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고전

계씨

제라울 2020. 7. 18. 21:22

논어를 읽다보면 군자나 소인이나 이런 비교를 하면서 말을 전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게 소인이라고 하면 뭔가 기분이 나쁘고 그렇습니다. 군자와 비교하면서 뭔가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쓰이는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 누가 소인이고 싶고 누가 그런 말을 듣길 바라겠어요

이걸 그렇게 듣기보다 지금은 시대가 다른 세상이니 책 내용의 맥락만으로 볼 건 없다고 보는데 그래서 군자를 보편이라는 것으로 보고 소인이 이기적인 이라고 하겠지만 그보다 개인이라고 해야 합니다.

누구나 이런 보편과 개인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이나 계획은 보편적인 세계를 지향하더라도 결국 가정생활이나 일상에선 먹고 살아야 하고 이기적인 감정도 일어나며 그 사이에서 힘겨워하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군자는 오로지 군자이기만 하고 소인은 오로지 소인이기만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군자적인 고민과 소인적인 고민에서 판단해가는 거라서 군자적인 판단과 행동을 더 주로 하고 그렇게 해가려고 애쓰고 그러면서 군자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고 개인적인 부분에서 소인처럼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도 역시 사실이게 됩니다.

이러한 둘 사이에서 갈등이 당연한 것인데 좀더 군자적인 판단과 행동을 해가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꼭 그래야 한다는 것으로 답답하게 볼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것이 어는 선에서 평가 될지를 보며서 사는 것이죠 이게 남 눈치 보거나 외부의 기준에서 자신을 다루는 것이 되어 옳다 못할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꼭 외부의 기준으로서만이 아니라 내적인 욕망에서도 우린 스스로 더 떳떳하게 살고 싶은 것이 선천적인 바람이니 이러한 것을 하고 싶게 된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본문을 보겠습니다.

 

계씨가 장차 전유땅을 정벌하려 하였다.

염유와 계로가 공자를 만나서 말하였다. "계씨가 장차 전유를 정벌하려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공자왈 "구야(염유) 이건 니가 잘못한 것이 아니더냐 무릇 전유는 선왕(무왕이나 주공)이 동몽산의 제주로 삼았고 우리 노나라의 땅에 있는 것이니 우리 사직의 신하이기도 하다. 어찌 왕도 아닌 계로 따위가 정벌한다고 하냐?"

염유왈 "계강자가 하려고 합니다. 우리 둘은 원하지 않습니다"

공자왈 "구야! 사관인 주임이 한말 중에 이런게 있어 [해야할 일에 능력껏 다하는 것이고 만약 하지 못할 것이면 지위를 그만 두는 것이다.] 위태로운데 지키지도 못하고 넘어지는데 붙잡지도 못하면 장차 어디에 쓰겠냐? 니 말의 잘못이 이뿐인지 아냐! 호랑이와 코뿔소가 우리를 뛰쳐나오고 함속의 거북 껍질과 옥이 훼손되면 이게 누구 잘못이냐? 니 잘못이 아니더냐?"

염유가 말했다. '저 전유는 견고하고 비읍땅에 가깝습니다. 지금 취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후손들의 우환이 될 것입니다.'

공자왈 "구야! 군자는 욕심이 있으면 그것이 아닌듯이 꾸며서 돌려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내가 듣기에 나라를 소유하고 가문을 소유한 자는 시민의 인구가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시민들의 삶이 공평하지 못할까 걱정한다.

또 가난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치 않을 것을 걱정한다.

공평하면 가난이 없고 화목하면 시민이 부족해지지 않고 편안하면 기울어지지 않고 이렇기 때문에 멀리서도 사람들이 좋아해서 오지 않으면 오히려 문덕을 닦아 멀리서 오게 하는 것이고 이미 오면 그들을 편안케 한다.

지금 유와 구, 너희 둘이서 대부를 돕고 있으면서 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살려고 오게 하지 못하면 나라가 붕괴되고 떠나도 지키지 못할 것이고 노나라 안에서 창과 방패를 들어 전쟁할 궁리만 하면 전유가 아니라 담장안이 더 위험한거 아니냐? 난 전유가 아니라 계씨가 후대에 더 공포를 줄 거라고 본다."

 

<계씨가 전유를 쳐서 확장하려고 하나봅니다. 그 신하로 있는 염유가 공자에게 미리 말하려고 자로까지 대동해서 눈치보고 있습니다. 해도 되는 것인지 의견을 묻는 것도 아니고 이럴 것이니 그리 알라는 식의 말입니다.

공자는 당연히 분노가 일어나겠죠 가난을 해결하고 편안케 할 생각이 아니라 전쟁해서 시민들을 위험한 곳에 보내고 지들 욕망을 위해 착취하는 것으로 영토나 확장하려고 하니 말입니다.

그것도 가신 주제에 그런짓을 하니 가당찮아 보일 것 같습니다.

이 계씨라고 하는 문단은 거의 나중에 소설처럼 만든 글이라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리 보이기도 하죠

이 역사적인 일인 것처럼 보이는 전유 병합 사건이 다른 역사서에 있지 않다고도 하니 더 그렇게 보입니다.

염유가 간사하게 묘사 된 것입니다. 얼핏 뭐 이런정도로 그렇게 염유를 욕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있기도 합니다.

이거 보다 더 어리숙하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들이기도 한데 말이죠 글이 그렇게 욕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험한 말이나 쌍욕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욕은 의미로 알아 들으면 의미로 하는 것이고 의미로 모르면 된소리 처럼 듣기 거북하거나 자기 감정을 내뱃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후자의 욕만 욕으로 알면서 기분이 동요하고 전자는 감정이 동하지 않는다면 의미로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수준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해야 합니다.

아무튼 이정도의 권모술수가 지금의 자본주의에선 이런 것은 약과이고 더 잔혹하고 가증스럽고 기만적인 술수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잘한다고 하는 정도까지 간 미천한 주의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기준은 군자입니다.

군자라고 하는 것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으로서의 덕성이 있는 것을 말하는데 그 잘 다스린다는 것이 사람들이 공평하면서 가난을 면하게 하려하고 이 가난이 자본주의적인 의미로 돈벌게 하는 것을 따라하지는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해주고는 있지만 그만큼 인간으로서의 품위는 삭제하게 해서 자본주의 자체만으로 안되고 보완해야 할 기본 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공평함이 중요한 것은 그래서 입니다. 자본주의가 누구나 원하는 재화를 얻을 기회가 있다하지만 그들이 이런 말하는 이면에서 행하는 기만이 현학적일 정도로 복잡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정의를 바꾸는 그런 것을 마르크스가 시도하다가 실패했고 교묘하게 실패하게 했으며 지금은 그와는 다르기도 또 비슷하기도 한 흐름이 지속적으로 보완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언젠가는 훌륭한 자본주의가 나오게 될 것도 같습니다. 단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니겠죠 꾸준한 투쟁과 노력이 있어야 하겠죠 그게 지금의 공산주의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이건 이미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인류의 가난을 면할 수 있게 하기위한 마음을 가지게 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나도 배고프지만 남도 배가 고픕니다. 내가 원하는 돈의 양만큼 남도 원하는 것인데 무한한 돈에 대한 무조건적인 탐욕이 자연스러운 거라고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닌데 이런 오해적인 욕망을 진짜로 알게 하고 추구하게 만든 속임수나 기만들을 변화시켜야 하고 정의롭지 못한 돈이나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있는 자본주의였으면 하는 것이죠

편안케 한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편암함을 느끼는 것인데 우선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적은 나라이어야 하겠고 상식적인 대화가 되는 사회이어야 하는데 당연한 상직적인 말이 안되는 상황이 있기도 합니다. 상식에 반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으니까요 상식적인 지식이나 의미가 옳은 것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니까요 그보다는 여러 대중들이 납득하고 받아 들일 수 있는 정도의 이해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상식에 반하고 있다는 것도 지금의 사회현상들을 보니 서로 다르게 이해할 거 같은 생각도 합니다. 그들이 상식으로 하는 것이 그들끼리만의 상식만을 의미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이러기 위해선 시민들도 노력해야 합니다. 정치라는 것에 들어가면 어떤 것이 상식인지 애매해지기도 하니까요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그것이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정치라는 기준에서 객관적인 상식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식의 일방적인 주장이 난무하다는 것도 알아야 하겠죠

자기가 주장하는 만큼 남도 주장하는 것이 있고 의견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대화의 기본이고 사회생활하는 사람들끼리의 전제이지만 아직 부족한 것이 우리 사회인데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용서하고 나는 엄하게 하는 것이 논어에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이건 군자가 되기위한 덕목입니다. 이런 것을 배우려고 하고 일반화 되어가야 상식적인 것이 되겠죠. 누구나 군자가 되어야 하는 그런 시대에 사는 것이지 공자때와 같이 권력자만(관료자) 군자가 되는 듯한 것은 아니니까요

이런 것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하려고 하니 전쟁은 결국 가장 낮은 신분이나 힘없는 사람들의 피를 담보로 하게 됩니다. 지가 죽는 것도 아니고 실패해도 자기가 손해볼건 없고 이런 권력자들의 안이함고 잔인함이 화가 나는 것이겠죠

거기에 염유는 전유를 탐내는 것을 계시가 하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변명합니다.

자기가 그것을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그게 공자는 화가 납니다. 내 제자로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말게 해야 하는 것이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막지 못하면 그런 것은 집어치우고 나올 수 없느냐고 합니다.

지금도 먹고 살기 위해서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옳지 않는 회사나 정부에 기대어 삽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들어오는 이득이 있으니 아무리 억울하고 비윤리적인 것을 시키고 사장이나 정부가 더렵고 이상해도 그냥 있는 것은 군자로서 자격미달입니다.

물론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이고 그로인한 판단에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돈을 위해선 뭐든지 해도 되는 것으로 아는 시대에선 더욱 이것이 잘못인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식의 개같은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개처럼 번건 개처럼 쓰게 되어 있습니다. 지가 언제 정승이 되어본적이 있어서 정승의 행동을 할 수 있나요 한번 개는 끝까지 개일 뿐입니다. 

시작부터 그런 사고가 아니면 언제나 그런 사고는 안됩니다. 시작이나 동기가 잘못이면 중간과정이고 결론이고 이미 예정된 길을 가는 것이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공자왈 "이익되는 친구가 세명이 있고 손해보게 하는 친구가 셋이 있다.

곧은 친구, 성실한 친구, 많이 아는 친구가 이익이 있고 편벽된 친구, 좋게만 말하는 친구, 말을 잘 꾸미는 친구는 손해가 되는 것이다."

 

<자왈이 아니라 공자왈로 시작하니 분명 공자가 한 말인지 의심스러운 것이 이 계씨 문단인데 이 글만봐도 참으로 한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친구를 고르라는 말인지 황당한데. 친구를 이익되는 친구, 해로운 친구로 나누어서 이익되는 친구를 사귀라고하니 이게 할말인가 싶습니다.

친구가 잘못된 길로 가면 또는 저러한 해로운 행동을 하면 충고하고 바르게 가게 하려는 노력을 하라고 해줘야 하는데 그런 친구는 해로운 친구라고 하니 이건 배우는 사람이 들을 말도 할 말도 아닙니다.

이런 것을 보고 내가 친구들에게 곧고 성실하고 많이 알려고 공부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해로운 친구는 이런 것이니 이러지 말라고 하면 또 그것도 그럴 수 잇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논어의 논법대로라면 내가 누구를 해로운가 이익되는가를 말하기 전에 내가 다른 친구들에게 이익되고 있나 해롭고 있나를 생각하라고 해야 합니다.>

 

공자왈 "이로운 세가지 즐거움이 있고 해로운 세가지 즐거움이 있다.

절도있게 예와 악을 즐기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을 즐기고, 어진 친구들이 많은 것이 이롭다.

교만하게 즐기고, 안일하고 게으르기를 즐기고, 유흥을 즐기는 것은 해롭다.

 

<절도 있게 예나 악을 즐기는 것은 중요합니다.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이 그냥 잘못이라고 하면 고리타분 한 것입니다. 절도 있게 하면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절이라는 것이 마디나 관절 같은 의미이니까 구분하고 분명한 한계내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구분이란 너무 풀어지거나 너무 지나치게 끝도 모르게 퍼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또 무조건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끝까지 가고 밤새 달리면서 불태우는 것을 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그런 것을 해보면서 그런 것에 주의를 해가는 것이지 처음부터 무조건 이건 안된다고 할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이들고 배움이 무르익어 가면서도 자기 행동의 절제나 다룸이 지나치게 벗어나면 그것도 보기가 좋지는 않으니 그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할 것이 있으니 그걸 위해 행동하고 있어서 다른 것에 지나치게 빠져나가 헤이해질 수가 없고 그 하려는 일에 맞게 살아야 해서이기도 합니다. 인생에서 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몸도 마음도 휴식하고 어느정도 유흥을 즐기고 놀고 하는 것도 해가면서 일에 추진력으로 삼아도 되고 모든 것을 다 잊고 그냥 널부러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고자 하는 것을 하려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스스로를 믿어서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과 즐거움은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는 그것에서 있을 것이니까요 그리고 일의 특성상 해야할 일이 방탕해야 한다면 그건 또 그런 것이니 뭐든 너무 깐깐 할 것도 아니고 너무 풀어지지도 않는 것인데 그건 그 삶의 목적과 같이 봐야 하는 것이라서 딱 정해진 규칙은 없습니다. 그 규칙있음에서 무규칙의 이해를 곁들이는 혜안이 있으면 좋은데 이건 심히 어려운 경지일 것입니다.>

 

그외 다른 글들도 이런 의미에서 살피면 될 거 같습니다. 타인을 칭찬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꼭 맞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라서 곧이곧대로만 보고 지나치게 비판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위 글처럼 이건 좋은 것 저건 나쁜 것 이렇게 선 가르는 것이 얼마나 치졸하고 멍청한 짓인지 그것을 알아야 하겠죠>

 

공자왈 "군자를 모시면서 세가지 허물이 있다. 말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나서서 말하는 것을 조급하다고 하는 것이고 말을 다하고 이제 말할 차례가 되었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이고

상대의 안색을 살피지 못하며 말하는 것을 장님이라고 하겠다."

 

<이걸 너무 딱딱하게 볼 것은 없습니다. 이 계씨편이 이렇게 딱딱하고 답답한 소리를 하는 것인데 지금은 유연하게 들어야 합니다.

군자를 모시면서라고 하는데 직장상사나 나이 많은 분들이나 또는 친구나 동료나 아랫사람이나 나이어린 사람에게도 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상대가 어린애라도 아직 말을 다 안했는데 다 안다는 듯이 말을 끊고 나서서 이렇게 하면 된다고 나무라 듯이 또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하는 것이 꼴불견인 것입니다.(나도 켕기는 부분인데 ㅜㅜ)

말할 차례이고 말을 해야 하는 것인데 이런 때를 놓치거나 무시하는 것도 무지하고 눈치 없는 것이라서 대화를 하기가 불편하게 됩니다. 상대가 말하게 해야 하는 것도 있고 상대가 말할 때 말을 해줘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다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내가 실수하거나 지나치게 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피면서 해야 하는 것인데 이런 것이 없다면 그것도 참 대화가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우린 대화해야 하고 대화는 서로간의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의견을 들을 자세를 가져야 하며 당장의 해결보다 긴시간의 서로간의 함께할 세상을 가늠하는 것입니다. 대화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어울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한 방법으로서 해야하는 우리들의 행동입니다.>

 

공자왈 "군자는 세가지를 경계하는데 젊을 때는 혈기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색을 경계하고

혈기가 강성해진 중장년에선 투쟁하고 경쟁하는 것을 경계하고

노인이 되어선 이미 혈기가 쇠하니 얻으려고만 하려는 것을 경계한다."

 

<역시나 경구날리는 꼰대짓이 나오는데 좀 계씨편은 ㅠㅠ

어려서 성교를 조심하라고 하는 것인데 다 그런 건 아닌데 특히나 심한 애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참는다고 될 것은 아니고 적절하게 풀고 해소하는 방법을 말하는게 더 나을 것도 같은데 무조건 과거에서나 지금의 나이든 것들은 막고 못하게 하는 이런 부정적인 방법밖에 모르는 것이 이런 경구날라고 들고 자라서 그렇습니다.

훈계를 듣고 자라니 나이 들어서 훈계하는 것을 따라합니다. 세상이 망할 것처럼 하는데 잘못된 이성탐닉으로 세상을 말아먹는 것은 나이든 성인 그랬지 애들이 그런 것보다 훨 많습니다. 애들을 성을 밝힌다고 훈계하면 지지리도 못난 짓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두운 곳에 부정적으로 만들지 말고 밝고 긍정적으로 성을 즐기게 하면 나이들어서 이상한 짓을 하면서 더러운 짓을 하지 않을 지도 모르죠

성을 몸이 다칠 정도로 탐닉하는 것은 정신적인 원인도 있어서 어린이들에게 지나친 정신적인 억압과 힘들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 타인을 힘들게 하고 사회문제가 될 정도의 일을 벌이는 것을 줄이게 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라 그저 강압적인 막음과 지나치게 애들을 불신하면서 억압하려고 하는 것이 어른들이 스스로를 믿지 않아서도 그렇고 대가리가 나뻐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좋아지고 의료도 좋아져서 왠만한 건강은 문제되지 않으니 너무 건강으로 겁주면서 나무랄 것도 아닙니다. 과거엔 성병으로 죽거나 자식생산에 문제가 많았지만 지금은 성병으로 죽거나 이상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나이 들어가면서 사회생활하면 투쟁을 합니다. 사회에서 성공하고 돈을 벌고 지위가 오르고 싶어서 죽기살기로 일하게 되죠 그러다가 과로로 죽고 경쟁에서 못견디고 자살도 하고 이런 스스로 힘든 사회를 만든 것이 그들 중장년들의 이러한 혈기를 다스리지 못해서 일어나는 과도한 투쟁입니다. 중년의 지들끼리 서로를 강압하고 억압하며 못된 수단을 써서 서로를 이기고 누르고 탐욕을 부리니 그런 것인데 세상의 온갖 못된 짓은 다 어른들이 하면서 깨끗한 척도 이들이 하고 잘난 척이나 훈계도 이들이 하는 것을 보면 별납니다.

전쟁도 불사하고 누굴 죽이거나 억누르거나 겁을 주거나 뭐든 해서 어떠한 피해를 입혀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는 경쟁을 합니다. 무한 경쟁이라고 하면서 자랑스럽다는 듯이 떠벌리는 것도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혈기에 잡아먹힌 숙주가 된지 오래입니다. 대가리는 나뻐서 이렇게 된지도 모르면서 남보다 잘낫다고 돈 더 많다고 더 지위가 높다고 자랑하고 으스대는 꼴을 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지가 뭘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나이들면 得이라고 하는데 얻는 것도 되고 보수적인 것도 되고 탐욕도 됩니다.

중년시기에 하던 대로 하는데 이때도 멍청한데 나이들수록 더욱 시야는 좁아지고 대가리는 이미 유연성도 없고 그러니 이해의 폭도 좁고 마음도 사그러진지 오래라서 더욱 세상의 잘못된 길을 알아보지 못하니 하던 억압이나 폭력이나 탐욕을 고집스럽게 합니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하기보다 하던 것을 더하고 이러면 지키는 짓을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진자나 자기와 다른 것을 하는 사람들을 저주하게 됩니다. 이미 마음의 유연성이 사라져서 다르게 생각하고 남을 이해해주고 의견을 듣는 그런 것을 참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난 이런 것이고 옳으니 니가 잘못한 것이고 나쁘다는 것입니다.

돈을 주면 우선 받고 돈의 정의로움은 따지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고 간단하고 상식적인 그러한 사회적인 가치에서 벗어나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닫히고 막힌 상태에서는 다른 것을 하기보다 해오던 것이라서 보수가 됩니다. 보수라는 것이 어떤 정치 견해가 아니라 해오던 것을 계속하려고만 하는 것이어서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되지 않으면 집요하고 성질부리면서 안하무인이 됩니다. 나이들면 부끄러움도 사라져서 오직 성질대로만 하려고 하는 것이 됩니다. 나이 든자들의 응석은 어릴때부터 잘못된 버릇에서 나오는 것인데 세살 버릇 여든 가는 것이죠 나이든 노인들의 응석은 타이르지도 못합니다.

늙은이 고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인데 나이든 분들이 다 이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나이들어가는 사람은 이러한 경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심한 사람이 있고 덜한 사람이 있으며 그렇게 되는 분야또한 다른 것인데 결국 이런 것이 있는 것은 같습니다.

나도 이런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 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낼모래 50이라고 벌써 보수적인 어떤 것이 보이는데 조금이라도 자기관찰이 느슨해지면 이렇습니다.

이것을 경계하며 자기를 찾아가고 군자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려서는 성에 빠져 이성만 생각하느라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커서는 사회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면서 결국 세속적인 사람이 될뿐 예나 의를 중시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나이들어선 손해보고 당하고 어려운 것만을 기억하고 생각해서 악착같고 똥고집에 겸허하고 배려하는 것을 잊게 되어 갑니다.

이런 것에 어떻게 해소하고 다루면서 적절하게 인생을 설계하고 살아가며 원하는 성취를 이룰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저러지 않아야 한다도 아니고 너무 저런 모습이거나 이로인해 해야 할 것을 못해서도 안되는 것인데 어떻게 해가고 어떻게 이루어 갈지는 스스로의 몫이 됩니다.>

 

공자왈 "군자는 세가지를 두려워 한다.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을 두려워하고 성인을 두려워한다.

소인은 천명을 모르니 두려워하지 않고 대인은 억압하고 성인을 모욕한다."

 

<계속 세가지, 세가지 하면서 억지로 짜맞춘 듯한 경구를 날리는데 참말로 웃기는 짓 입니다.

아무튼 천명 대인 성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천명을 어떻게 아나요? 이것을 아는 것이 우선 곤란함이 많은데 소인보고 모르니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좀 억울하긴 합니다.

말하는 것을 보면 이것을 편집한 자도 천명을 모르거나 오해하는 것 같은데 이걸 소인은 모른다고 하니 이렇게 모르는 것이 안다고 떠들며 항상 나대는 짓을 합니다.

대인이나 성인이나 어떻게 구분되는 것인지를 알 수 없는데 이들은 대개 요순 같은 자들을 성인으로 할 것도 같은데 그런 증거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하기엔 허구를 진짜 처럼 말하는 듯한 허망함이 있어서 더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대인은 나이든 자들이나 상사나 공직자들을 말하는 것도 같은데 아니면 어떤 경지이룸이 있는 것이나 그런데 이것에 대한 설명이 없으니 뭐라하기도 뭐한 것입니다. 소인의 반대를 대인이라고 하기엔 소인은 군자와 서로 비교하면서 말하니 이게 좀 그런데 뭐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천명은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것인데 누가 이걸 안다고 하겠습니까 이걸 알면 지가 하늘이라는 것과 다름 없는데 이런 것이 가능하나요?

사실 인간은 인간이 뭔지 모릅니다. 그런면에서 하늘도 지가 뭔지 모를 수 있는데 이건 아닐 것이고 하늘은 하늘이 뭔지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서 이런 안다 모른다는 인간의 고민이지 하늘의 고민은 아니니까요

천명이라면서 하늘의 뜻이라면서 신의 뜻이라면서 말하는 인간이 있다면 우선 사기꾼입니다. 사기꾼이 아니면 무지렁이이거나요 기본적으로 인간은 천명같은 것을 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객관 대상으로 두고 본다는 것이 애초 어불성설이고 하늘의 찌끄레기로서 하늘을 객관대상으로 보는 것이되니 찌끄레기라는 것을 자각하면 그냥 하늘은 논할 대상이라기 보다 내가 찌끄레기를 벗어나야 할 문제가 되는 것을 알게 되어야 자각이라고 하겠죠

그래서 내가 천명을 안다고 말하는 입장을 가질 수가 없다는 이 간단한 이해가 없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천명을 두려워 한다 만다라고 말하면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해야 합니다.>

 

공자왈 "생이지지가 제일 좋고 배워서 학이지지가 그 다음이고 곤이지학이 또 그다음이다. 힘들어서 배우지 않으려고 하다면 인간도 아니다."

 

<백성 이하라고 하는데 난 그냥 인간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면서 아는 자, 배워서 아는자, 어렵게 아는자라는 것으로 누구나 들어본 말입니다.

근데 꼭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천재가 있습니다. 즉 이론을 습득하는 것은 천재적인데 실재로 해야 하는 것에선 그것을 못합니다. 이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정치로 말하면 모르는 지식이 없고 법을 다 외우고 정치, 행정관련 학문을 남보다도 빨리 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거나 훌륭한 정치인이 되거나 장차관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천재나 신동이 정치 잘한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면서 이거 저거 알아도 결국 알기만 하지 써먹을 곳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잘해야 박사되고 회사의 기술을 만들어주고 남의 직원이 될 뿐입니다.

그러면 만능을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거 저거 다 잘하는 것을 생이지지라고 할 것인데 그래봐야 공자도 권력자가 되지 못했고 잘해봐야 왕의 신하가 될뿐이라서 남의 직원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거나 주권자가 되지는 못합니다.

지금은 우리는 모두 주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 민주주의에 사는데 공자는 자기 나라의 주권으로서 주인된 권리가 없습니다. 하찮은 인생이지요

태어나면서 남보다 나은 능력을 가집니다. 이건 누구나 같습니다. 

이걸 잘할 수도 저걸 잘할 수도 있는 것인데 그 잘하는 것이 사회에 이득되고 살아가는 것에 도움되면 천재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아닌 것을 잘하면 바보거나 불필요한 인간이거나 패배자일 뿐이게 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성향을 가지는게 그 성향이 그사람의 능력을 가지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 성향대로 하고 성향대로 감정가지고 성향대로 생각하니 그것이 잘 되면 잘나가고 그것이 사회의 기준에 잘 안들어 맞으면 무능함이 되는 것이라서 누구나 생이지지인데 그것이 사회에 맞는냐 아니냐가 됩니다.

그래서 생이지지는 객관적인 기준이 모호한 것이고 위에 말한대로 사회적인 기준에서 말하는 대단히 사기적인 냄새가 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거라서 이런 것이지 딱히 별거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힘들다고 배우지 않는 자들입니다.

누구나 힘들게 배워야 하는 것인데 나면서 아는 자들도 노력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노력하는 분야가 다를 뿐입니다. 이들이 다 알고 노력없이 되는 것이면 세상이 이정도보다 더 나아갔을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를 보면 그 잘난 자들이 왜 거기까지만 공부하거나 지식을 알고 왜 거기서 멈추고 왜 그것만 알려주고 왜 그정도에서 끝난 것인지가 있습니다. 이들도 한계는 있고 이들도 그 이상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라서 노력을 하다보니 거기까지 간 것입니다. 남이 쉽게 뭔가 한다고 난 왜 쉽게 하지 못하는 가를 생각한다면 그들이 놀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죽기살기고 노력하고 있고 난 남이 잘하는 것을 부러운 시선으로 보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뭔가를 죽기살기로 해야 하고 거기서 자기가 이루어 내는 성취가 있으면 됩니다. 남이 이룬 성취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것이 왜 잘못인지를 알려고 노력해서 성취해야 합니다.

그래야 뭘 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게 되면 그다음 자기 것을 이루려고 하겠죠 이때 남보다 더한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 남보다 더욱 하게 되는 노력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는게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힘겨운 것을 피해가고 안하려고 한다면 언제나 거기서 끝나는 인생일 것입니다. 

남보다 나은 인생이라면 남보다 더 힘들게 애쓴 것이 있어서이지 거저 된 것은 없습니다.

태어날 때 그러해도 죽을때 무엇을 성취한 것으로 할지는 또 다른 것입니다.

태어난 거기서 무엇이 더 나아갔고 못갔고 후퇴했는지는 다 다를 것이니까요 생이지지라서 놀기만 한다면 결국 멈춘 거거나 후퇴 한 것이겠죠 곤이지학이라서 역시 아무것도 안한다면 스스로를 포기한 자가 되겠죠>

 

공자왈 " 군자는 9가지를 생각한다.

볼때는 밝게 제대로 본건지 생각하고,

들을 때도 밝게 제대로 들은 건지 생각하고

안색은 온화한지 생각하고,

행동엔 공손한지 생각하고,

말할 때는 진실성이 있는지 생각하고

일할 대는 공경하는지 생각하고

의심하면 물을 것을 생각하고,

화가날  땐 어려움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이득이 있으면 의로운 것인지 생각한다."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하고식으로 분명 경구 날리기 입니다.

다만 이런 것을 잘 체득시켜서 훈련하면 배움이 되겠죠.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런 것이 왜 중요한지 알고 능동적으로 해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인이 될 나이가 지나면 남이 시키거나 명령하는 것에 따라서 할 게 아니라 자기가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가면서 행동하는데 이런 것에 의미를 알아야 하고 그로인해 자신이 행해가는 것이 되어야 정말 자기 것이 되고 배움이 되는 것이지 애들처럼 시키는 것을 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습관들이기는 초보단계가 됩니다. 분명 습관들이면 배움이 되지만 스스로 납득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은 심층의 반발을 사기도 합니다. 그런 것은 공부가 아니라 역효과가 되겠죠 그래서 이러한 경구를 날리는 것이 논어에서 할게 아닌 것입니다. 유치원생 앞에서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하는 짓인데 이걸 논어에서 하면 안되죠 성인은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지는 것을 해가는 것이라서 판단력을 기르는 것이지 시키는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공자왈 "선을 보면 미치지 못할까 다가가려 하고 불선을 보면 끓는 물에 다을까 물러나는 사람은 내가 본적도 있고 들어본적도 있다. 그러나 은거해서 그 뜻을 구하고, 의를 행하면서 도에 도달하게 하는 사람은 내가 아직 들지도 보지도 못했다."

 

<선하려고 하고 불선하려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긴 한데 지금으로서는 무엇이 선이고 불선인지를 알아내는 지성과 겸손이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지 못하는 사람 이전에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의인지 알아야 그것을 할지 말지 한 사람인지 안한 사람인지가 되지만 내가 지금껏 겪어본 것으론 의가 또 선이 뭔지 알려주는 것부터 벽에 부딪히는 한계를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앎과 행을 구분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게 불필요한 단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위대한 사람일 것인데 대개는 순서상 구분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은거와 의를 행하는 것을 구분하고 있는데 난 은거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 이런 말은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은거를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남들이 알만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이지 의를 하고 있고 선을 행하고 있는 것을 멈춘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이럴 수 있는 것인데 그러면 은거라고 하지 말아야 하지 않나 합니다.

선과 의를 행하는 방법의 다름이라는 개념을 쓰면 되는데 굳이 은거라고 하니까요 은거가 그러한 의미가 있었거나 앞으로 있게 한다면 또 다른 것이겠죠>

 

제나라 경공이 말이 4천여필이나 소유했으나 죽으니 시민이 칭송하지는 않는다.

백이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으나 시민들이 지금에 이르러서도 칭송한다. 이런걸 말하는 것이다.

 

<백이숙제를 말로만 칭송하고 뒤로는 치부하면서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같은데 그런 재물에 별다른 욕심을 안부리는 것이 그네들의 역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식으로 굳이 역사적으로 자꾸 백이숙제를 들먹이며 소환 할 수록 이런 것이 그 사회에 없어서라는 반증도 되지 않나 하는데 지금도 자본주의에 저항했었다가 누구보다 재물에 환장하는 나라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상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도 재물에 눈이 돌아가는 미친놈들만 인정받는 것인데 자본주의의 병폐인지 인간의 더러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진항이 공자의 아들인 백어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들이니 특별한 걸 가르쳐 준게 있나요?

대답하길 '아니요 일찍이 마당에 혼자 서 있길래 빨리 마당을 지나가려 하는데,

말하길 "시를 배우느냐" 하길래 '아니요' 하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 해서

난 물러나서 시를 배우게 되었고,

다른 날에 다시 홀로 서 있길래 빨리 마당을 지나가려 하는데,

말하길 '예를 배우느냐' 하길래 "아니요" 하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같이 서 있을 수가 없다.' 해서 

물러나 예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진항이 물러나 기뻐하며 말하길 "하나를 묻고 세가지를 들었다. 시를 듣고 예를 듣고 또 군자라고 해서 자식에게 특별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었다."

 

<여기 천박한 제자 한 놈이 나옵니다. 스승이 자기 자식에겐 다른 비법이라도 몰래 가르치는 것이 있을까 해서 물어보는 것인데 이건 묻는게 아니라 염탐이 됩니다.

세간엔 스승이 자기 혈통에게 전수하는 것이 따로 있고 비법은 장자에게만 전한다기도 하고 페쇄적인 전수의 전통이 있는 것도 있는데 이건 진짜 되먹지 않은 것이고 이런 스승이 뭘 아는지는 몰라도 결국 쓰레기같은 것만을 아는 자일 거라고 단언하겠습니다.

사람이 알면 알수록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한 거만함이 늘어나기도 합니다. 남몰래 알고 남몰래 그로인해 이득울 취하려고 하고 자기만 독점하려는 것은 분명 생기게 됩니다. 뭔가 하나 알아내는 것이 광산에서 보석 케는 것과 같아 그것을 소유하고 자기만의 것으로 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니까요 이런 마음이 들때 그어떤 것도 그다지 대단할 것이 없고 그 어떤 것도 그다지 특별할게 없다는 공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니면 공 조차도 모르는 그런 인간일 뿐으로 그 성취는 별볼일 없는 것이 되죠

하지만 분명 세간에서 독점과 페쇄적인 것은 엄청 많이 있습니다.

함부로 공개하지 않으려고 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고 함부로 전해주지 않는다고도 하며 그 이유로서 하는 말도 거창합니다. 온갖 그럴 듯한 이유를 나열하며 변명을 하니까요 머리좋으면 이럴때 거창하고 정합적인 이유를 어려운 말도 써가면서 잘 합니다.

무엇이든 공개되는 것이 맞습니다. 비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은 세상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세상의 일을 자기 개인적인 일로 치부하는 것이 되어 스스로를 작은 개인으로만 보면서 안으로 찌들어가는 협소한 것이지요

그래서 스승이 뭔가 숨기는 것이 있나 자기에게만 뭔가 비법을 말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하고 의심도 하는 놈들이 있게 됩니다.

거창하고 신비로운 뭔가 비법이나 비기나 비의나 그게 있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에 글처럼 그저 아무것도 아닌 말을 할 뿐입니다. 누구나 하는 공부, 누구나 다 아는 그런 것에서 학문의 성취는 있게 됩니다. 특별한 것은 없으며 특별한 것은 인간의 무지한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지 세상의 이치는 아닙니다.

세상은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지만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법은 숨겨 있지 않고 다 드러났지만 알아보지 못해서 비법입니다.

그런데 시를 알아야 말을 하나요? 예를 알아야 서 있을 수 있나요?

시경의 글은 우상시하고 대단한 무엇이라고 보는 것도 특별한 것을 찾는 더러운 심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냥 별거 아닌 상식적인 보통의 사람들이 자기 감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적인 욕망, 탐욕적인 욕망, 바라는 것을 노래하고 감정을 하소연하고 즐겁게 감흥하고 화나고 분노하는 자연스러운 우리들의 감정들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것을 왜곡해서 성스러운 무언가로 말하려고 하면 그것이 사람들과 대화를 못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바라며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에 기뻐하는지를 왜곡하는 아주 저질적인 짓입니다. 이런 짓을 과거 유학을 배우는 자들이 하는데 그래서 시경이라고 합니다. 이런걸 경전이라고 성스럽게 말하죠 결국 시경은 읽은자는 사람을 모르는 등신이 되었을 뿐입니다. 말하지 못할 자들을 양산하는 것이죠.

애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 지금은 이걸 읽는 자들이 더욱 무지의 지옥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언제나 좋은 의도로 시도하고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염되어 본래의 의도는 가려지고 인간들의 욕망으로인해 더러운 쓰레기가 될 뿐입니다.

예는 또 어떨까요? 거기엔 어떻게 해야 하는 것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자주 지독한 경건주의이기도 하죠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성인이 되면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왜 그것이 선이고 의인지 알고 해야 하는 것이라서 이건 모르거나 습관적인 것이거나 그런 것은 하지 말아야 하기도 합니다.

아는 것이 한가지이면 그 한가지를 하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몰라서 못한다고 하면 되는 것이라서 너무 복잡한 모든 행위나 관레를 다따라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자기 중심에서 스스로 판단하게 하기 위한 것이 예이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에서 자유로움을 얻지 못하고 규율에서 답답함을 느낀다면 예나 규율을 오해한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서 있게 됩니다. 서 있는 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 서 있음의 의미를 이해하면 서 있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서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모를 것입니다. 그대는 오늘 서 있었나요? 아니면 의식없이 흘러보내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채지 못하시는가요?>

 

이후에 한 문장은 호칭인데 임금의 부인을 어쩌고 하는 것은 지금은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다만 호칭은 중요합니다. 우리나라가 아직 예를 정해가는 시대이지 정해진 시대가 아니라서 대통령을 이름이나 불러주면 다행인 시대이니 굳이 왕이나 왕의 부인을 존칭하거나 뭔가 다르게 불러야 하는 것은 내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신분이라서 신분을 호칭으로 하는 것은 안됩니다. 신분따위의 어두운 과거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다만 도올이 말한게 있는데 이렇습니다.

-단지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자기에게 가까운 사람일수록 남에게 낮추는 것이 예의라는 것이다. 내가 어릴때만 해도 아버지를 윗 어른에게 얘기할 때 "제 애비는 ....."하고 말하는 것이 예의 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란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나한테 얘기하면서 "무슨 자字 무슨 字자께서는..."하고 운운한다.

어디에서 배워먹은 습속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양아치 영화의 그릇된 말투를 배운 것 같다. 회사에서도 사원이 사장을 남에게 얘기할 때는 "저희 사장은...." 해야 옳다. "저희 사장님께서는 ..."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튼 양아치 영화나, 양아치 연속극 때문에 우리나라의 윤리가 다 망가져버렸다. 양아치습성을 배워 자기 가까운 사람을 최고로 올리는 그런 말버릇들은 좀 고쳐주었으면 좋겠다. 관청에서조차도 그런 윤리를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나치게 엄격할 필요는 없지만, 나에게 가까운 사람들은 타인에게 낮추어 말하는 것이 예의라는 원칙을 이해하고 상황에 맞추어 대처하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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