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 편
여름엔 내가 더위에 약하다 보니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집중도 안되어서 게으르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늦어지게 되었죠
찬바람이 차차 불어오니 서서히 시작해 볼까 해서 해봅니다.
이렇게 인문이나 글공부를 자꾸 하고 또 철학적인 사고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많아서 이렇게 머리만 쓰면 자천이 될 거라고 볼 수도 있는데 전혀 그럴 수 없습니다. 인문 자체가 행동을 전제한다는 것부터 알아야 하고, 거기에 우리는 성취해야 하는 것이 있어서 학원이나 강단에서처럼 공부하면 말짱 헛것이 됩니다.
막말로 호흡도 해야 하고 행공이든 무술이든 호수든 해야 하며 그렇게 몸의 변형을 해야 되거나 하려고 하는 목적으로 이러한 인문적인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쪽짜리 공부라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린 강단의 박사들이나 교수들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하지 그들보다 대충 하거나 부족하게 해서는 이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각오도 해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지 말이 이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천도 전문분야이고 아무나 못하는 것이라서 망상에 빠진 사람도 많은 곳이지만 그래서 진정으로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이 희소하게 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럴 결의가 없으면 그냥 구경꾼임을 명심하고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본문을 보겠습니다.
양화가 공자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런데 공자는 만나려고 하지 않아서 돼지고기를 보내었다. 그에 답례를 해야 해서 양화가 없는 틈을 보아 방문하려고 가는데 그만 도중에 만나게 되었다.
양화가 공자를 부르며 "이보시오 내가 그대와 대화를 하고 싶소 그러면서 말하길,
보석 같은 능력을 가슴에 품고서 미혹한 나라를 그대로 두는 것이 어짊이라고 할 수 있소?"
공자왈 "아니오"
'일하기를 좋아하면서 때를 자꾸 놓치는 것을 앎이라고 말할 수 있소?'
"아니오"
'해와 달이 흘러가기만 하고 세월도 나와 함께 하지 않는 거겠죠'
공자왈 "그러죠. 내가 장차 벼슬을 할 것이오"
-양화가 계씨들의 가신이었다가 이들을 때려잡고 정권을 잡았다가 다시 퇴출된 자입니다. 일종의 혁명을 일으키는 자인데 이런 일에 공자가 함께 해주길 바라는 것이죠 공자도 계씨들의 횡포를 싫어했으니까요
역사가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건 내가 잘 모르겠고 지금으로선 알 바도 아니고 왕을 가지고 노는 계씨도 나쁘지 않고 혁명을 하겠다는 양화도 좋은데 그건 왕권이라는 정치 행태가 맘에 안 들어서입니다. 신분제도나 적통이나 이런 상황에서 누가 옳다고 하고 누가 역적이고 그런 건 애당초 그 정지 체계가 잘못된 상황에서 평가하기가 귀찮습니다.
이런 체계가 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참으로 어리석다고 하겠습니다.
양화가 하려는 것이 나쁘진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해결하려는 그 의지는 가상한 것이죠
그런데 이런 정치적인 인물들이 하는 짓이 자신은 옳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나쁜 짓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면서 자기 욕심에 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대개는 정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정말 이런 대가리 나쁜 무지함은 대책이 없습니다.
분명 우리나라도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무지에서 자기가 옳다고 철석같이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설명이나 대화가 가능하지 않는 것인데 이것도 하나의 현상이라서 그런가 하고 그거 역시도 변해가는 것이라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내버려 두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기도 하니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어야 하죠
양화가 단순히 자기가 무조건 옳고 대가리 나쁜 자는 아닌 듯이 나옵니다.
말하는 것이 상당히 은유적이고 돌려 까는 것이 힘으로 밀어붙일 듯한데 대단한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공자도 만나기 싫어하는데 이건 공자가 우유부단함이 있는 것이라서 그런데 나라가 잘못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행동으로 과격하게는 못하는 유약한 문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게 허점이 되어 여기서 말로 설복당하는 것이니 길거리에서 테러당하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 연출됩니다. 약점이 있으니 그렇게 당하게 되는 것이죠
거기다 주인 없을 때 몰래 방문하려는 꼼수를 부리다가 당하는 거라서 공자를 상당히 곤혹스러운 지경까지 몰아붙이는데 이런 내용을 만들어서 유포하는 이들의 의도가 뭔지 재밌습니다.
가슴에 보석을 숨긴다거나 일을 하려고 하면서 어짊을 주장하고 때를 놓친다거나 이건 공자를 비웃는 것이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짊을 강조하면서 일을 안 하려는 것도 아니고 하려고 하면서 숨어 사는 것이나 때를 놓치는 것이나 가르치는 사람이 앎의 부족을 드러내면 앞뒤가 안 맞는 행동 아니냐는 것인데 분명 논리적인 비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자가 알았다고 벼슬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정할 건 하는 또 합리적인 모습을 공자가 보여줍니다.
여기서 땡깡부리고 고집스럽게 그래도 아니라고 하는 감정적인 모양을 보이면 정말 인간 이하의 평가를 받게 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합리적인 비판에 감정으로 대하면서 이중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논어에서 그렇게 욕하는 소인이나 하는 짓이죠 대개의 인간들이 이럴 것이긴 합니다. 자기가 주장하거나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비판하면 그 행동이 뻔한 것이죠 그런데 그렇지 않아야 뭔가 좀 하는 사람이 되죠.
자기가 무엇을 주장해 왔고 무엇이 옳다고 해왔는지를 잊어버리는 것처럼 별 볼 일 없는 인간도 없죠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한다거나 남을 지도하거나 인도하는 위치에 있다면 답이 없겠죠
여기서 일반적으론 양화가 자기가 누구인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큰 일을 하려는 것인지 자기 자랑이나 주장이나 그런 관점에서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공자를 돌려 까면서 세월이 그대를 도울 거라고 보느냐 그렇지 않을 거라는 시적인 표현까지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양화는 지식인 정도가 아니라 현인입니다.
이런 역사적으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도 못하는 역적 같은 사람이 말하는 것이 너무도 고상합니다.
이 정도의 인격이라면 함께 행동할 수 있겠죠.
정말 세상에 사람이 없으니까요-
자왈 "성품은 서로 가까운데 습관에 의해 멀어지게 된다."
자왈 "오직 상지와 하우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上知상지, 下愚하우, 지혜로운, 어리석은.
성이 가깝다. 비슷하다. 같다. 하는 것이 선천적으론 또는 본성은 그렇다는 식으로 보면 계몽주의 시대의 로크의 인간이 빈 서판이라고 백지상태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게 되는데 이런 건 너무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습관이나 학습이나 환경의 영향으로 달라지고 멀어지고 차이나고 하면 역시 계몽주의처럼 됩니다.
인간은 그렇게 백지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환경이나 교육으로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단순하게 이렇다 저렇다고 보는 것은 언제나 조심해야 하는 멍청한 단정입니다. 결코 그렇게 말하는 것은 도를 배우는 사람이나 뭔가 학문을 하는 사람은 해서는 안 되는 짓입니다.
그다음이 지극히 똑똑한 자나 지극히 멍청한 자는 바뀌기가 어렵다고 하는 말입니다. 옮겨지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말을 했는데 이것도 어느 정도 단정이라서 그런데, 절대 안 된다는 식의 말은 아니니 그냥 어려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사실 문맥상 양화에 대한 말 다음에 이런 말을 일부러 편집한 것도 같아서 양화를 비판하는 듯도 하고 우선 중요한 게 나라의 백성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정부를 뒤엎고 지들끼리 잘났다고 옳다고 난리 치는 짓은 나라의 힘만 빠지거나 돈 낭비 에너지 낭비이고 효과도 떨어지는 것이고 자기들의 욕망 분출이지 혹세무민으로 시민까지 참여시키면서 진흙탕에 집어넣는 못된 짓이고 그런 것이 시민에게는 그다지 이득 될 것도 없고 마음에 다가올 게 없다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일 수도 있는데 너무 나간 걸까요?
이것을 또 본성이 선하니 아니라니 하는 식으로 본성론으로 가면 더욱 복잡한 이론이 되는데 그렇게 힘 빠지는 논리를 할 필요는 없는데 사고를 진행하다 보면 결국 그런 것을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 해결 볼 건 해결 봐야 하겠죠
본성이 선하냐고 하면 그런 선이나 아니다로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것으로도 되는 것인데 어느 것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 많냐가 중요합니다.
사회 구성원이 있을 것이고 그 구성원들이 좀 더 폭력적일 수도 더 선할 수도 더 탐욕적일 수도 있는 것인데 태어나서부터 이런 기질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생을 이어져 오는 것이어서 살아가면서 습관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인간성이나 양심이나 마음이나 심성이나 그런 것은 살면서 습관 되고 훈습된 것이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거죠
얼마나 오랜 세월 구축된 욕망이겠어요 그래서 그것을 하루 아침에 또 다른 것으로 바뀔 수도 없는 것이죠
시간이 걸리는 것인데 이중에 상달한 지식을 쌓고 오랜 노력으로 어느 이상을 간 사람이나 오랜 세월 어리석음을 만들고 못된 성향을 만든 사람은 그만큼 오래 또 힘들게 변할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교육이 중요합니다. 당장의 변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십 년이고 수생을 위해서 장기적인 기간을 두고 봐서도 교육은 중요합니다. 도덕이 중요한 것이죠
내버려 두어도 저절로 되어지는 것도 있는데 그 과정에서 피해 보는 사람이 너무 많고 필요할 때 필요한 의를 말하고 시비를 판단할 공부를 해야 할 때 해야 하는 것이 성취를 앞당기고 더 많은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오랜 생을 거치면서 현명한 사람이 되었다면 그 생을 사는 동안에 가르침을 받고 좋은 인도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지 생만 산다고 저절로 그리 되기엔 그냥 방치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겠고 된다 안된다를 말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변하겠지만 어떻게? 이건 모르는 것이 됩니다.
나쁜 것은 쉽게 오래도록 배울 수 있고 배움이 지겹지도 않고 싫증 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좋은 것은 그 과정이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니라 싫증 나고 지겨워서 힘든 것입니다. 그 배우는 기간은 나쁜 것이나 좋은 것이나 비슷한 기간을 가집니다. 그 과정이 싫으면 오래 한 거 같고 좋으면 금방 한 거 같아 나쁜 건 쉽게 배운다고 하는데 쉽게 배운 게 아니라 힘들이지 않고 재밌고 해서 시간을 잊어서 그렇습니다.
그럼 나쁜 것은 왜 재밌거나 힘들지 않고 싫증 나지 않느냐고 하면 대세라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다들 그렇게 해서 그것이 당연한 것이니 그렇게 따라 하고 쉽게 하고 누구나 하는 것이 하면서 한다는 것도 잊고 하는 것이 당연해서 거부감도 안 들고 편승하고 무임승차하듯이 그렇게 일어나면서 지나갑니다.
남이 하는 것이면 나도 하면서 재밌고 해야 하는지 알고 쉽게 할 수 있는 환경도 주어집니다.
그러한 대세나 유행이나 상식적인 것이나 일반적인 것이라는 것만으로 수월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하려고 하면 그 저항이라는 것이 너무도 버겁습니다. 내적인 저항이나 외적인 저항들이 다 있는데 이걸 이겨 가면서 홀로 가는 길은 한발 한 발이 모두 힘든 결정이고 집중입니다. 이건 너무도 피로하고 고된 일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나쁜 것은 더 쉽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이것도 상식을 벗어나고 대세가 아닙니다.
지나치게 선하거나 지나치게 나쁜 것은 분명 대세는 아닙니다. 그래서 어려운 길입니다.
에스켈레이터를 타보면 다들 한 줄로 서 있습니다. 이건 남들과 엮이는 게 싫어서지 그게 옳아서는 아닙니다. 한 줄로 서 있는 것이 위험을 준다는 것을 알지만 걸어 올라가는 사람과 엮이게 되고 귀찮은 일이 생기고 그런 것을 외면하려고 그냥 한 줄로 서 있습니다. 그런 것에 내가 다른 위치에 서 있기란 저항이 따릅니다. 그것을 이겨내고 옳은 것이라고 행동하면 분명 그만한 피로와 심력이 소모됩니다. 이런 것을 안 하려고 하죠 대세를 따르는 것이 쉽고 편합니다. 그렇게 습관 되어가면서 그렇고 그런 사람이 되지 남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선 그만한 저항을 이겨내고 해가야 합니다. 그런 성품이 만들어지겠죠
그 중간의 쉽고 편한 게 있고 좀 어려운 게 있습니다. 그런 것이 일상의 우리 행동들입니다.-
공자가 무성에 갔는데 현악기로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자가 웃으며 말하길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네"
자유가 대답하며 말하는데 '예전에 제가 부자가(공자가) 하는 말을 듣기론 군자는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은 도를 배우면 부려먹기 쉽다고 했습니다."
자왈 "제자들아 자유(언)의 말이 맞다 앞에서 한 말은 농담이었다."
-자유가 무성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읍재를 하고 있을 때 일입니다.
그리고 이름이 언인데 자유가 이후에 편하게 쓰게 되어 번역은 자유라고 하지만 공자 당시엔 자유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건 사후에 만들어진 것일 테고 높이는 말이니 공자가 제자를 높여서 자유라고 하진 않았겠죠.
아무튼 마을에 가니 현악기 연주가 들리는데 이 음악이 마을의 농부 같은 천한 것들이 감히 이런 고상한 연주를 하느냐는 식의 말을 한 것입니다.
공자가 놀리기도 한 것이고 이런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군은 군이고 신은 신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음악은 너희들 따위가 할 연주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선 공자도 대가리가 썩은 자이기도 합니다.
근데 자유가 여기서 욱하는 성질을 부립니다.
부자라고 더욱 높여서 쓰여있긴 한데, 니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냐고 대들죠
군자는 도를 배우면 사랑을 하고 소인은 부려먹기 쉽다고 말이죠
易使 이 한문을 번역한 것인데 부려먹기 쉽다는 것이 좀 이상한 말이긴 합니다. 다루기 쉽다거나 부리가 쉽다거나 그런 것인데 뭔가 아는 자라야 더 부리기 쉽다는 것으로 들려서 참 요상한 말입니다.
여기서 관점자는 제삼자입니다 군자를 가르쳐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소인은 가르쳐서 부리기 쉬운 자로 만드는 그 군자도 아니고 소인도 아닌 제삼자의 시점입니다.
사실 이런 자가 정말 증오스러운 자들입니다. 자기는 예외로 두거나 다르다는 것이거나 다 안다는 것이어서 일종의 신의 관점이고 내려다보는 거만함이고 그런데 이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권력주의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들인데 자기 성찰이 덜된 걸 알아야 하는 자들이죠
이런 인간들이 도를 배우는 곳에서도 있고 여기도 있네요 그리고 주변에도 많이 보게 됩니다. 권력에 관심 있고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 치고 이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죠 양화마저도 이런 시점을 보이지는 않았죠 그래서 양화가 더 위대한 사람입니다.
적어도 양화는 시점을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있는 것이니까요 정말 그런지는 모르지만요 ㅎㅎㅎ
이 시점을 아는 자가 드뭅니다. 이걸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기가 어떤 시점으로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걸 하지 못합니다. 이걸 알면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공자가 이런 자유를 보고 설명할 방법을 못 찾아서 농담이었다고 회피하고 있는 것도 됩니다.
정말 이런 놈에서 이치를 설명하면 이러한 이상한 시점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듣자마자 왜곡입니다.
사람들은 다 시점이 있습니다. 그 시점이 있어서 뭔가 말해주면 들으면서 왜곡이고 뭔가 그 상대가 말을 하면 말하면서 왜곡이고 그리 되는데 이 상대의 시점을 보면서 그것을 교정시키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이런 시점이 있다는 그것부터 납득시키기가 난감하거든요
사람마다 시점의 다양함이 너무도 편차가 심합니다. 다양한 높이와 다양한 거리와 각도가 있어서 찾기도 힘들지만 알려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공산불요가 양화를 이어 다시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공자를 초빙을 했는데 공자가 가고자 했다.
자로가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길 "갈 곳이 없으면 그만두면 되지 하필 공산씨 따위에게 가요?"
자왈 '자고로 나를 부른다면 이유가 있을 것인데 내가 유용하기 때문이겠지 내가 하면 과거 동주처럼 되게 할 수 있다.'
-이 문단은 애매한 게 있습니다.
좌전이라는 역사책엔 공산불요에게 안간 것 정도가 아니라 공산불요를 때려잡은 것으로 나옵니다.
좌전의 내용대로라면 공자도 참 답이 없는 인간입니다.
논어엔 그와는 반대로 공산불요에게 가담하고자 한다고 나오는데 이것이 공자 사후에 편집된 것일 텐데 이후의 문하생들에겐 이런 쪽이 더 좋아 보였거나 이랬으면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맹자 계열의 후인들이 편집한 거라는 말도 있는 것 같던데요 맹자가 혁명을 지지하는 듯한 성향이기도 하니까요)
어설픈 것들이 역성혁명을 죽일 듯이 보고 백안시하는 것으로 관념 형태를 만들어 세뇌시키고 길들였지만 분명 왕이 잘못이 있으면 끌어내리거나 잡아 죽인 게 과거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러했죠 지금도 지도자가 잘못이 있으면 당연히 시민의 반발을 살 것이고 그에 따른 법적인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고요
이것도 공자는 극단적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죠 나라가 맘에 안 들지만 그렇다고 확 뒤집을 수는 없다고 볼 수도 있고 그런 과격함으로 해결될게 아니라고 볼 수도 있고 이런 혁명을 한다지만 그래 봐야 그 인간이 그 인간이라고 할 수도 있어서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혁명의 주인공인 양화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이 공산불요도 다른 기록에서 보면 의리를 아는 인간으로 나옵니다. 그저 폭력이나 휘두르고 개인적인 탐욕으로 저러는 것이 아닌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자장이 공자에게 어짊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왈 "능히 5가지를 천하에 행한다면 어짊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왈 "공손함, 너그러움, 신뢰, 민첩함, 은혜인데,
공손하면 업신여기지 않고
너그러우면 사람을 얻고,
신뢰하면 사람을 맡길 수 있고
민첩하면 공이 있게 되고
은혜가 있으며 사람을 부리기 족하다."
-이 문단이 뜬금없이 왜 여기에 집어넣는지 모르겠고 내용도 지랄이고 천박합니다.
공손함이나 뭐나 좋은 글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업신여김 당하지 않고 뭐 할 수 있고 하면서 계산적인 이유를 말합니다.
이런 논리구조가 어이없는데 그런 뭔가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는 이유는 이러한 이득이 있어서이다.라는 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이해타산을 따지는 것이죠 이득이 되지 않으면 안 하겠다는 것이고 요즘식으론 돈 되면 하고 아니면 안 하고 식인데 윗글과 비슷한 것입니다. 머리 좋으면 돈 대신 저러한 그럴듯한 것을 꾸며대거든요 이걸 잘하는 자를 논어에선 증오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가 이러고 있습니다. 한심한 부분이 되겠죠.
그러면서도 이런 식으로 나에게 올 미래의 불안요소를 미연에 막기 위한 방법으로 적절히 사용할 수 있으니 잘 연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앞으로 업신여기게 될만한 상황이 연출되어 가면 그러한 것이 안 일어나게 절적 한 방어를 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뻔히 보이는 장래의 불편을 미리 해소해 놓는 것이 좋으니가요 그래서 이 조목을 연구해 두어야 합니다. 가만 이런 계산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도 알고 해야죠 냉정한 것이라서 날 위해 한 것이고 남 위해 한 것이고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날 위해 한건 용서하고 남 위해 한건 치장하는 미친 짓을 하면 안된니까요
또 마지막에 사람 부리는 것이 나옵니다. 누가 관료들이 아닐까 봐 이따위 말을 합니다.
사람을 부려먹을 대상으로 보는 것인데 지금도 이런 정신구조를 가진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이나 어디서나 남을 아래로 두려고 하고 아래로 보이기만 하면 갑질 할 궁리만 하는 자들이 있죠.
남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되면 누구나 빠지는 교만인데 위에서 아래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를 부리게 된 민주주의가 된지도 한참인데 이런 시대에 덜떨어진 지능으로 사니 요즘은 무식한 게 똑똑한 척해서 웃기는 세상입니다.-
진나라에서 혁명을 일으킨 필힐이 공자를 초빙하니 공자가 가려고 했다.
자로가 말하길 "예전에 제가 직접 듣기로 자기와 같은 부류에게 불선을 행한 자에겐 군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었습니다. 그런 조간자가 있었던 곳의 사람인 필힐이 그 중모에서 모반을 일으키는데 왜 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자왈 '그랬지 그런 말 했는데 이런 말도 있다.
단단한 게 아니냐 갈아도 갈리지 않으면,
희다고 말하지 않더냐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면,
내 어찌 매달려만 있고 먹지도 않는 조롱박이 되어야겠냐?"
-진나라엔 조간자라는 대신이 있었는데 이놈이 현인인 두명독과 순화를 죽이는 것을 보고 공자가 진나라에 가려는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 같은 현인들을 죽이는 곳에 갈 수 없다고 말을 하는데 그것이 자기같은 부류들을 못 알아보고 죽이는 불선 하는 자가 있는 곳에 안 간다고 하는 것으로 됩니다.
이것도 앞에서와 같이 혁명하려는 자에게 가려는 공자를 말리는 자로가 대화하는 형식입니다.
이 논어의 편집은 자로 편을 드는 것일까요? 공자 편일까요?
갈라도 안 갈리는 것은 단단한 게 아니라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갈려져야 가공이라는 것이 되고 그것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이죠 그런데 안 갈리면 쓸모없거나 쓸모없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겠죠 장자는 쓸모없음이 오히려 쓸모있다고 하기도 하지만요 여기서 공자는 쓰이길 바라는 것을 자꾸 말하는 것이라서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이겠죠
하지만 여기서 쓰인다는 말을 해서 의미가 한정되는 것인데 쓰이거나 필요성이 있거나 그런 게 아니라 관계하는 것이고 함께하는 거라서 홀로가 없다는 것으로 하거나 서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으로 하면 쓸모없음을 중시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 없고 받지 않는 것이 없으니 어떤 영향을 주고받을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니 그것을 생각해야 하지 무조건 영향 없고 안 받고 이렇게 하면 극단 성이 되어 아무것도 아닌 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역시 없으니 이건 불가한 것을 논하는 것이 되어 제쳐두죠
내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이미 남이 호흡해야 할 산소를 내가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남에게 돌아가야 한 많은 물자들을 내가 가지면서 성장하고 사회생활하고 살게 됩니다.
존재하는 것이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지는 것이죠 이것도 빚이나 남에게 갈 것을 내가 가진다는 식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지 이게 진리는 아니고 얼마든지 보는 관점을 다르게 하면 다른 의견이 된다는 것입니다. 빚이 아니라 서로를 돕고 내주고 그래서 존재할 수 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남이 준 산소를 호흡하고 나도 남에게 내어주고 그렇게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쓰이지 않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 그렇게 쓰여지고 있는 것이 삶이라고 하고 주고받는 것이지 누구에게 내가 쓰여지고 있는 것도 아니죠
그래서 이왕이면 더 나은 더 많이 더 좋게 영향을 주고받으려고 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데 이것을 멈추라고 한다면 어디까지 어떤 것을 해야 하는가를 따지면 경계 짓기가 어려운 것이 됩니다.
그거 역시 폭력이고 인위적이며 간섭이고 영향을 강하게 주는 행위인데 이러면 역설이 되어 또 다른 어려움이 됩니다.
갈려지지 않고 물들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 두려운 것인데 이걸 왜 거부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들고 더러워지고 그게 왜 문제가 되나요? 더러워져야 하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일 텐데 뜻은 있지만 이건 못하겠다가 되나요? 그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더러워지는 것을 차마 못하겠나요? 그건 뜻이 별 볼 일 없는 것이겠죠-
자왈 "유(자로)야 너는 여섯 가지 말과 여섯가지 폐해가 있는 것을 아느냐"
답하길 '모릅니다.'
"앉아봐라 내가 너에게 말하리라
어짊을 좋아하면서 배우길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해는 어리석음이고
알기를 좋아하는데 배우는 건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해는 방탕해지는 것이고,
신뢰를 좋아하면서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해는 도적이 되는 것이다.
곧음을 좋다면서 배우길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해는 편협이고,
용맹함을 좋아하면서 배우길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해는 어지러움이다.
강한 것을 좋아하면서 배우길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해는 미친놈이 되는 것이다."
-이건 또 뭔 헛소리인가 하는데 자로에게 당하다 보니 뒤끝이 있듯이 여기서 한방에 자로를 때려잡고 있습니다.
결국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너 같은 게 날 알겠냐는 것인데 배우길 좋아하지 않으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너무 노골적으로 무식한 게 내가 하려는 일에 참견한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공자가 참 지저분한 짓을 합니다.
근데 나도 찔리긴 참 많이도 찔리네요
남보고 모른다고 아는 게 부족하다고 무식하다고 무지하다고 많이도 욕하고 비판하고 비아냥 거리고 있는데 이 배우지 않으려는 것이 너무도 징글징글하게 합니다.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호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호학하지 않으면입니다.
호학하려면 자신이 무언가 부족함을 느껴야 하고 무지를 알아야 하며 이건 겸손이 되고 항상 알고 모르고에서 분별하는 순간을 거치는 정신이어야 합니다.
안다고 말하려는 순간 정말 내가 아는 것인가 뭘 기준으로? 뭘 하려고? 이런 갈등을 하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습관 되어 있을 정도로 호학해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면 소크라테스가 이걸 알려주기 위해 변증법적인 대화를 하게 되겠습니까?
모른다는 그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인데 역시 이걸 아는 자는 없죠
공자도 아는 것을 보면 현인들은 다들 비슷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짊이 호학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자식이 된다고 합니다.
착한 행동, 바른생활한다면서 남이 하는 바른 활동은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만 한다고 하는 짓이나 일상에선 착한 짓을 하면서 거대담론이나 큰 그림에선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을 어리석은 놈이라고 합니다. 많이 봤습니다. 착한 척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하더라고요 행동에도 장소와 위계와 때에 따른 다른 것을 해야 하는 것을 모르니 하나만 옳다고 고집하는 짓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질게 한다 하지만 어진 게 아닌 것이 많이 있게 됩니다.
이건 미소적인 일과 거대한 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멍청함입니다.
아주 사소한 것을 꼬투리 잡아서 사람을 비난하고 욕보이게 하려는 것이죠 태풍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감히 욕하지는 못합니다. 또 그만큼 이로운 것입니다. 어찌 판단할 것인가요?
아는 것을 좋아하는데 호학하지 않으면 방탕이라고 합니다.
아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죠 알고 싶어 한다고 하고요 그러면서 배우지 않는다면 이건 거짓말이거나 아는 게 애초 뭔지 이해가 덜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으로 인해 거만해집니다. 하나 알면 뭔가 대단한 듯이 알고 거들먹거리니까요 나는 아는데 남은 모른다고도 생각합니다. 이렇게 거만하면 제멋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알면 오직 그것으로만 행동하고 다른 것은 안 보는데 이러면 못할 짓도 하는 것으로 갑니다.
내가 아는 것이 진리이니 이것이 아니면 안 되고 이걸 위해선 뭐든 다 하는 것을 우리도 보고 있습니다. 종교든 정치든 어디서든 그렇죠
신뢰나 믿음을 좋아하면서 호학하지 않으면 도적놈이라고 합니다.
남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놈들이 있으니까요 남의 믿음을 이용해 먹고 믿으라고 해놓고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믿으라고 하는 놈치고 믿을 놈 없는 것이기도 하죠
도적놈의 XX들이 너무도 많은 게 현실이죠
곧음을 좋아하고 호학하지 않으면 편협하다고 합니다.
용서이겠죠 자신이 옳다는 것만을 생각하고 대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화는 나와 다른 의견을 듣게 됩니다.
이런 당연한 남에 대한 인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협이란 남을 죽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남은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하게 되니까요 다름과 차이를 이해도 인정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것인데 그걸 모르는 것이 편협한 마음이 됩니다. 좁은 소견머리라고 하죠
용맹함을 좋아하면서 배우길 좋아하지 않으면 어지럽다고 합니다.
어지러운걸 난을 일으킨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여러 난이 있었다고 배웠으니까요 알겠죠 그런 것이 용기는 있는데 무식하다고 하는데 웃기는 소리이긴 하죠
또 다르게는 생각이나 지식보다 행동을 우선시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많이 하는 짓입니다. 열성적이고 열심히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결과가 어떻든 우선 열씸히 하는 것을 겉으로 보여주면 좋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단 보여주기가 나오게 됩니다. 보여주기 식이니 결과가 좋을 수 없고 그러면 어지러운 것입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고 열심히 하는데 왜 안되는가 하는 뭐가 뭔지 모르는 것이 됩니다. 열심히 축구공을 몰고가는데 골은 못넣고 쉬지않고 열씸히 뛰어다니는데 공을 잡지도 골을 넣은 것도 아닌 것입니다. 효율성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보이는 것이 열심히 하는 것처럼 하면 그것으로 선입견이 되어 결과가 부족해도 선입견이 영향을 주어 좋고 잘한 것으로 알게 합니다.
노력으로 된다고 하는 것이죠 오직 노력 오직 근성 이러면서 몰아붙이는 곳도 있나 봅니다.
강한 걸 좋아하면서 호학하지 않으면 미친 거라고 합니다.
자기주장을 하면서 강요하고 힘을 내세워서 하려고 합니다. 억지와 강압성을 이용하려고 하죠 이러면 판을 뒤엎으려고 하게 되어 미친 짓을 합니다. 무식한 게 용감하다고 모르니 행동에 감히 못할 짓이 없습니다.
힘으로 해결하고 주먹으로 하려고 하는 것이죠 이게 권력을 이용하고 지위를 이용하는 것도 같은 거라서 미친놈이 정치에나 경제계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힘으로 해결하려는 미친놈들이죠-
자왈 "이것들아 어찌하여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흥을 알게 하며 관찰을 하게 하며 어울리게 하며 원망도 할 수 있게 하고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게 하고 멀리는 정치도 알게 하고 새와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알게 한다."
-지금은 시를 시경이라고 경전화 되어 있는데 그냥 노래 가사를 지나치게 과장하니 이건 위선입니다. 이래서 지들이 하는 것은 중요하고 위대하며 신성한 것이고 남들이 하는 것은 하찮은 것이 되는 갈림을 만드는 짓을 하게 합니다.
상스러운 것을 상스럽다 말하지 못하게 하는 이들 유학자들의 위선이죠
누군가 애꾸를 만들면 그 이후는 아무도 거기에 토를 달 수가 없는 권위에 눌려지게 되는데 이런 권위에 복종하는 인간 축에 들기 힘들게 가르치는 곳이기도 한데 이런 짓을 하는 곳이 여기뿐은 아닐 것이니 부족한 인간의 병폐이기도 합니다.
시를 노래하면서 감정을 풀어내고 즐겁게 노는 것을 하면서 그 마음이 편협해지고 고정되며 딱딱해지는 짓을 하는 것이 모순이 됨을 알지 못했던 과거 유학자들의 무식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놀면 안 된다고 하는 식으로 노는 것을 경멸하는 것도 생기는데 인생에서 노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휴식이 있어야 하고 자기 시간을 가져야 하며 노동하는 시간보다 노동을 안 하는 시간이 더 있어야 인간다워지고 인간으로서 존중되어감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시를 읽은 것일까요
지금은 꼭 시가 아니라도 글을 쓰게 되고 문자를 사용하게 되며 인터넷을 하게 되는 것이다 보니 사물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 많습니다.
렙이라는 것을 하는 것만 봐도 그들이 사물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문자를 배열하고 각운을 쓰고 리듬을 맞추고 의미를 얼마나 그럴듯하게 만드는지를 보면 기막히게 잘합니다.
인생을 관찰하고 사물을 보면서 그것을 음악으로 만드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이고 메모나 일기라도 할 수 있는 때가 되었는데 이젠 종이나 펜이 아니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논어의 종이가 없던 시절 아무 곳에서나 글을 쓰는 것이 되지 않던 시절이나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지 못하고 그 당시에 이런 것을 말한다고 그냥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나 시를 쓰거나 글을 쓰거나 말하는 시대이고 노래를 하루 종일 들을 수 있는 때이고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시대이니 누구나 시를 합니다.
그 노래로 슬픔을 위로하고 감정을 표현하고 부모에 대한 노래와 세상에 대한 노래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막힌 자들이 막지만 않는다면 노래는 흥할 것이고 멀리멀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공자가 아들인 백어에게 말하길 "너는 주남과 소남을 배우고 있느냐? 사람이 되어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벽을 보고 있는 것처럼 답답한 것이다."
-앞에서 있던 말인데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주남과 소남이 시에 나오는 것입니다.
담장 앞에 서 있는 것 같다고 하니 이런 것도 모르면 답답한 인간이라는 것이겠죠 경직된 사고를 하는 것에 경계를 한 것입니다. 고리타분하고 융통성 없는 것들입니다."
자왈 "예다, 예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어찌 예물을 보내는 것을 말하겠느냐?
음악이다 음악이다라고 하지만 북이나 종을 말하는 것이겠느냐?"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도 어지간히 둔한 자들이 있었던 것이겠죠
예라는 것은 일종의 표준을 정하는 것입니다.
표준은 좋을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표준이 있으면 기준이 되어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면 되는 것이니 의지할 곳이 됩니다.
그런 표준적인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도달해야 하기 위해 공부하고 단련하는 것도 있어야 하죠
외부의 표준과 내부의 표준이 있게 됩니다. 사회와 개인의 교류는 언제나 있는 것이니까요 둘 간의 차이가 있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하며 개인의 예를 사회에 억지로 적용하려는 엉성한 실수도 할 것이고 사회의 예를 개인에게 적용하려는 미숙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나 음악이 있어야 합니다. 그 융통성이 있어야 하고 서로 간에 어울림을 해야 하는 것이라서 음악이 없으면 홀로 고독한 삶이 됩니다. 음악은 교류하고 대화하고 어울리고 감정을 토로하고 나누며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나누어서 기준을 정하고 순서를 정하고 할 것과 안 할 것과 먼저 하고 나중 하고 그런 규칙을 정하는 그런 것들이죠
그런데 음악은 구분을 지우고 경계를 없애며 순서를 넘나들고 규칙을 허물면서 일치감을 느끼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구분과 합일을 다 함께 해야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구분만 하면 차별이 되고 불평등이 되며 갑질이 되고 꼰대가 되며 갈등이 되고 감정 상함이 되는 것인데 음악이 합일하고 하나로 하며 느끼고 어울리고 그래야 평등해지고 아래에서 서로 간에 하나 됨을 하면서 근저의 불확실 불완전 불완성의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론이 아니라 현실의 복잡하고 혼돈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의 상하 구분은 음악의 구분 없음을 알아야 예라 하는 것으로 하나만 집착하면 결국 폐단이 됩니다.-
자왈 "겉으론 위엄 있는 척하지만 안으론 나약한 것은 소인에 비유하면 벽을 뚫고 도적질 하는 자들이다."
-이건 일종의 위선자들을 욕하는 것입니다.
겉으론 대단한 것처럼 하거나 근엄하고 거만하게 하지만 실재 능력으론 그에 미치지 못해서 야비한 짓을 하거나 뭐가 옳은지 구분도 못하거나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남을 헐뜯고 비방하며 자기를 드러내려는 자들이거나 겉모습과 실재 내용이 일치가 잘 안 되는 것을 말하겠죠
이런 사람이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추호도 모르는 것이라서 누구나 자신이 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와 당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신의 옳다거나 자신은 그래도 된다고 하는 듯한 사람이 이런 사람일 경우가 되죠
지식이 어느 이상 이루면 앎에 솔직하게 됩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하게 되는데 자기의 내면을 알 수 없고 알려는 배움도 안 했으니 이걸 아는 자들은 흔하지 않게 되죠 알려는 노력을 한 적이 없으면서 모른다고 누가 말하면 욕인지 아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너는 모른다는 말을 욕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성인은 어떤 사실에 대한 알고 모르고를 말하는 것이라서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사람끼리의 대화입니다. 뭘 모르는지 알게 되면 그것을 배우면 되는 것인데 이게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어깨의 작음 힘이 들어가는 것에도 그에 따른 책임과 그래도 되는 당위성이 넘쳐날 정도가 되어야 하고 이것도 홀로 있을 땐 허무해지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이유라는 것은 결국 없는 것이라서 어깨에 힘을 들어가게 할 그 어떤 업적도 능력도 사실 공으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공으로서의 무화됨을 모른다면 그 겉으로의 위엄이나 근엄함은 결국 똥배짱이고 내실 없는 헛짓입니다. 부족함을 모르면 그 무화의 무서움을 모르면 배우려고도 안 하고 내실의 귀중함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약함을 알아야 위엄이 세워진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의 한계를 알아야 강해지는 것이고 모르는 것을 알아야 아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죠-
자왈 "향원은 덕의 도적놈이다."
-여긴 다들 맹자가 한 말을 덧붙입니다.
<<비난하려고 해도 비난할 건더기가 없이 완벽하게 보인다. 찌르려 해도 찌를 틈이 없어 보인다.
흐르는 세속에 너무도 잘 동화되고, 오염된 세상과 너무도 잘 야합한다. 평상시에 사는 모습을 보면 충직하고 신험이 있는 듯이 보이며, 행동을 보아도 청렴하고 결백하게 보이며 모든 사람이 그를 기뻐 따른다. 자기 스스로 자기가 옳다고만 생각하지만 이런 자들은 도무지 요, 순의 도에 더불어 들어갈 길이 없다. 그래서 공자께서 "덕의 적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맹자. 도올 해석)>>
향원이라는 것이 뭐냐 하는 것이 중요한데 어느 동네나 어느 동네 같은 곳이나 공동체, 조직이나 사회나 사람이 모이면 잘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도자이기도 나서는 사람이기도 하고 착하게 행동하고 옳은 것을 한다고 하면서 신임을 받고 인정받고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심하게는 자신이 다 안다고 하고 자신이 아는 것이 진리라고도 합니다. 선동하고 선전하고 뭔가 의미 있는 듯히 행동하고 대단한 것을 하는 듯이 합니다.
요즘은 각각의 종교의 지도자나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각종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도닦은 곳에서도 한두 가지 신비체험이나 뭔가 한 쪼가리라도 아는 것을 느끼면 자신이 수장이 되며 엄청난 것을 가르치는 듯이 하고 대단한 진리를 아는 듯이 나댑니다.
가까이는 착한 척하는 것이고 친절한 듯이 하는 것이고 잘한다는 듯이 하는 것이고 옳은 것을 아는 듯이 합니다.
정치인들은 거의 이런 인간들만 있는 듯도 합니다. 사람들을 선동해서 표를 얻고 그것이 자기의 힘 인양 으스대고 시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개인적인 성취와 득실을 따지는 그런 위선자들이죠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조차도 못하는 것들이 정치한다고 하고 그런 것에 관심 있는 듯이 하는 일반 시민들도 많고 경제인은 돈 버는 것이 목적이면서 그것을 숨기고 이미지만 좋게 꾸미거나 지들이 잘나서 거기에 있는지 알며 시민들의 돈을 가져간 것인데 당연히 자신들의 것인 양 여기고 오직 개인의 부의 성취만을 위하면서 조직이나 공동체나 더 큰 이상이 있는 듯이 합니다.
명예가 있는 종교의 지도나자 지식인이나 전문가라는 자들이 그 명성을 이용해 시민들의 인생을 상담하고 책임져줄 것처럼 합니다.
아는 것은 없는 데 있는지 알며 모르면서 아는지 알며 결국 사람을 현혹하는 것인데 자기는 공덕을 쌓거나 신의 대리인이나 명령으로 알기도 하고 선행을 하는지 알고 그러는 자들입니다.
이런 것은 도적놈이라고 하죠-
자왈 "길에서 듣고 길에서 떠들면 도를 버리는 짓이다."
-경솔한 것을 말합니다. 흔히 하는 주워들은 것으로 잘난 듯이 말하는 것을 의미하겠죠
어디서 들은 것을 주위 깊게 연구하거나 나름의 학습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아는 척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학습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나를 들으면 그것이 정말 그러한지 나름의 검증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런 것을 할 수가 없어합니다.
그래서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하라고 하지만 이 말이 또 뭔지 모릅니다.
뭔가 들었으면 연역적 전제를 들은 것입니다.
"이게 이렇다더라" 이러면 정말 그러한지 증거를 수집해야 합니다. 그전에 저것이 무슨 말인지 어떤 경우의 말인지 뭘 하자는 것인지를 따져보고 분석을 해야 하죠
자기의 경험체 계내에서 그 증거를 찾아야 하고 그래서 정말 그런지 확인하는 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이런 최소한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건 주워들은 것이고 남의 말을 따라 하는 것이 되지 자기의 것은 없게 됩니다.
이것조차도 못하면 공부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거치지 않고 하나의 지식이라도 안다고 하면 그건 거짓입니다.-
자왈 "더러운 놈들과 어떻게 같이 정치를 할 수 있나
지위를 얻기 전엔 그 지위 얻을 생각만 하고 그것을 얻으면 잃지 않을 생각만 하는데, 잃을 것을 걱정하는 놈이라면 무소부지無所不至 즉 못할 짓이 없게 된다."
-지금은 이런 정치인만 보게 되는데 국회의원이 되려고 어떤 한자리를 차지하려고 갖은 못할 짓을 다하는 자들뿐인데 이게 무슨 세상인지 모르겠습니다.
농담이라도 정치인은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 정치를 그렇게 농담의 소재로 삼는 것은 시민이 하는 것이지 그 당사자인 정치인은 그러는 게 아니죠 언제나 걱정해야 할 것이 시민이고 나라이며 세계이어야 하는 것인데 그런 것이 아니라 자리보전할 것이나 더 오르고 싶은 것이나 어떤 권력을 누려볼 것이나 생각하며 농담하고 버릇없는 말들을 하면서 그것을 위해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것을 한다면 이런 것들을 더러운 놈들이라고 합니다. 비루한 자들이라고 본문은 쓰여있죠
고상한 것을 하기 위해선 그 대상에 대해서 고상하게 대해야 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 존중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짓인데 이런 것도 모르면서 그런 고상한 지위를 얻고 일한다면 돼먹지 못한 놈일 될 뿐입니다. 분수에 안 맞는 것이죠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 남을 위한다는 것이 가당치 않으니까요
그런 지위를 잃을 것을 걱정하면 잃지 않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하고 더러운 짓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가지면 잃을 것을 생각하고 소유하면 무소유 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위가 생기면 지위가 없어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하나를 얻으면 그것이 없어질까 봐 걱정이면 그릇이 작은 자가 됩니다. 어느 것이나 있든 없든 자기의 길을 가는 위대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논어가 정치에 대한 글이 많아서 나도 그런 비판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에 듣기에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인데 논어를 핑계로 하면서 열심히 떠들었죠 얼마 안 남았을 것입니다. 참고 봐주신다면 고맙고 안 봐도 서운하지는 않아요 흑흑-
자왈 "과거에 안 좋은 것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없어진 거 같다.
과거의 미친 것은 거칠 것이 없이 행동했는데 지금의 미친것은 방탕한 것으로 변했다.
과거의 자부심은 각 세우며 행동하는 것인데 지금의 자부심은 성질내고 사납게 군다.
과거의 어리석음은 곧기라도 했는데 지금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짓을 할 뿐이다."
자왈 "교언영색, 말을 잘 꾸미고 그럴듯하게 행동하는 자들은 어짊이 드물다."
자왈 " 자색이 붉은색을 빼앗는 것을 싫어하고 정나라 음악이 아악을 어지럽히는 것을 싫어하고 말 잘하는 자들이 나라를 뒤엎는 것이 싫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단어의 의미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전에 쓰던 의미로 계속 쓰고 싶은 사람들이 공자처럼 저렇게 말합니다. 그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하면서 과거로 회귀하는 퇴행을 합니다.
원래의 의미가 변하고 퇴색되는 것이 안타까울 수 있고 마음이 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미가 달라지면서 시대의 변화와 그로 인해 가치관의 변화와 삶에대한 자세의 변화들을 알지 못하면 화석이 되어가는 것이라서 정치하는 자들이 시대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자세를 달리 할지 못한다면 그로인한 피해는 결국 시민이 짊어지게 됩니다.
근원이 중요하고 원래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로인해 현실을 외면하게 되는 상황이 되면 그런 근원은 곡해한 근원이거나 불필요한 근원이겠습니다.
내가 알기론 이 세상은 어떤 것도 허용합니다. 이미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그러한 행동이 되고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세상이 허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자신 입장에서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서 거부하면 머리가 나빠서 어떻게 변해갈지 세상을 보지 못한 것이고 예측하지 못한 둔한 대가리인 것인데 그걸 세상 탓이거나 사람 탓이거나 하면서 외부의 문제로 삼으면 자신이 굳어져서 그리된 것을 모르니 답답한 것입니다. 이런 한심한 가르침이 있어선 안 되겠죠 남보다 더 멀리 보고 더 먼저 보고 대처하고 준비하는 것을 배울 곳에서 말이죠
미친것이 거칠 것 없이 남 눈치 안 보고 할 말은 하고 행동할 것은 하는 것에서 방탕한 것으로 변했다면 미친다는 것의 의미는 방탕이라는 의미가 되지만 그렇다고 거칠 것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사라진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는 또 있게 됩니다. 단어의 의미가 변한다고 사람이 변한 것은 아니며 단순히 단어의 쓰임이 변한 것입니다.
그리고 논어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라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서나 어느 시대나 있습니다. 그보다 그런 사람들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의 각박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그 눈이 중요하지 그런 사람은 분명 어디에나 있을 것입니다.
자주색이나 정나라 음악이나 이런 것도 같은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주색이 얼마나 색의 다양함을 주는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관점 따라 다른 의미가 되니까요 색이 정해진 몇 가지만 있으면 그건 억압이고 단조로움이고 폭력입니다. 세상에 이것만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이런 자가 시를 읽으라고 하는 것을 보면 공자도 참 말의 일관성이 부족한 학문 수준이 됩니다.
변해가는 그 시대의 음악, 풍조, 유행에 뒤쳐지면 이미 사회에서 버려짐을 당한 것입니다. 사실은 버려진 게 아니라 스스로 쓰레기가 되는 것을 선택한 것이겠죠-
자왈 "난 말이 없었으면 한다."
자공이 말하길 "말하지 않으면 저희가 무엇을 적어서 남겨요?"
자왈 " 하늘이 말을 하더냐 사시가 운행하고 백물이 나오고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공자가 자기가 한 말이라고 하면서 제자들이 적거나 기억하거나 말하거나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든 것인가 봅니다.
그래서 자공이 그러면 뭘 남기냐고 되물으니까요
공자의 말을 오해해서(공자 말이 더 이상 말로 뭔가를 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함) 기록할 것을 걱정한 것인지, 기록한다고 하니 안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인지 보기 나름이기도 한데 하늘은 말하지 않지만 할 것은 다 하고 있다고 하는 말로 마무리를 지으니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말을 기록해서 남기지 않아도 세상은 절로 절로 흐를 것이라고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세상은 이루어진다는 회의나 초탈이기도 하고 좌절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와 상관없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절망적이거나 자기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나 비천함을 보게 되기도 하고 그런 잡다한 것이 뒤섞이기도 합니다.
자공처럼 누군가에 기대어야지만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자들은 스승이 이런 말을 했다 이러이러했다 이러라고 했다. 이것이 맞다고 했다 하는 것이 필요한가 봅니다. 이렇게 누가 이런 말했다 누가 이러라고 했다고 하는 자들은 결국 자기 것이 없는 것이라서 도를 버리는 도적놈이라고 앞에서 한 것과 같은 현상인걸 모르네요
또 흔히 하는 변명이 후세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겠죠 그럼 공자는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저런다는 것인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상대는 생각하지 못할 거라고 보는 것이 자기 한계로 남을 본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대화가 됩니다. 언제나 남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에 상대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가늠해야 하는데 지 스승이 지보다도 후세를 위하지 않는다고 보죠 이런 제자하고 대화하는 공자가 씁쓸합니다.-
유비가 공자를 뵙고자 왔는데 공자가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이 말을 전한 사람이 문을 나가자 거문고를 연주하면 노래 불러 유비가 돌아가면서 그것을 듣게 했다.
-이것을 유비가 맘에 안 드는 짓을 해서 이런 것이라고도 하고 불교적인 선문답을 배운 사람은 이런 식으로 가르침을 일러주는 방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공자가 독하긴 합니다. 집에 온 사람을 병을 핑계로 안 만나니까요 교통이 편한 것도 아니고 한참을 걷거나 가마나 수레로 한참을 올 것인데 지금에 비하면 너무도 불편을 감수하면서 갔는데 병나서 안 만난다니까요 오히려 병문안을 한다고 버티면서 보겠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냥 가는 것을 보면 대충 눈치 깐 것일지도요
그러다가 거문고 연주하며 노래 부르면서 연기하는 것을 보면 이건 또 뭔 가식적인 짓인지 모르겠는데 설정이 너무 유치합니다.
허구인지도 모를 이런 것을 왜 논어의 편집자는 옮겨놓았는지 모를 단락이죠
그 안의 사정을 전부 알 수가 없어서 이리저리 생각해보는 것이지 정답은 없고, 있어도 이젠 해석의 재료로 쓰는 것이지 사실의 정확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이라는 것도 없는 거라서 현실의 해석은 보는 자의 정체성에 의해 변질되는 것이죠 나도 내가 하는 행동의 사실이 뭔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무일가"라는 글을 썼죠-
재아가 물었다.
"삼년상을 일 년으로 줄여도 오래 하는 것입니다. 군자가 삼 년이나 예를 하지 않으면 예가 무너지고, 삼년이나 음악을 하지 않으면 음악이 무너집니다. 묶은 곡식은 다 먹고 새로운 곡식이 익어가며 불씨도 계절마다 다른 나무로 지피듯이 일 년이면 될 것입니다."
자왈 '장례 치르는데 쌀밥 먹고 비단옷 입으니까 좋냐?'
재아 답하길 "좋아요."
자왈 "네가 좋으면 그렇게 해라 자고로 군자는 상을 당함에 음식을 먹어도 단맛을 모르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생활하는 것이 불편해서 그래서 안 하는 것인데 넌 좋다고 하니 그럼 그렇게 해라!"
재아가 나가버렸다.
자왈 "넌 불인하다. 자식이 태어나면 삼 년이 지나야 부모품을 벗어나는 것인데 삼 년이란 천하의 공통된 상법이거늘 너도 삼 년 동안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았냐?"
-참 별난 대화입니다.
우선 재아의 부모가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것에 일 년으로 하면 어떠냐고 하니 공자가 승질머리를 드러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거 같고 그래서 재아 역시도 화가 나서 감정이 뒤틀리나 봅니다.
편안하냐고 하니까 편안하다고 대꾸합니다.(원문은 편안하냐 安입니다.) 이건 완전히 감정싸움입니다.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해버리고 성질 돋우는 그런 것이죠 이게 부모와 자식들 간의 대화랑 비슷합니다. 대개 집에선 이런 식으로 감정싸움을 하죠 밖에선 이렇게까지 안 하는데 친한 사이끼리는 하겠지만요
그리고 공자의 변명이 범주 오류이기도 합니다.
재아는 정치나 세상에 사업을 하려는(자본주의 사업이 아니라 세상 일) 사람이 삼년상을 치르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공자는 개인적인 감정상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군자의 정의에서 대화하는 것이라서 대화가 성립이 잘 안됩니다. 공자가 이러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감정에 휩싸여서 질문의 의미를 오해하는 것인지 일부로 오해하려고 하는 것이지는 모르겠는데 듣는 입장에선 재밌거나 답답하거나 합니다.
공자 편을 들어서 이런 개인적인 삼년상이지만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시민들이 본받을 것이고 그런 것이 정치이다 식의 논리 전개를 다른 곳에서도 하니 그런 의미로 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재아가 그걸 이해하지 못하니 그런 원리부터 설명해주어야 하는 것이겠죠
나로부터 시작하면서 서서히 넓혀가는 것입니다. 분명 이건 중요한 것이고 이걸 모르면 적어도 도를 모르는 것이 됩니다.
상식적인 정치론에서는 이런 것이 없죠 지금도 그러니까요 하지만 도의 정치에선 내가 주변으로 확장해가는 다른 원리를 알게 되고 그것을 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의 신비한 힘이라고 하는 식의 말이 아니라 내가 자각하고 그런 자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다수가 되고 전체가 되어야 그 하고자 하는 뜻의 이루어짐이 견고하고 오래가며 정상적으로 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각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시민이 깨어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고 하며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세상을 이루어가는 것이죠
누군가 영웅이 지도자가 메시아가 해결해주는 식으로 기대고 선망하고 해결해주고 구원해주는 그런 식의 혁명은 역사적으로 잘 된 적이 없었습니다.
시민 각자가 자기부터 구원하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이 됩니다.
그런 각자의 자기 실천을 말하고자 그것을 군자라고 하는 것이겠죠 내가 나부터 정치해서 주위로 퍼져가고 퍼지는 것이 다른 사람도 스스로를 자각하며 살 수 있는 것을 의미하지 내 아래로 오거나 내가 지배하거나 내가 지도하거나 내가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공자가 어디까지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마지막에 부모가 삼 년을 품었다고 하는 식의 말을 보면 감정을 건드려서 자기 이론을 설득하는 대단한 수사법을 사용하는 것이고 사실 이것이 더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크다는 것을 이미 알고 하네요 좀 간사합니다.
사실 이건 관념 형태 즉 이데올로기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상나라가 이것을 왜 했는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을 하고자 한 사람이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 없죠
하지만 분명 이건 작위적인 사회의 습관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지 필연성이나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공자가 그것을 알겠죠 그래서 더 감정적인 격함이 있죠 근거 없으니 근거 없음으로 인한 감정적인 불안함이 드러납니다.
의도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주장하는 것엔 그래야 하는 의도가 있죠 그것이 진리라거나 사실이라거나 하면서 근거를 대면 조잡합니다. 그러고 싶은 의도이다라고 하는 것이 솔직하죠
아무리 해도 이우주는 그래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주조차도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딱히 없으니까요
이따위 것이 없으면 뭐가 문제가 되나요
그러니 삼년상이나 뭐나 그러고 싶은 이유가 있는 거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죠-
자왈 "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데가 없다면 가르치기 어렵다. 차라리 장기나 바둑이라도 해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 곳이 없는 것은 나태함이나 안일함 같은 것입니다.
인생을 그렇게 보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배불리 먹고 아무것에도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놀고먹는 것이 얼마나 좋은데요 이런 것도 해야 하고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린 놀고먹어야 하죠
마음의 여유와 풍요가 더 나은 생각과 건전한 마음의 발심을 하게 합니다. 또 이게 아니라도 그냥 편하게 사는 것이 좋아요 하고 싶은 사람만이 뭔가 하면 됩니다.
이것이 나태함이 되지는 않습니다. 마음 쓸 곳이 없는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누구나 마음을 쓰는 곳이 있습니다. 게임이든 바둑이든 뭐든 마음을 쓰는 곳은 있죠 사실 마음을 쓰는 것이 있다고 다가 아니라 어디에 쓰느냐가 더 중요하긴 합니다. 어떤 것에 인생을 걸고 사는지가 있겠죠
이런 것도 안 하겠다고 하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안 하는 것도 하는 것이죠
그게 아니라 내가 하니 남도 해야 한다고 누군가를 훈계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내 말을 듣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전혀 들을 생각이 없고 왜 들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가르치려고 하면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놈이 되겠죠
그리고 아무것도 그럴만한 것이 없다고 했으니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없습니다. 그냥 우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는 것에 이래야 한다거나 저래야 한다 거 나는 없죠 그래서 바둑이나 장기라도 둬라 마라 할 수 없습니다. 네가 뭔데 이거 해라 마라가 되죠
근데 개인적으론 바둑이나 두는 놈이 뭘 하나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런 걸 하는 놈들이 집요하더라고요 그런 집요함이 없으면 이기지도 못하고 그런 승부욕이 무심이나 공을 알리는 없을 거니까요 그래서도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마라 안 할 거면 무조건 하지 마라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한다면서 이상한 것에 탐욕을 내는 경우도 있더군요 참 이래도 이렇고 저래도 이렇고입니다.-
자로 왈 "군자도 용기를 숭상합니까?"
자왈 '군자는 의로움을 으뜸으로 친다. 군자가 용기만 있고 의로움이 없으면 어지럽히는 난을 일으킨다.
소인은 용기만 있고 의로움이 없으면 도적놈이 된다.'
-여기서 용기는 일종의 실천력을 말하는 듯한 문맥입니다. 행동으로 바로 옮기는 것을 의미하겠죠 아닌 것에 아니라고 바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죠
그래서 의로움이 없이 행동을 해버리면 혁명을 일으키는 듯한 난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군자를 말합니다.
이런 것이 난을 악한 것으로 알게 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과거의 난이 그렇게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일까요?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역적이거나 그러한데 그들 나름을 난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사연이나 당위성을 관심이나 있을까요? 공자의 이런 말들이 참으로 편협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찌해야 하는지 성질 같아서 욕을 해주고 싶을 뿐입니다.
의로움은 관료자 같은 군자들만의 전유물 인양하면서 자꾸 소인을 비교하며 지들은 다르다는 식의 어법이 눈에 거슬립니다. -
자공이 말하길 "군자도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니
자왈 "싫어하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자꾸 말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아래에 있으면서 위에 있는 사람들을 무조건 비방하는 것을 싫어한다.
용기가 있는데 예가 없는 것을 싫어하고
과감하지만 대화가 안 되는 막힌 사람을 싫어한다.
그러면서 말하길 '사야(자공) 너도 싫어하는 것이 있느냐?'
"남의 지식을 자기 것인 양 아는 것을 싫어하며
불손한 것을 용기로 아는 것이 싫으며
고자질을 정직이라고 아는 것이 싫습니다."
-이런 이론으로만 하는 것은 허황되기도 합니다. 막상 현실에 이런 명제를 적용하려면 생각보다 복잡한 사연들이 있고 사정들이 있어서 일괄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면 반발이 일어납니다. 그런 현실의 사정을 무시하는 것들이 또 지식인이니 뭔가 안다는 작자들이기도 합니다. 가르치려고 드는 훈계하는 놈들이죠
惡 이 글자인데 이게 미워한다는 것인데 싫어한다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지나치게 편협으로 가는 길이기도 해서입니다. 유교가 자체적으로도 그렇고 외부적으로도 편협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독선적이기도 하면서 미워할 것이면 지독히도 독하게 철저히 미워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종교가 안 그러겠냐 하지만 그렇다고 용서해줄 것은 아니죠 잘못한 건 잘못한 거죠
그렇다고 미워할 대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전제하면서 그리고 상대를 존중해주는 전제가 있으면서 미워하고 그러면서 더 멀리 보고 대하는 안목을 위한 것이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라서인데 이건 유교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대개의 인간 스스로의 한계이기도 해서 무조건 이걸 탓할 수는 없겠죠
공자가 미워한다는 내용을 보면 분명히 새겨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만나면 남의 말을 쉽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욕이나 비난이 되어가죠
이걸 수시로 하는 것도 있는데 그렇게 남을 욕하면서 남을 깎아내리면서 자기의 옳음이나 똑똑하다거나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면서 당사자는 이러는 것을 전혀 성찰을 못합니다. 뭐든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거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도를 위해 누군가를 비난하고 탓하면서 하는 것이 흔히들 하는 짓이죠 이런 건 미워해야 할 부분이죠
그다음 아래에서 위를 욕하는 것인데 이건 지금 정치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고 과거부터 해온 것이죠
너무도 쉽게 욕을 하는데 이건 축구 보면서 그것도 못 넣냐고 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자기는 다 잘할 수 있고 타인에겐 약간의 실수나 흠도 용납하지 못하며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냥 싫어하거나 감정의 상처를 투사하면서 하는 짓이거나 분명 그렇게 함부로 또 쉽게 욕할 만한 것이 아닌데도 그리 합니다.
비판을 하면서 건설적인 대화나 의도를 가지면서 하면 그건 좋을 것인데 앞뒤 구분도 없이 일단 욕부터 시작하거나 욕하기 위한 논리 전개를 하거나 이러면 우선 그 마음 닫음과 남을 욕하면서 자기가 뭐 된 양 착각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용기만 있고 예가 없는 것을 미워한다는데 앞 문단에서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행동으로 하는 것은 잘하는데 그것이 예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의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의로움은 옳은 일이냐고 하는 것인데 예는 순서나 정당한 방법으로 하느냐입니다. 즉 욕을 하려면 욕을 하는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우리나라엔 법이 있으니 법대로 하는 것이고 법이 안되며 그에 따른 방법도 있는 것인데 이렇게 예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한 욕이 아니라 정합적인 사유를 정리해 설득할 수 있는 근거를 찾고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구해야 하는 것이죠
정치를 욕하는 것이 나쁘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가 있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예가 없으면 그 비판이 맞는다 하더라도 그 비판하는 자는 돼먹지 못한 놈이라서 무례한 자가 됩니다. 무례한 것은 무례라고 구분지어야 하죠
그러면서도 그 비판하는 항목에 대한 검사가 있는 것이고요 사람과 그 사람의 행동은 구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잘못을 해도 그 사람의 말을 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나라가 어느 정도 온전하면 거기엔 절차라는 것이 있는데 예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예에 따라 의견을 내고 말을 하는 것인데 그런 것을 무시하면 나라를 흔드는 것이 되고 크게 보면 나라를 위한다는 말하지만 거꾸로 망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단순한 시야이기도 합니다.
절차를 지키지 않는데 어떻게 나라를 위한다는 말을 뻔뻔히 하겠어요
이러면 도 닦는 곳에서 너무 순서나 질서나 규칙을 지키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이런 것은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비방이나 욕이나 어떤 무례도 그다지 상관없죠 예도 없고 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건 나 혼자 만일 때입니다. 남이 있고 대중이 있고 시민이 있고 나라가 있고 세계가 있는 것엔 그에 따른 방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남을 이롭게 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며 남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에 일조하는 것이 됩니다.
나를 위한 감정이나 이성은 개인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고 남과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정치는 분명 내가 아니라 우리이며 세상입니다. 그런 것을 과거엔 도라고 했죠
과감한데 막힌 자를 미워하는 것도 앞에서 하는 말의 다른 관점입니다.
비슷한 의견을 다르게 또 더 심도 있게 세분하게 말하면서 미워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융통성 없고 대화하지 못하는 인간은 몽둥이가 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폭력입니다. 우리가 폭력을 하지 않는 인간으로 되는 것이 지구의 문화의 발전인데 이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예를 지켜가면서 답답한 편견이나 편협을 대하면서 끊임없이 마음을 열고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공에게도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냐고 되묻는데 왜 물을 까요?
내가 이런 견해가 있는데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느냐고 하는 걸까요?
아니면 넌 나와 다른 견해가 있느냐는 걸까요?
아니면 네가 이걸 인정하느냐는 걸까요?
아니면 이유를 되물을 거냐고 하는 걸까요?
아니면...
자공은 단순히 자기가 미워하는 것을 말할 뿐이군요
우선 남의 지식이라는 것이 됩니다. 남이 하는 말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은 일상적인 어리 석음 이리고 하면, 남의 지식을 훔쳐와서 자기 이득을 챙기는 것도 해당합니다.
지적 소유라는 것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 것이긴 한데 지식은 세상이 주는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돈들이고 경쟁하는 자본주의적인 체계, 즉 그곳의 예에 해당하는 방식이 또 따로 있는 것이어서 남의 지식이나 기술을 훔쳐가거나 불법으로 하거나 공정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는 것은 잘못일 것입니다.
이건 기업끼리이고 그런 기업의 것을 불법 복제하거나 해적판을 이용하거나 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선 그다지 이들의 지적재산이라며 돈 내라고 하는 것에 찬동할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알아낸 지식을 더 나은 세상과 더 많은 사람들이 편리를 위해준다고 하면서 인류발전에 기여할 수도 있는데 돈에 대한 탐욕으로 판단기준을 삼은 것이 그다지 별로입니다.
먼저 알아낸 것을 기리는 것은 좋다고 봅니다. 누가 만든 것이고 누가 알아낸 것이고 그것을 확실히 하고 남이 만들고 연구한 것을 함부로 자기 것이라고 사기 치거나 베끼면서 자기 이득을 위해 쓰면 이런 것은 의로움이 아니겠죠
그렇지만 너무 그 창작자에게 집중되는 의미는 조심해야 합니다. 지나치면 정말 지들이 만든 줄 알게 됩니다. 시대의 지식이고 세상이 주는 지식이고 인류의 바람들이 모여서 진행되는 것을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안다는 것이 교만해 보여서 싫습니다.
불손한 것을 용기로 안다는 것이 싫어하는데 불손이 되면 지금 말로는 나대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설치는 것인데 이게 나쁘다기보다 그러면서 용기라고 자신을 칭찬해가면서 이런다는 것이 싫은 거라고 합니다.
언제나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 말하고 설치고 나대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데 이들의 말이 옳은 것이 되고 이들의 행동이 좋은 거라고 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민주주의도 다수의 의견이 옳은 것이 되는데 말하지 않거나 가만히 있거나 소수의 의견은 무시되거나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관심 없거나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라는 것만 보니 이걸 이용하면서도 이것에 대한 연구나 의미를 보면서도 못 보는 것이 됩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중요하다는 말에 속아서 소수가 얼마나 큰일을 해내고 그것이 다른 다수에게 무엇을 하는지 보지를 못합니다. 그런 것이 있다고 안 보니 눈앞에 보여도 못 보죠
철학이나 어떤 역학을 배우든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건 지금은 작고 미세한 힘의 일어남이지만 그것이 서서히 힘을 얻고 대세가 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걸 변화라고 합니다. 차이를 보고 그 차이가 다른 것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가는지를 알 수 있게 되죠
이걸 보려고 학문을 하는 것이라고 내가 전에 말했는데 어떤 학문이든 미래예측을 위해 배우는 것이고 이게 되지 않는 학문은 학문이 아닙니다.
자동차를 고치는 기술도 미래를 압니다. 이 자동차가 어떻게 될지 알아본다는 것이죠 어떤 것도 미래를 모르면 지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고자질이나 남의 비밀이나 그런 사적인 부분까지 말하거나 남이 곤란해할 것까지 말하면서 자신을 정직한 것을 위해 그랬다고 하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정직이나 나라나 세상을 위해서나 신의 뜻이라거나 그러면서 뭔가 거창한 것을 위해서 내가 이런 것을 한다고 하는 식이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자기를 더 거창한 의미로 치장하면서 변명하는 것이죠 그리고 정말 그런지 아는 것이기도 한데 참 답 없는 인간이기도 합니다.-
자왈 "오직 여자와 소인만이 기르기 힘들다. 가까이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공자의 여성 폄하를 변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잘못한 건 잘못한 것이니까요
여자라고 하는데 난 여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여자는 생식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고 여성은 사회적인 구분으로 여성적인 모든 것들입니다. 부드러움, 나약함, 나서지 않음, 배경적인, 보이지 않음, 알 수 없음 다 쓰기가 어려운데 등등입니다.
그런 변명을 하면 이 앞 문단이나 다른 글의 비판은 대개 남자들이 대상입니다. 정치를 남성들의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요 이 당시 엔요 그것부터 남녀차별이 있는 것인데 이들이 여성을 관료로 등용한 사례가 없습니다. 지독히도 편협한 것인데 이런 정도의 지식을 가진 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세상의 지식을 알고 있는 듯이 여기고 배워야 하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죠
아무튼 다른 문단의 비판은 대개 남성들을 비판한 것이고 여기 한 줄이 여성을 비판한 것이니 이거 하나로 너무 과장할 것은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들도 이제 정치에 나서고 관료가 되어가면 여기의 비판들이 남성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되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옳은 것이겠지요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이전에 인간으로서 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게 되니까요
이들 차이나의 문명중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 서경에 나옵니다.
주나라의 속담처럼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니 서쪽의 문화입니다. 동쪽 문화 그러니까 상나라나 우리의 문화는 아닙니다.
이 말을 우리 과거의 속담처럼 알면 안 되죠 주나라라는 그들의 것입니다. 무왕 그놈이 한 말이죠
養 이 단어인데 기르다고 번역했는데 가르친다고도 합니다. 기르고 가르치고 하면서 뭘 하려고요?
이들이 가르치는 이유는 정치하게 하려고 하는 거죠 군자가 되기 위한 것이니까요
여성이 정치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소인은 가르칠 수 없다고 하면 이미 될성부른 놈을 가렸다는 것이 되는데 가르치지도 않고 소인이라고 단정 지었으니까요 이게 정말 공자의 말인지 의심스럽고 또 그렇다면 참 지랄한다고 하겠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군자 즉 정치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인데 여자라서 소인이라서 일단 제쳐둔다는 것인데, 이것에 일단 가르치기도 전에 이미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 선입견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여자는 안된다. 소인은 안된다라는 선입견이 이미 있죠. 이건 도닦는 기초부터 허물어진 못된 짓입니다.
우리가 선입견을 없애야 한다거나 조심해야 한다거나 이런 것이 얼마나 지성인으로서 또 도에서 중시하는 덕목인데 이걸 이따위오 말하는 것이 아쉬움이 든다는 것입니다.
선입견을 알아야 내가 외부 세상을 어떻게 왜곡해서 보게 되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보는지 알아야 관점을 수정하고 행동을 교정할 수 있게 됩니다. 이건 자기성찰에서부터 시작해서 외부와의 비교와 분석을 하게 되며 그렇게 내외의 관계조정을 해가는 것을 사고한다고 합니다. 우리 삶은 이 사고과정이고 드러나면 업적이라고 합니다.-
자왈 "나이가 사십이 되어도 미움을 받으면 방법이 없다."
-지금은 수명이 길어져서 사십이 되어서 철없어도 살아갈 날이 앞으로도 40년 이상은 더 살 것이기 때문에 절망적인 건 아닙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힘든 건 마찬가지죠
점점 마음을 유연성이 떨어져 다른 견해나 의견을 받아 들 기기 힘들어하고 새로워지는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기도 함 듭니다.
젊은 사라들이 만드는 업적을 보기보다 비난하기가 더 쉽고 잘한다고 보기보다 자신이 해온 것을 말하기 쉽습니다.
힘들어도 시간이 있으니 기회는 남았다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