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고전

미자

제라울 2020. 10. 4. 14:25

미자편

 

미자는 떠나가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공자왈 "상나라에는 어진 사람이 셋이 있었다."

 

-상나라에 이 세 사람뿐이겠어요 어진 사람인 이들을 그냥 강조하고자 하는 말이겠죠

상나라나 하나라를 자기들의 역사로 만드는 것이어서 그게 그다지 탐탁지는 않아서 이런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평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려오는 이야기들의 신빙성도 그다지 신뢰를 못하겠고 일부로 전승하는 것이고 의도가 있지만 그것이 지금은 그다지 유효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들을 추켜세우는 것이 이런 사람을 추켜세워야 상을 친 주나라의 정당성이 확보되기도 하는 논리이겠죠

아무튼 이들 셋이 모두 왕족인데 미자는 상나라왕 주의 형이라고 하고 기자는 숙부이고 비간도 숙부라고 합니다. 왕의 친척이 모두 인자하다고 하는 것이 좀 지나친 것도 같은데 하다 보니 그리 된 것도 있을 것인데 이들을 추켜세우면서 상나라 말의 임금인 주를 더욱 나쁜 놈으로 만들고 상나라를 친 주나라나 주, 무왕을 정당화하는 것도 되겠죠-

 

노나라 유하혜가 세번 사사(법무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세 번 다 파면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대는 왜 이 나라를 떠나가지 않는가 ?" 하니

말하길 '곧은 도로서 사람을 섬기다보면 어디인들 세 번 정도 내침을 당하지 않겠소 도를 구부리며 사람을 섬길 거면 굳이 부모의 나라를 떠날 필 요가 없소"

 

-도에 사람을 섬기는 것은 없는 것인데 이미 도가 구부려진 것 인데 왕을 섬긴다는 것은 예외가 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그 시대의 사회적인 암시이고 편견이겠죠 도를 하는데 벼슬이 오르든 내치든 무슨 상관이라고 무엇을 보고 도를 행하는가가 있는 것이지, 앞의 죽이거나 나라를 떠나거나 이런 것과 비교하면서 유하혜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말하길 "계씨만큼은 내가 대우할 수는 없고 계씨와 맹씨의 중간 정도는 대우할 수 있다."

그 후에 여러 일이 있은 다음에 다시 말하길 "내가 늙어서 쓸 수 없을 거 같다."

그러자 공자가 제나라를 떠났다.

 

-유하혜는 떠나지 않았는데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기용되기를 바라는데 도를 굽힌다는 위의 말에 해당할지도 모릅니다. 써주기만 하면 어디서든 하겠다고 비난받을 직을 하죠 이런 욕됨을 참는 공자의 의중이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를 변호하기 위해 나중에 맹자는 유하혜를 조금은 폄하하는 말도 하는 듯도 하고요

이런 편집을 하는 것도 미자 편을 쓴 제자들이 사상적인 고민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제나라에서 미녀와 악사들을 노나라 왕에게 보내었다.

실권자인 계환자가 그것을 수락해서 받아들이니 노나라 왕은 미녀와 놀면서 삼일을 조회를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공자가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주유하게 된 계기를 제나라가 보낸 미인계에 왕이 놀아나는 것을 보다 못해 떠난 것으로 쓰여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떠난 것은 아니겠죠 그간의 사정이 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떠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되긴 합니다.

왕이 미녀와 놀다가 일하지 않는 것이면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것이기도 하겠죠. 이건 지금도 그러합니다. 대통령이 여자랑 놀다가 일이 잘못되면 당연히 탄핵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선 공자는 앞장에서 말하듯이 자신이 떠나네요 왕을 교체하거나 자신이 왕이 되거나 하지는 못하는 좀 답답한 인간으로도 보입니다.

그러면서 상나라를 치고 지가 갑자기 하늘의 정통성이 있다는 사상을 맘대로 만들고 세상을 속이는 천자가 되는 짓을 한 주왕이나 무왕을 숭배하는 듯이 말하기도 하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투사일까요?-

 

초나라의 미친놈인 접여가 노래를 부르며 공자의 앞을 지나갔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 독이 쇠잔해 졌는고 지나간 일은 따질 수 없고 오는 것만 오직 따라갈 수 있는 것이거늘 그만해라 그만해라 지금은 정치를 하는 것은 위태로울 뿐이다."

공자가 수레를 내려 더불어 대화하고자 하였지만 빠르게 피하며 사라져서 만나지 못했다.

 

-미친놈인지 미친 척한 놈인지 접여가 노래라고 하면서 공자를 비꼬는 것이죠 이 접여는 유명한지 장자에도 비슷하게 공자를 비꼬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굳이 광인이라고 하면서 미친놈이 아닌 좀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는데 초나라 사람인데 노나라 사람인 공자를 잘 아는 듯이 말하고 거기에 국제정세나 정치적인 사정이나 다 아는 듯이 합니다.

지나간 것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 오는 것을 신경 쓰라는 듯이 말하면서 정치하지 말라고도 하니 말의 앞뒤가 모순입니다. 내가 잘못 해석하는 것인가? 좀 의아한데? 그냥 따라만 가라는 것일까요? 따라만 가라는 것이 남 덕이나 보라는 것인가요 다른 사람들이 좋은 세상 만들면 그냥 은근슬쩍 나오면 된다는 것인가요

아무튼 그러한 지식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에 관심이 너무도 많은 것이 될 것인데 그저 소문만을 듣고 떠들면 그냥 비천한 미친놈일 뿐이고 뭔가 아는 것이 있어서 떠들면 분명 정치하지 못해서 억울한 것을 이런 식으로 남 비꼬면서 사는 역시나 별 볼 일 없는 놈일 겁니다.

그냥 은거해서 산다면 이름도 없고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고 아무도 모를 것인데 이렇게 유명하면 그만큼 설레발을 친 것인데 그 정도면 열심히 애쓴 것입니다. 아닌 척 안 하는 척하면서 더 하는 듯한 이런 건 사기입니다. 별 똘아이 같은 놈을 다 보겠네요

지금 같은 민주주의에 한 표가 우습다고 선거도 안 할 인간일 겁니다. 시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정치하는 것들이 지 맘대로 해버리는 것인데 저런 자세가 지금도 유효할지 모르겠습니다.

대화도 회피합니다. 이 세상에 대화를 같이 못할 인간이 젤 짜증 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선 봐줄 만한 게 없네요

지금도 대충 뭐 안다는 듯이 세상이나 사회를 비꼬거나 욕하거나 하면 역시나 미친놈이고, 뭔가 의도하거나 나름의 정합성을 가지고 한다면 그 사람의 의지가 있을 것이겠죠-

 

장저와 걸닉이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가 지나가다가 자로에게 나루터를 물어보라고 보냈다.

장저가 말하길 "저기 수레 고삐 잡고 있는 자는 누군가?"

자로 왈 '공구입니다.'

장저 왈 "노나라의 그 공구인가?"

자로 왈 '그렇습니다.'

장저 왈 "그럼 나루터를 더 잘 알겠지"

자로가 다시 걸닉에게 물었다.

걸닉 왈 '그대는 누군가?'

자로 왈 "중유입니다."

걸닉 왈 '그 노나라 공구의 무리요?'

자로 왈 "그렇습니다."

걸닉 왈  '천하의 모든 것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것인데 누가 바꾼단 말이요 사람 피해 다니는 선비보다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어떻소?'

그러면서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씨앗에 흙 덮는 일만 한다.

자로가 돌아와 고하여 말하니 공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길 

"새와 짐승이라면 함께 하지 않았을 것인데 내가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굳이 내가 바꾸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농사나 하는 자들이 아는 것도 많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 정보를 그렇게 쉽게 알 수도 없을 것인데 누구라고 하면 외국인인데도 다 압니다. 소문이 전파된 걸까요? 그렇다면 더욱 아닌 거죠 소문을 사실이라고 안다면 기본적인 지능이 문제가 있는 것이니까요 소문과 사실 사이의 일치를 알아내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실수하니까요

일부러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면서 능글거리면 놀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나루터를 알려주지도 않고 '지가 더 잘 알 걸?' 하면서 비아냥입니다. 이런 심뽀인데 은거인이거나 뭔가 대단한 사람으로 묘사하면 참말로 어이없기도 합니다. 이런 자들이 그리 대단할 게 뭐가 있나요 이상한 성질머리인데요

그런데 사람을 피해 다닌다고 비판합니다.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 여긴 이래서 안되고 저긴 저래서 안 된다면서 떠도는 것을 말하나 봅니다. 그런 식이면 일할 곳을 찾기는 글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이 변하고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이 된 건 힘들게 애써오고 몸 바치고 혼 바쳐서 어떻게든 변화시키려는 자들에 의해서입니다. 은거하고 다 아는 듯이 비아냥이나 대는 사람이 지금의 이런 세상을 만든 건 아닙니다. 밭 갈고 씨 뿌리고 농사짓는 것도 누군가의 노력으로 알아낸 것인데 그건 어떻게 받아들이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알아내기 위한 노력을 후려치는 것이 또 이들의 하는 짓이죠 성인이 그냥 알아냈다고 하니까요 농사는 신농이 아니면 누구가 했다 식으로 그냥 그 사람은 원래 신의 아들이나 성인이나 그런 것이니 다 알고, 다 할 줄 알아서, 우리에게 베푼 거라고 하는 노예근성을 드러냅니다.

그 당시엔 저런 것이 첨단의 농사법일 것인데요 그냥 수렵이나 하고 살던가 해야지 씨 뿌리는 것에 엄청 공들이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불편함이 없으니 이상한 감수성이죠 세상을 피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피하는 것이고 어디까지 피한다는 계산을 한다면 이미 세상을 피하는 게 가식이 된다는 것이 됩니다. 피해봐야 세상인데 때 되면 죽을 것이니 그전에 이상한 짓하며 세상에 따로 사는 듯한 기만은 그만해야 할 것인데요 -

 

자로가 따르다가 뒤쳐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지팡이 짚고 삼태기를 맨 노인을 만났다.

자로가 물었는데 "혹시 우리 선생을 보지 못했습니까?" 하니

노인이 왈 '팔다리는 부지런히 움직이지도 않고 오곡을 분간도 못하는 사람을 선생이라고 하는가?'

하면서 계속 김을 맨다.

자로가 두 손을 맞잡고 계속 서있으니 하던 일을 멈추고 자기 집에서 자게 했다.

닭을 잡고 기장을 먹이고 두 아들을 만나게 했다.

다음날 공자에게 와서 말하니 

자왈 " 은자구나"

자로한테 돌아가서 다시 만나보라고 하니 이미 다른 곳으로 가고 없었다.

자로 왈 "누군가 하지 않으면 의로움은 없을 것이고 나이 듦과 어림의 구분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임금과 신하의 의로움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몸을 욕보이지 않으려고 큰 뜻을 어지럽히기도 하는데 군자가 일하려고 하는 것은 의로움이 행해지게 하고 싶어서인데 지금은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우리도 안다."

 

-또 은자라고 하는데 하는 행동은 유교적인 배움을 한 사람처럼 합니다.

길을 잃었으니 데리고 가서 재우고 먹이고 닭까지 잡는데 손님에 대한 예의가 가상합니다. 이걸 어찌 알았을까요?

길 잃은 사람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게 한건 군자 즉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알게 한 것입니다. 다르게 알게 하면 얼마든지 다르게 행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어디에선 손님에게 아내를 내어주는 풍습도 있다 합니다. 어떤 식으로 손님을 대할지는 어떻게 알게 했느냐입니다. 무엇이 옳다기보다 무엇을 무엇으로 알게 했느냐 그것이 사람들의 판단기준이고 행동원칙이 됩니다. 거기에 옳고 그름은 없습니다. 옳은 거라고 알게 한 그것이 있습니다.

본인들은 문명의 이기나 가르침을 잘도 따라 하고 더 잘하고 있으면서 그런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을 비웃는 것은 똑똑한 척을 하지만 어리석음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죠

거기에 비판하는 방식이 농사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팔다리를 움직여야 한다거나 오곡을 분간한다거나 이건 농사짓는 것을 말합니다. 언젠가 공자가 농사짓는 것을 묻는 번지라는 제자를 비꼬는 것이 있는 게 그것이 여기에 이렇게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곡해서 되돌아오죠 항상 이렇게 내가 내보낸 것은 돌아옵니다.

결국 이 노인도 농사라는 것을 이데올로기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요? 태어나서부터 저절로 안 것일까요? 농사를 중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정치인들이 시민들을 길들이고 욕구를 제어시키려고 하던 일종의 정책입니다. 아니면 남의 것을 빼앗거나 이동하면서 여기저기 약탈이나 이동하고 불 지르면서 동물 잡고 이런 것은 나라의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게 됩니다. 그저 부족이죠

통제는 항상 거기에 있게 하기 위한 방법을 써야 하고 누구인지 항상 호명되어야 하고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걸 바탕으로 나라의 계획을 세울 수 있고 관리한다는 이유로 보호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그 시작이 농사짓게 하고 동물을 기르게 하는 것을 했는데, 자기가 아는 것은 그럴만하고 옳은 것이고 남이 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고 헛짓이고 이러면 자신이 살 궁리만 하는 정도인데 남을 말하는 분수를 넘는 것을 하는 것이 됩니다. 기본적인 예의 원칙을 모르니 대화도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마지막에 누군가 하지 않으면 의로움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인데 누군가 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 부분을 내가 장황하게 길게 말한 것입니다. 이다음의 장유나 군신 간의 일은 시대적인 오해도 있는 거라서 그다지 할 말은 아니지만요-

 

일민(은거한 사람)은 백이와 숙제와 우중과 이일과 주장과 유하혜와 소련이 있다.

자왈 "뜻을 굽히지 않고 몸이 욕되지도 않은 사람은 백이와 숙제이다.

유하혜와 소련은 뜻을 굽히기도 욕되기도 했으나 말이 인륜에 맞고 행동이 사려가 있으니 이것으로도 된다.

우중과 이 일은 숨어 살며 말은 거침없이 하면서도 몸이 욕되지 않았고 그만두는 것도 적절했다."

이렇게 말하시곤 '난 이들과는 다르다. 하려고 하는 것도 없고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없다.'

 

-뭔가 앞에서 한 말들을 변명하듯이 마무리 짓고 있는 듯한 설명입니다.

난 이들과 다르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말하니까요 자신에 대한 말을 한다고 변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누구를 평가하면서 자신은 다른 듯이 말하니 문장의 구조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효과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것도 수사법이니까요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인간에 대한 성찰 자체가 부족한 것으로 자기를 알기도 벅찬 것인데 남을 말하면 교만한 것이 됩니다. 사람은 마음이 있어서 외부에서 판단하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더욱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죠 이런 것을 서로 알아야 대화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이걸 모르고 하면 인간의 수준이 형편없다는 것이 되니까요

그래서 그런 것을 전제하고 그러면서도 평가하면서 의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을 서로 전제되어 주어야 대화가 되죠

여기처럼 과거인들을 이렇게 저렇게 평가하면서 말하는 것이 고전들에게 많습니다. 백이숙제는 단골이고요 그런 식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이데올로기를 만든 거죠 "이래야 한다. 이런 것이 옳다"고 하기 위한 것으로 의도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말입니다.

이걸 진짜 백이숙제가 저런 사람이라고 들으면 말에 대한 이해부터 부족해서 난감한 사람입니다. 저들의 의도를 알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게 누군가를 말하면서 그들이 사람들에게 암 시주고 훈습되게 하려는 그걸 알아야 하죠 

그리고는 공자 스스로는 다르다면서 그래야 하는 것도 없고 그래야 하지 않을 것도 없다고 합니다.

이건 공자만 그러한 게 아니라 예를 든 앞의 사람들도 그럴 거 같은데 자기만 그렇다는 듯이 말하니 좀 웃깁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러는 경우는 정말 보지를 못했습니다.

내가 강조한 것 중에 오로지 하지 말라고 하고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것을 지극히 꺼려한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과거의 위인들 중에는 이런 것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가끔 이렇게 있습니다.

물론 백이숙제가 기어코 굶어 죽는 것이면 오로지 하려고 하는 것이라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는 못한 것이 됩니다. 한쪽으로 편중됨이 심한 거죠

비난을 받아도 옳다고 여기는 것을 끝까지 주장할 것이냐 해보고 안될 거 같으면 다음을 기약할 것이냐 하면서 이런 것을 몸을 욕되게 한다 안 한다라면서 고민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그래도 되고 안되어도 된다고 하면 비겁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도가 행해지만 나오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는 식이기도 하니까요 도가 없을 때 몸이 더러워져도 도가 깨끗해지는 세상을 위해 나서야 하는 것인데 그래야 도가 언젠가는 깨끗해지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저절로 깨끗해지면인지 남이 하면 무임승차할 것인지 도가 행해지면 벼슬하겠다는 대가리 굴리는 소리를 합니다.

이러면 골치 아프게 됩니다.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냐 고민하죠

누구나 무가무불가라서 그래도 되고 그러지 않아도 되고 그렇지만 난 이런 입장을 고수 하겠다고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목숨을 내놓게 되고 아무리 비난받고 고약한 지경에 처해도 참고 인내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의 과정을 거친 결단이어야 뜻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空공과 같은 전제도 없이 "자신이 의지가 있다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면서 떠들면 웃기는 놈일 뿐이죠

무가무불가를 지나지 않는 결단은 고집이지 의지가 아닙니다. 내가 여러 곳에서 공자를 욕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했지만 공자를  싫어하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것인데 그건 이런 무가 무불가라는 전제가 그에게도 있고 나에게도 있으니 의도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서로 간의 전제를 알면 상대의 말과 행동에 참견할 것은 아니게도 됩니다.-

 

태사 지는 제나라로 가고, 아반 간은 초나라로 가고, 삼반 료는 채 나라로 가고, 사반 결은 진나라로 가고, 고 방숙은 하내로 들어가고, 파도 무는 한중으로 들어가고, 소사 양과 격양은 바다로 갔다.

 

-말이 어려운데 대개 음악을 연주하는 직급이나 연주자를 말하는 것이라서 일일이 뭐라고 의미를 밝히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다들 나라를 버리고 나갔다는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 서글픔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가 없다고 다 가버리는 것인데 도가 없으면 숨으라고 하더니 여기선 이렇게 반대의 의사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도가 없어도 누군가는 시민을 위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배가 침몰해도 선장과 승무원은 남아서 손님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의사는 환자를 보살펴야 합니다. 정치인은 한 사람의 시민이라도 편안함을 위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선서나 각오 없이 그 위치에 있다면 그건 돈을 위해서이거나 별다른 생각 없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해도 끝까지 남아서 시민들을 한 명이라도 돌봐야 하는 것인데 지들이 먼저 도망가면 어쩌라는 것인가

돈 있고 권력가진 자들이 좋으면 이 나라에서 이득을 챙기고 힘들면 나가서 편하게 살 궁리라면 애초 돼먹지 못한 심뽀입니다.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하는 것이긴 하죠 쉬운 길을 선택하고  그런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나라와 시민을 책임지고 또 그러기 위해 일한다면서 선출된 자들은 그런 의지도 없는 것이면 곤란합니다. 

그나마 성숙이 된 사람이 정치하고 도를 펼치는 것인데 일반시민과 다를 것이 없으면 그냥 시민이지 권력과 돈을 가지며 사회의 지도층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좋은 세상은 그냥 오진 않겠죠 오라고 준비하고 실행하면서 애씀이 언젠가 기어코 오게 되게 하겠죠-

 

주공이 노공에게 말하였다.

"군자는 친족을 버리지 않는다.

대신들이 써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게 하고,

오래 함께 한 사람은 큰 사건이 아니면 버리지 않고

한 사람에게 너무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아라"

 

-주나라의 주공이 노나라에 봉해져서 가야 하는데 자신이 못 가니 아들 백금을 보내면서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노공이 백금이죠 

노나라가 주왕이 봉해진 나라라서 공자가 주왕을 그렇게도 숭배하기도 또 그 자긍심이 있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공자처럼 사람이 누구나 이렇게 가슴에 좆 대가리 하나씩 품고 기대면서 사는데 뭔가 품고 있는 기준이 있죠 지금은 종교적인 뭔가를 그렇게도 의지하지만요

군자는 친족을 버리지 않는다고 번역하는데 이런 번역이 오래도록 해온 것입니다.

施시, 이 글자인데 이걸 버린다고 해석한다고 합니다. 다른 곳에선 베푼다로 해석하려고도 합니다. 지금은 이게 더 좋아 보이기도 하나 봅니다.

과거엔 친족을 버리지 않는 봉건적인 사고가 좀 있어서 친족에게 베풀고 같이 권력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지금 사람들은 알게 되면서 저 글자를 다르게 해석하려고 하나 봅니다.

그래서 군자는 친족에게 베풀지 않는다로 해석해서 그렇지 않는 것으로 의미를 바꾸려고 하는 것일지도요

당연히 새롭게 해석하려는 의도가 더 나을 것입니다. 원래의 의도가 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대가 변해서 다르게 해석해 가려고 해도 되겠죠 

대신들이 원망하지 않게 하라는데 이건 그리 쉽지 않는 것입니다. 이 대신에게 잘하면 저 대신이 시기하고 저 대신을 잘하면 이대신이 시기하니까요 왕에게 잘 보이려는 짓을 하지 않을 대신이 있으면 좋지만 그런 대신을 시기하는 또 다른 대신이 나오게 되는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원망함이라는 것이 인간의 깊은 욕구라서 이걸 대처 하는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좋은 대신을 뽑아야 하지만 인복도 자기의 운명이라 수월한 것은 아니고 이런 것을 신경 쓸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사람을 아는 축에 든 거라서 우선 본인이 현명해야 하죠

그다음의 설교는 내용이 쉽죠 그냥 넘어갑니다. 아마 노나라가 서서히 무너진다고 보니 공자가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왕이 잘했어야 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신하들이 지들끼리 개판을 만들어도 결국 일차 책임은 지도자가 되는 것이니까요-

 

이후 한 문장은 주나라에 여덟 선비가 있다고 하면서 이름을 죽 대는데,

 

-어쩌라고......

상나라 입장에선 이 쉐끼들은 원수일 것인데 이런 것을 기린다면서 논어라는 책에 쓴 걸 보면 좀 저질이다.

주나 무왕이나 문왕이나 이쉐끼들도 원수다.

내가 상나라를 변호할 이유는 없진 않지만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침략한 당나라의 장수들을 잊지 않기 위해 이름들을 기억하는 주문형식의 것이 있는데 이것을 주문이라거나 신장들이라거나 하면서 외우면서 가피를 얻고 복을 비는 돌대가리들이 오래도록 내려왔고 지금도 어떤 종단에선 열심히도 외운다.

원수가 시간이 지나면 신이 되는 것이 화가나지 않거나 불편함이 없다면 내가 할말은 없다. 감정이 다는 아니니까

그러면서 이또히로부미인지 뭔지 하는 세끼도 시간 지나서 감정이 사그러지면 우리를 수호하는 신장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토요토미히데요시카토키요마사고니시유키나가

이걸 주문이라고 외우게 하면 우찌 될까나-

 

 

 

미자편은 짧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부러 이야기를 말하듯이 드라마틱하게 만든 것인데 왜 이런 것일까요?

은거인들의 공자 비판과 그것에 대한 공자의 해명과 노나라가 쇠퇴하는 것에 대한 걱정과 주왕을 등장시켜 과거를 회상하고 마무리합니다.

아주 티 나게 글을 편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이 공자 생전의 글이 아니라 사후에 한참이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이 됩니다.

공자를 이용해 세상에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누군가가 공자의 이름을 빌려서 꾸며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로만 나오는 것도 이상하고 분명 이야기처럼 구성되어 있고 공자를 비판하는 듯이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닌 것이라서 분명 고의적인 편집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주 좋죠

공자가 이런 말 했다의 사실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공자를 이용할 수 있다는 그것이 우선 좋죠

공자의 위상이 이미 상식적인 어떤 권위라고 할지 우상이라고 할지 그런 작용력이나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서 공자를 이용한 우화를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걸 잘한 것이 장자인데 그래서 이 정도의 시기쯤에서 여기저기 여러 편린들이 돌아다녔을 수도 있습니다.

공자왈 이라면서 이런 편린 저런 편린들이 편집되어서 돌아다닌 거죠 

분명 순자가 인용한 공자왈하고 맹자가 인용한 공자왈의 내용이 논어와 완전히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생각보다 공자왈에 해당하는 글들이 난무한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이젠 공자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다고 하는 사실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공자를 이용해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뜻을 어떻게 관철할 수 있을지의 전략적인 사고를 한 정도의 진보는 했다고 봅니다.

이런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글을 읽으면 무조건 공자가 말했다고 일말의 의심도 하지 못하는 대가리를 가지고 있지만 항상 차이를 드러내야 하는 것인데 자신의 감정과 사고에서 한 발을 떼어서 보면 다른 것이기도 하다는 연습을 해와야 합니다.

공자의 말이 사실이라서 중요한 게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이라도 만들고 꾸며서 그러한 말을 어떻게 이 세상과 사회에 이롭게 적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 더 나간 생각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죠 

훔 내가 책을 낸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고 난 그런 말 하지 않았다고 한지도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데 누가 나를 전략적으로 써서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그다음을 일으킬 의도성을 가지면서 인용할 생각을 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기감정이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한 비루한 의도로 쓰지 않고요

그래서 말하는 것이죠 사실이 아니라 의도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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