이다. 내가 하고싶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분명 들어본 말입니다. 흔히 하는 것이고 논어를 인용해 너도 나도 하는 말이기도 하고 "서"가 용서한다는 것이니 용서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남도 원하는 것이 있고 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전에 남도 있다는 것부터가 먼저 입니다. 남은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남이 있는지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남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나와 다른 의견 나와 다른 생각 다른 감정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의견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고 요구할 때는 남에게 다가가야 하고 남에게 설명해야 하고 접촉해야 하며 남과 교류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이 있음으로 인해서 내가 다가가는 것에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모르면 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몰랐던 것이 됩니다. 

이걸 누가 모르나 하지만 누구나 자기 의견을 강요하고 자기와 다른 것에 수긍하는 것을 보기가 왜 어려운건가요

지식인들이나 사회 지도자들이 모이는 곳에선 더욱 자기 의견이나 말하지 남의 의견에 비판을 넘어 원색적인 욕을 하는 것이 이런 기초적인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남을 비난하거나 욕한다면 이미 남을 본적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됩니다. 남이 있으니 욕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있으니 내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남도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는데 그런 것을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것이고 이러면 내 마음이나 생각을 보는 것이지 남의 생각이나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서 남을 안보거나 못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남, 타인의 발견은 우선 이래서 기초적인 것이지만 이걸 못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타인이라는 그 말자체에 이런 것이 섞인 것이고 용서라는 것이 이래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식의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남과 교류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게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자공이 앞장에서 이런 비슷한 말을 합니다. 그때 공자는 니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핀잔을 주는데 그건 그만큼 어려운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그저 용서한다는 말로 할 그런 것이 아니니까요 용서라는 것은 남의 생각과 마음을 본다는 것입니다.>

 

자왈 "내가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누구를 비방하고 누구를 칭찬하겠는가 칭찬한 게 있으면 그것도 이유가 있어서이지 그래도 이나라 시민들은 하상주의 3대의 도가 내려와 그렇게 행하는 곳이다."

 

<사람들을 비판하고 칭찬하는 것이 그런 것이 재밌어서도 아니고 그게 꼭 그렇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타격을 가하고 감정풀이의 대상으로 하고 다른 사심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해서 칭찬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대개의 사람은 이런 의도로 할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않아야 하는데 누가 욕을 듣고 싶고 누가 비방을 원하겠어요 

그래서 앞장들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시덥지 않게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 공자도 자기가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 오해하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합니다.

칭찬하는 것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뭔가 의도하는 것이 있어서 칭찬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봅니다.

그래야 하죠 뭔가 다른 것을 보면서 말하지 않는다면 아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건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기 감정이나 말하는 것인지 뭔가 멀리 내다보는 것이 있는 것인지는 보면 아는데 자신도 이걸 다 할 수 있으니 남이 하는 것도 보이는 것이니까요 누구나 자기 한계에서 보게 되어 있습니다.>

 

자왈 "사관의 기록엔 의심스러운 건 비워두고 억측해서 쓰지 않은 것이 있고, 그리고 말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타게 했다고 나오는데 지금은 그런 기록이 없다."

 

<역사 기록이 의심스러워 명확하지 않는 사건은 함부로 쓰지 않고 비워두었다고 합니다.

자기와 다른 당이나 다른 의견을 가진 놈이라면 고깝게 쓰거나 기록하고 사실과 왜곡해서도 기록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거나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 사관의 인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자기와 다른 사람은 매국노로 만들고 빨갱이로 만들면서 기록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을 보면 사람의 뜻의 수준을 알게 합니다.

이건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확실하지 않는 것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판단하려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하는 것을 습관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내 멋대로 보고 선입견으로 사건들을 판단하게 됩니다. 이러면 이미 퇴보하고 있는 것이라서 조심해야하는 것입니다. 나이들수록 쉽고 간단하고 하던대로 이미 경험한 것에서 정해진 많은 개념들이 있어서 새롭게 보고 판단하기보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덮어서 판단하는 것을 하게 됩니다.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가다보니 어릴때의 발랄함이 줄어들어 하던대로 하려는 것이 자꾸 보여서 이런 것을 반복해서 말하며 쓰는데 경계삼을 것이 자꾸 늘어납니다. "예전엔 안그랬는데 왜 이렇게 고리타분해지지" 하는 것들이 자주 보입니다. 미치것슴돠

 

안봐도 뻔하고, 분명 그럴 것이고, 그래왔고, 내가 아는데, 이러면서 나이에서 오는 오랜 습관으로 이미 판단하고 있다면 그건 도가 아닙니다. 도는 새로움이 없으면 끝인 것이고 현실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어감을 알지 못한다면 죽은 자가 될 뿐입니다. 도덕경에 죽은자는 뻣뻣한 것이라고 나오던가 음 안본지가 너무 오래되놔서리 암튼 지금을 안보고 과거를 보는 건 유령이나 하는 짓이니까요>

 

자왈 "말을 잘하면 덕을 어지럽히고 작은 것을 못참으면 큰일을 어지럽힌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아까도 말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정말 말이 그럴 듯하고 교묘하고 재미있고 사실적으로 말해서 실천도 잘 할 거 같이 들립니다.

분명 재주이고 남다른 설득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하고 그말대로 될 거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말대로 되는 것은 거의 어렵습니다. 말이 쉬울 수록 더 숨기는 것이 있기도 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 있게도 됩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실천으로 가는 그 기간을 두고 보면서 판단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을 안주거나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이용하거나 그런 영리함도 있습니다. 그래서 덕이 어지럽혀지게 됩니다. 

그말을 실현하는지 그것을 보기도 전에 이미 그 사람을 신뢰하지만 실천은 없기 때문입니다. 실천이 되어 그로인한 성과가 드러나야 덕이 되는데 말로는 정말 그럴 듯한데 결국 말로만 입니다.

그래서 말을 잘하면 그말을 실천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말만가지고 사람을 판단해선 결코 안되는 것이죠

요즘은 말을 하는 것만을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과학적인 지식과 학문적인 것으로 무장하고 수사법까지 익혀서 정말 그럴 듯하고 거기에 신뢰주는 듯한 얼굴에 꾸미고 포장하는 기술이 너무도 좋으니 혹할 수밖에 없는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성급한 판단을 하지 말고 그 실현으로 가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실수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분명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달 두달 이년 이년 십년 이십년 그 시간은 깁니다. 그 말대로 하는지 되는지 보는 것은 자기의 일입니다. 너무 단기간의 효과나 결과로서 판단하면 덕이 작은 것이지 덕은 크고 긴 곳에서 더욱 깊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에 큰 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이득이나 조짐이나 감정적 흥분이나 어설픈 조언이나 이론이나 그런 것을 견뎌내야 합니다. 한편으론 귀가 얇다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듣고 빠른 판단이 주효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큰일을 하기 위한 모색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그러한 사업(세상에 자기 뜻을 성취하기위한 일)을 하려고 하면서 그 기간이 너무 오래걸리고 금방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진행도 지지부진이고 그러다보면 쉽게 가로질러가려고 하거나 어두운 자금을 받게 되거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합니다. 이럴 때 그 작은 것에 넘어가면 결국 큰 것이 물 건너가고 그렇게 진행되었다고 해도 이미 변질된 것에 돌이키지 못하는 곳으로 가고 있어서 처음의 계획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

큰 일에 큰 결단이 있어야 하고 그건 결단코 성취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작은 것에 견딥니다.>

 

자왈 "대중이 그 사람을 증오한다고 해도 반드시 내가 살피고 판단해야 하며,

대중이 좋아한다고 해도 반드시 내가 직접 살피고 판단해야 한다."

 

<대중이 좋다하던 싫다고 하든 거기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대중을 안믿거나 대중이 어리석을 수 있어서가 아니겠죠.

이건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한 판단은 내가 책임지어야 합니다. 그래서 입니다.

대중따라 판단해서 잘못이 생길 경우 대중이나 남이 그렇게 해서 했다고 변명을 할 것인가요?

그게 아니란 말이죠 내가 한 것이니 내가 책임져야 하고 벌이든 상이든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중이든 남이든 그들의 판단을 의심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행동엔 내가 판단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그런 맥락을 가지기 위해서 남과 상관없는 내 판단력을 기르고 스스로 결론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판단력을 길러야 하고 지식을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한 순간도 정신을 놓으면 아무도 그 실수하는 판단에 이해해주지 않습니다. 그런걸 바라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나약해서도 안됩니다.

결론내고 행동하며 그것이 실수든 아니든 책임은 같습니다. 그럴 정신으로 하루 하루 한순간 한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찰나에 칼날같은 긴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너무도 복잡합니다. 전문가적인 분야가 너무도 많아서 내가 모든 지식과 분야에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전문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선 큰 태두리는 내가 판단하고 책임지고 그 정밀한 전문적인 곳에선 그들을 믿어야 합니다. 그 전문가를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하는 것이긴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보는 안목이 중요합니다. 이게 안되면 결국 그로인해 무너질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개념은 알 수 있고 사람을 볼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지성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왈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것이든 기본 전제가 자기로부터라는 것입니다. 이 자기에서 비롯함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어떤 행동이든 어긋날 날이 올 것입니다.

도는 사람이 만든 것이지 애초부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듯한 다른 곳이나 다른 것이나 다른 의미들을 말하는 것은 부질 없습니다.

그것이 어느 것이든 결코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자기로부터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을 이해못하면 각성은 없다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이 사람이 만든 것에 허우적대며 힘들어 합니다. 사람이 잘 되고, 잘 살고, 잘 어울리고 하는 목적으로 되어진 것들인데 그런 것을 숭배하고 이념화 하면서 그것에 목을 매달고 살아갑니다. 도가 사람을 만든 것인양 알고 살아가는데 이건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무조건 사람이 도를 만들고 넓힌 것이니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이미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는 사소한 것에서 거창한 모든 것이 다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나 사회구조나 습관적인 것이나 관례나 문화나 경제나 정치나 예의나 윤리나 도덕이나 그대가 옳다고 하는 그무엇이든 이데올로기 입니다. 이 논어나 내가 하는 말이나 이것도 이데올로기 입니다. 지가 떠드는 것이지 진리는 더욱 아닙니다.

그런 기대고 싶은거나 절대적인 뭔가를 원한다면 그런 것은 결단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저 임시적으로 일시적으로 그렇게 알고 살면 되는 것 일지도 모르고 눈가리고 아웅하면서 한 평생을 살 수도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걸 모르면 도를 시궁창에서 닦아야 합니다. 이걸 모르고 떠들면 지랄이고 행동하면 못된자가 될뿐입니다.

이런 사람이 너무도 많은데 이걸 모르고 떠드니 오로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자기 말을 강요하고 이거 아니면 안된다고 땡깡입니다. 나이들던 어리던 지위가 있던 없던 하는 짓이 이따위 입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조차 모르고 지도자급으로 가려고 하거나 갔거나 이러면 그곳은 힘든 곳이 됩니다. 돼지가 이끄는 조직이 잘될리가 있나요 그래도 잘되면 좋지만요 그로인한 대가는 있을 것이지만.>

 

자왈 "잘못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잘못이다."

 

<이미 잘못이 있어서 고치지 않는다고 말하고선 다시 그 고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다시 잘못이라고 하는 되먹힘의 구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이 두 가지인데 앞의 잘못은 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그로인해 그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 고치지 앉는 것이 또다시 잘못이게 됩니다.

이건 자기 성찰을 한다는 것이 됩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성찰이라는 것을 한다는 것이죠

내가 나를 본다는 되먹히는 재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논리적으로 말하지 않던 것이 저 시대인데 자신이 생각하는데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생각하는지를 보지 못하는 것이긴 합니다. 이것이 자기성찰이 좀 덜 된 것이긴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이런 구조를 말하지는 않아도 느끼고 있는 것이긴 합니다. 이런 말의 구조를 굳이 한다는 것이니까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말을 하지는 못하는데 그걸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언어구조가 엄청많습니다.

세상에 말을 언어적으로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할거 없이 어떤 현명한 철학자만큼이나 이미 복잡한 논리의 언어를 다루고 있는 것이 됩니다. 다만 철학자와 다른 것은 그런 자기 언어구조나 사고구조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죠.

위의 말을 논리적으로 따지면 엄청 복잡하고 책한권 이상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어려운 글이기도 합니다.

근데 아무나에게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그게 잘못이다라는 이런 문장에 뭔가 재밌거나 이상하거나 멋있어 보이거나 말이 그럴듯해 보이거나하는 이런 느낌 없는 사람이 어딨고 이걸 못알아 듣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건 다들 알아듣고 있는 것이고 사용도 하고 있고 그러죠 그래서 머리나쁜 인간은 없고 못알아 듣는 인간도 없습니다.

내가 어려운 말이나 이상한 말을 하면서 못알아 듣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자기가 알아 듣는다는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왈 "내가 그전에 종일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사색을 해보았는데 무익하더라 배우는만 못했다."

 

<이게 좀 애매한 말이긴 합니다. 밥 안먹고 잠 안자는 것이 하루 이틀인지 고행으로 수도 하듯이 오래도록 해보는 단련을 해본건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읽는 사람이 자기 경계내에서 알아서 해석할 것이겠죠.

다른 곳에선 사색도 해야한다고 하고선 여기선 다르게 말하니 왜 이랬다 저랬다고 하는가가 있는데 원래 강조점이 달라서 그런 것이고 말은 말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황마다 사람마다 다르게 말하는 듯이 보이고 이걸 강조하려고 저걸 무시하고 저걸 강조하려고 이걸 무시하듯 말합니다.

말에는 의도가 있으니 그때그때 다르게도 보입니다. 그래서 말가지고 너무 허물 삼으면 답답한 것이긴 합니다.

사색도 해야 하고 배우기도 해야 하는 것이라서 사색도 안해보고 배우기만 하면 그것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색하지 않으면 자기것이 되지 않습니다. 일일이 전체를 다 알려주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고 그 중간의 틈이나 과정의 복잡함은 자기가 알아내야 합니다. 이런 글이나 경구들을 들어서 외운다고 아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문장들을 이리 저리 따지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할 방법을 모색하고 과정들에 대한 준비도 해보고 모의 실험같은 것을 머리속에서도 해보고 일차적으로 우선 머리에서 해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잘되고 현실에 가깝게 잘되고 그러면 훨씬 닥친 현실에서 또 행해야 할때가 되면 익숙하듯이 할 수 있기도 합니다.

이론이 현실과 너무 큰 간극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더욱 사색해서 과정상의 방법론을 고심해야 합니다. 너무 현실을 좋게만 보거나 감상적으로만 보거나 지나친 희망으로 보거나 구체적인 사람과 사물이나 진행을 쉽게만 보거나 또는 반대로 어렵게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즉 내가 부산에 간다해도 그 과정은 복잡합니다. 지하철 타고 어디까지 가야하고 거기서 다시 갈아타고 또 기차안에서의 불편과 지루함이나 불의의 일들이 또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보게 되는 사람들과의 대응은 어떻게 해야 하고 신체적인 불편이 있을 수도 있고 이게 뭐가 문제냐하고 쉽게 생각한다면 대개 다른 곳에서 이론을 현실에 적용할때 어려움이 있거나 곤너뛰는 것이 있어서 다른 것이 되기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너무 어렵게 보는 것이라고 비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에서 치밀하지 못하면 큰 것은 더욱 그러한데 너무 치밀할 건 없지만 꼭 필요한 과정은 알아야 합니다. 그 필요한 과정을 정확하게 알면, 아는 것이 실현되게 하는 것이 맥락을 가지게 되죠

실현되게 하기 위한 과정을 집는 것이라서 사색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배움이라는 것도 그냥 남의 것을 보고 배우고 익히는 것만이 아니라 언제나 매순간 배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배울 수 있구나 배워지는구나 하는 것인데,

내가 배운다는 자세를 하는 것이 거만함을 줄이고 공손하게 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을 "배우는 자세로 임하겠다. 배우려고 한다." 하는데 말을 하는 사람이 실천하는 것은 드눕니다. 언제나 말을 잘하는 것은 덕을 어지럽히죠

이걸 말할 게 아니라 그렇게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배우는 자세로 하겠다는 말을 안합니다. 그건 성격이라서 자기 성격을 말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되죠

그러면 남의 책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배울게 너무도 많습니다.

내가 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건 사색의 길을 가보고 나름의 배움을 해보다보면 남의 학문이나 남의 성취에서 내가 경험하지 않고 내것으로 하는 맥락이 있게 됩니다.

그냥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배워지게 만든 길을 알 때 이것이 됩니다.

대강의 이럴 것이다. 이거나 원리상 그럴 수 있다고 하는 원리적인 면을 알고 있어서 그 원인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며 길은 다르지만 그러는 이유나 의도가 보이기 때문이며 기본적인 것은 결국 다 비슷하기 때문인데 그것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울 수 있으면 됩니다.>

 

자왈 "군자는 도를 도모하지 돈버는 것을 도모하지 않는다.

농사를 지어도(돈버는 사업을 해도) 굶주림이 그중에 있기도 하지만, 학문엔 록이 그중에 없는 경우는 없다.

군자는 도를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

 

<돈을 걱정하지 않지는 않아요 걱정해요

근데 본말이 있다가 됩니다. 즉 누군가 나에게 "돈 걱정하느냐"고 하면 "하죠"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더 물어서 "정말 하냐"고 하면 난 "그걸 왜 하냐"고 합니다.

배가 고픈 것은 생리입니다. 돈 걱정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먹을려고 산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농담이 있는 것은 아는데 결코 먹을려고 산다고 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농담처럼 하는 말도 내가 나를 규정해가는 것인데 이렇게 자학적인 말을 할 정도로 나 스스로를 욕할 수 없습니다.

굶어죽든 비참하게 죽든 그런건 관심 밖이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걱정인 것입니다.

누구나 성스럽고 고원하고 존중받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존중은 스스로의 내적인 충실함이 이루어지면서 나타나는 것인데 내적 충실함은 아래에서부터이고 나로부터 입니다.

학문을 해서 록이(록은 나라가 주는 월급 같은 것으로 급제해서 받는 거) 그 중에 있다는 것은 학문이 돈이 된다거나 학문이 결국 성공하게 해줄거라는 것은 아닙니다. 학문 그자체가 록이라는 것입니다. 학문이 이미 내적 충실을 주고 존중이 되며 그것이 자기를 이루어서 성취한 것이 되어집니다.

돈을 버는 것이 먹고 살기위함이고 먹고 살아서 생존이며 그로인해 그만한 충족감을 얻으려는 것이고 성공해서 남다른 성취를 하려고 하는 것인데 학문이 충실하면 그것이 결과가 같다는 것입니다. 학문이나 돈이나 그 지향하는 곳은 자기 충실이라는 곳이 됩니다. 그러니 어떤 것을 해도 되는데 학문은 결국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은 어디로 갈지 모르고 어떻게 자기를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배부르고 사회적인 성공이 자긍심이 다가 아니라 학문을 이루는 것이 자긍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걸 다르게 인식하게 되었을까요?

사회성공과 학문성공 이것은 같은 것입니다.>

 

자왈 "지식이 된다해도 인으로 하지 않으면 지키기 어렵고 그로인해 결실이 있어도 잃어버릴 것이다.

지식이 되고 인으로 지킬 수 있어도 엄정하게 일처리 하지 않으면 시민은 공경하지 않는다.

지식이 되고 인으로 지키고 엄정하게 일처리하더라도 예로서 행동하지 않으면 좋다고 못한다."

 

<지식이 있어도 인하지 않으면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아는 자들이 잔인할 수 있습니다.

자기 지식이 맞으니까 시키는 대로 하라거나 지식만 추구하면서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지식일 뿐이고 그건 자기만의 성취욕이고 사람을 대함에서 자기 지식이 중요하지 사람들이 중요하지 않아서 입니다.

그리고 인으로 하는 이유로 지식을 성취하더라도,

엄정하고 합리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존경하지도 따르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정에 이끌리거나 일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혼란하거나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거나 돈이나 다른 것에 따르거나 성격적인 문제가 있거나 이러면 당연히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예로서야 합니다.

이건 전체적인 틀이 확실하고 사람들이 보고서 납득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이 있고 순서가 있고 사유가 있고 일처리가 분명해야 하는데 이러지 못하면 좋지 못하게 됩니다.>

 

자왈 "군자는 작은 일은 하지 못하는데 큰 것은 해낼 수 있고

소인은 큰 것은 해낼 수 없는데 작은 것은 잘한다."

 

<군자와 소인이 할일이 다른 것이기도 합니다.

군자는 큰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이라서 작은 것으로 평가하거나 그것을 알아야 하거나 사소한 것을 안하거나 못한다고 뭐라하면 곤란합니다. 소인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못한다고 군자를 탓하게 되죠.

기준이 다름이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니 그렇습니다.

작은 것은 소인이 하니 그것까지 잘해야 할 것도 없고 그거 이전에 큰거 하다보니 작은 것을 할 수 없어서 입니다. 그렇게 전인적인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게 아니라 이거 저거 다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건 상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거나 자기 열등감의 투사입니다. 

실재론 군자는 자기가 보고, 하는 것 이외의 것은 잘 모릅니다. 또 알 필요가 없습니다.

소인은 자기가 잘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고 그걸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죠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공자가 안목이 다르긴 합니다. 보는 것이나 행한 것이 있던 것이겠죠 어설프고 남이 하는 것을 머리로만 알거나 환상속에서만 사는 자들은 군자나 성인이나 신이나 그런 초월적인 존재들이 완벽하고 전능하다고 말하게 됩니다. 역시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수준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나봅니다.>

 

자왈 "시민에게 인이라는 것은 불이나 물보다 더 중요하다.

물이나 불을 밟아 죽은 사람은 보았어도 인을 밟아서 죽은 사람은 못보았다."

 

<인이 중요한 것이 물이나 불보다도 크다고 강조합니다.

불이나 물은 생활 필수품인데 그런 필수품이 인을 위한 것이라서 인을 위해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기위해 생존하기 위해 사는 것은 다 합니다. 그러나 조금 되면 결국 좀 더 고상한 삶의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가축 처럼 먹을 거 주고 잘 것을 주고 사육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더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존중받고 자유롭고 상달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함께 나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니 생활필수가 아니라 삶의 필수로써 우리가 더욱 인간답게 살기위한 것으로 인을 먼저 들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왈 "인에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할 것 없다."

 

<이건 쉬운건 아닙니다. 인이라고 보는 판단이 다르다는 것도 되기 때문입니다.

인이 명확하게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것이라면 이런 말이 대단해 보입니다. 이 당시에 자유로운 판단을 요구했지 스승이 강요하지 않았다고 지들 역사를 자랑할지도 모르지만 인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서 난 이걸 인이라고 하는데 스승은 아니라고 하면 이 간극을 어찌 줄이나요? 스승에게 양보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기가 옳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어느 것이나 단순하게 판단할 수 없는 사안들이라서 그렇고 저러한 인의예지신같은 경이나 도나 덕이나 뭐든 이런 것들은 정말 누구나 다 같은 판단을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나 현실의 정세판단이나 사건의 원인 판단이나 의미 판단이 어디 그렇게 쉽던가요

그러니 이런 것 이전에 판단력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고 판단이 합리적이고 정당함을 가지게 하는 방법을 익히는게 우선입니다.

선입견에 감정에 뭔가로 인해 실수하고 현혹하고 그런 것도 있고 실수해도 다시 고치고 수정할 수 있는 용기도 있어야 하고 그런 수양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죠

인을 위해 경쟁하는 모습은 그자체로 보기 좋습니다. 이런 좋은 모습이 되려면 그만한 경지이룸이 필수입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대화를 중시하기도 합니다. 대화하기 위해선 남이 있어야 하고 인정해야 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설득하기 위한 증거를 가져야 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는 아량도 있어야 하고 배우는 자세가 그래서 요구되고 참으로 많은 덕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인을 위해 경쟁하는가?

자기 탐욕이나 욕망을 인으로 포장한 것은 아닌가?>

 

자왈 "군자는 곧지만 고집스럽지는 않다."

 

<이런 경구는 언제까지 나오나 ㅠㅠ

곧음과 貞 고집부림 량諒, 이런식으로 비슷한데 다르게 말하는 것이 있다. 가르친다와 가르치려든다라는 식 입니다.

하는 것은 같은데 그 다르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고집과 고집부림이라고 하면서 서로 비슷하지만 이 다른 것을 알고 그에 따라 행동을 나누는 것은 쉬운건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뭔가를 신념이라면서 지키고 뭔가 옳은 것이라면서 기어코 하려고 하고 선이라서 정도라서 예라서 도라서 뭔가 그래야 해서라는 것으로 인해 그거 아니면 안되는 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논어를 잘보면 이렇게 말을 따지고 들어가면 전제된 것들이 있는데 이 전제된 것을 말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 고집하지 않기 위해선 불교식으로 공이나 무아를 이해하는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도가식으로 무위같은 것으로 기반 삼았을 수도 있고요

난 도가보다 유가가 뭔저라고 생각해서 도가가 그부분을 강조 한 것이지 유가가 더 오래 해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자가 더 먼저다 더 낫다는 아니고 이 유가의 전통이 더 오래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고집스럽지 않게 되러면 사물이나 개념이나 도나 뭐나 그것에 대해서 나름의 거리두기가 있어야 합니다.

극단적으로 비우고 죽이고 공이고 하면서 하는 것은 역시 강조이고 그로인해 의도하는 것이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강하게 말하지 않으면 이게 중요한지 모르는 좀 자극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충격요법이 가장 일반화된 가르치는 방법이죠

어떤 방법으로 하든 고집하면서 고집부림이 되지 않기 위한 나름의 마음법을 단련해야 합니다.

아니면 고루한 인간이 됩니다. 그거 밖에 모르는 마음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답답한 사람인 거죠

이것의 가장 큰 문제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이 닫혀서 정해진대로만 해오던 대로만 판단하고 살기 때문에 변화하고 있는 지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과거의 것에 따라 습관처럼 살고 있게 됩니다.

과거의 가치관이나 사상으로 지금 시대를 보면서 이러면 안되는데 이런 세상은 망해가는 것인데 이러면서 시대가 변하고 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미래의 전망을 볼 수가 없습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면 정치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세상을 도모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 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이 엄청 많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어릴때 배운 또 습관된 이념으로 이것이 진리인데 이것이 진짜인데 이래야 하는데 이것이 의인데 이것이 선인데 이것이 옳음인데 하는 것을 고집합니다. 

세상이 변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변화로 인해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갈 것이고 그 궁극의 지향을 어떻게 될 것인지 그런 전망을 모르니 그렇습니다. 작은 것에 매몰되어 더큰 흐름을 놓치는 것인데 그건 무위나 공을 모르고 그런 전제를 등한시하면서 배워서 그렇습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자기를 비운다. 자기를 겸손히 한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것이면서 남에게 강요하고 자기만이 옳다고 요구하는 모자름이 됩니다.

이러면 이미 눈이 먼 것입니다. 살고 있지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일이 이루어지게 끝까지 다할 것이요 대가가 우선이 아니다."

 

<임금 섬기는 일이라고 원문이 그런데 요즘은 쓸데 없는 말입니다. 대통령을 위해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혹여 시민을 위해 일한다고 한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회장이나 사장을 위해 일한다면이지만 그런 사적인 이득을 위한 것에 자기를 능력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더 큰 목적으로 살아야지 누군가의 밑에서 그 누군가의 성공을 위해 내가 쓰여지면 스스로를 누군가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인데 이런 멍청한 놈이 있나요

회사가 누군가의 이득이 아니라 나라나 세상의 원활한 운영이나 모든 사람의 이해를 위해서나 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것으로 하는 기업이나 경제활동의 의미가 지금과는 다른 것으로 변한다면 또 모를 일입니다.

사실은 과거에 왕을 위한 것이 바뀌어 시민을 위한 것이되고 회사나 가정도 나라와 시민과 세상을 더욱 윤택하고 원활한 삶을 위한 전 인류적인 가치관에서 다함께 더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의미로 바뀌는 시대가 되어갔으면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각자가 지금 어떤 판단으로 행하는 것인지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 과도기적인 시기에 우리나라가 처해 있어서 지금의 우리 판단이 앞으로의 미래 우리나라의 방향에 영향이 클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서 거대한 의미의 흐름으로 다가간다면 곧 될 것입니다.>

 

자왈 "가르침에는 류가 없다(대상의 구분이 없다.)"

 

<가르치는것은 인종이나 신분이나 누구나에게 열린 말이라고 하는데 이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다지 그런 역사가 아닌 것으로 아는데 해석만 이렇게 하는 것인지 애매합니다.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신분에 관계없이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겠지요

이것 조차도 비웃음을 삿을 것입니다. 개나소나 가르치다고요

아무튼 이런 소극적인 방법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한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선 말은 이렇다고 합니다

원래 누구나 배운 놈, 지위가 있는 놈, 돈이 있는 놈은, 배우지 못한 놈, 지위가 없는 놈, 돈이 없는 놈을 무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인간의 못된 습성인데 이런 것에 반대하는 말일지도 모르죠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행하는 정도는 되는 공자이니까요

모르는 사람에겐 가르쳐야 하고 지위가 없으면 지위를 가지게 등용해야하고 돈이 없으면 먹고 살만 하게 도와야 하는 것인데 비웃거나 거리두고 꺼려하거나 함부로 하려고 하는 짓을 하니 사회문제가 생기니까요.>

 

자왈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도모하지 않는다"

 

<이건 작은 범위에서입니다.

사회적인 일이겠죠 더 큰 범위에선 도가 같아지는 곳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 다르고 어떤 이유로 같고 이런 범위가 구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당을 만들거나 조직이 다르다고 경쟁만하고 다투기만 하며 편만 가르고 비난만 하겠죠 

이런 정도로 도가 있는 것들은 아닐 것인데 도라는 것도 서로 다르기도 하고 조금 다르고 더 다르고도 있고 비슷하기도 같기도 그런 다양한 층이 있는데 그런 층에서 서로 어떠한 도에 해당하는 것인지 구분해야 그에따른 행동도 하게 되죠

이러면 도라는 것이 하나여야지 여러개면 안된다고 하는 분도 있을 수 있는데 이래서 구분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도의 다양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데 이웃나라 사람의 도와 우리 나라사람들의 도는 분명 다릅니다. 그렇지만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지향하는 것이 작은 것들이 있고 큰 것들이 있고 하면서 이것엔 서로 다른 의견이고 저것은 서로 비슷한 의견이고 하면서 다양한 의견들과 도가 있는 것이지 오직 하나의 도에서 기준삼아 서로 갈라지고 다툰다면 너무 시야가 좁다고 하겠습니다.

나라끼리도 자국의 이익을 위하는 것과 세계적인 인류의 목적들은 서로 배치되기도 하고 협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그때 적절한 방법을 해야합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다름으로 인한 차이가 있고 그 공동체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더 큰 공동체의 소속이고 그럼 그에 따른 비슷한 도가 있게 되는 것인데 이런 당연한 것을 실재 생활에선 더욱 나와 다른 신이나 이념이나 당이나 사상이나 사람을 지지하니 무조건 나쁜 놈이거나 대들고 욕하고 비방하면서 마음의 선을 긋고 사는 것을 경계해야 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도를 알아야 하고 도를 공부해야 합니다. 

이건 누구나 철학을 해야 하고 그런 사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생각도 못하는 것이 사람인가요

사고를 하며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는 것이고 함께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며 살려는 것인데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없는데 자기가 이런 것을 원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있는 도를 자각하는 것이어야 서로 도를 논할 수 있겠죠. 그래야 서로 협력도 하고 경쟁도 하고 그러면서 다른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이 논어의 문구는 자기와 도가 달라서 상대를 폄하하고 비방하는 근거로 삼은 놈들이 있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항상 나쁜 것으로 쓰기를 더 잘하는 것이고 자신을 위하는 식으로 쓰는게 더 쉬우니까요>

 

자왈 "말은 뜻이 전달되면 된다"

 

<말을 지나치게 꾸미거나 말만 하거나 그런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주 나온 말이긴 합니다.

말이 많아지고 이렇게 저렇게 살을 붙이면서 그로인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혹하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말이 오해를 사기도 쉽고 말이 의미를 왜곡하기도 쉬워서 말로인해 생기는 문제도 많지만 우선 이런 말을 지나치게 장황하거나 사실을 알기에 방해되거나 의도적으로 다르게 알게 하기위한 지나친 수식들이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뜻만 전달하면 된다고 잘라 말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재미없거나 단촐한 말이면 흥이 나지 않기도 합니다 대화도 재미있고 정감있으며 열정적으로 하면서 즐기는 것인데 간단한 뜻만을 위해서 쓰면 너무 딱딱하기도 합니다.

고등학교때 누군가 뭔가 보고서 그것을 설명하려고 흥분해서 교실 앞에서 설명하는데 막상 들으면 별 얘기가 아닌데 그 설명이 재미있어서 한참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재주라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본인도 즐겁고 그로인해 살아가는 윤활류도 되고 어떤 이익도 있어서 살아가게 할 수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재주는 그 사람의 정체성이기도 하는데 더 발현하고 발전시켜서 드날리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말을 뜻만 전한다고 하면 내가 이 논어를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것도 부질 없는 것이 됩니다. 그냥 인해라 됐지! 이게 다입니다. 한글로 해야 하니 어질게 살어 임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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