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학/명리학

비우고 채우고

제라울 2021. 1. 4. 15:33

비움과 채움

신살에 이렇게 비우는 것과 채워가는 것이 있습니다.

진술축미에 해당하는 신살들인데 천살과 반안과 월살과 화개이겠죠

천살에 비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채움도 있고 다른 신살도 하나만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비우고 어떤 것을 채우는 것이 있게 됩니다.

화개가 비워지는 것인데 그건 비우고 덜 어내며 간략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이 겁살이라 멀리 떠나고 떠밀리고 압수와 수색당하니 숨기고 중요한 것만 모으고 간추려야 해서 나머지는 모두 버립니다. 그러니 비워지는 것이지만 또 중요한 것만을 모아 채우는 것입니다.

생물이 자신의 유전자를 모아서 씨를 만들듯이 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알맹이인 핵심만 모아서 겁살로 씨가 멀리멀리 날아가 또는 다른 사람이나 생물이나 동물의 몸에 들어가 다시 그 압축이 풀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죠

그래서 이 화개를 잘 해줘야 건강한 유전자를 남기고 그다음의 씨불이 되어 또 다른 성장과 번영을 구가하는 단초가 되겠죠

이러한 간략화는 하루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유전자를 만들거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닌데 예를 들어서 어떤 학문이라면 그것을 간략화하고 쉽고 간단하게 누군가에게 설명하려면 대충 아는 정도로는 안되고 그것에서 나름의 맥락을 보고 규칙이나 원리를 보아야 합니다.

어려운 이론을 쉽게 말하는 것은 또 다른 능력이고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반복이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한 거 또 하고 공부한 거 또 하고 또 해보고 다시 해보고 하면서 아주 쉽고 간단한 기술과 이론으로 장착되어가죠 그것이 유전자든 핵심이든 원리이든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화개가 버린게 있습니다. 비워서 버린 것인데

그것을 받아서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이 월살입니다. 남이 버린 것에서 이득을 취하게 되죠

그래서 이게 어떤 면에선 구차스럽고 더럽고 기분이 그럴 수도 있지만 누구나 남의 뒤치다꺼리하며 그 이후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달인데 누군 태양아래에서 한참 번영을 구가하지만 난 멸망해가는 누군가의 폐기물에서 뭔가 자기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나에게 득 되는 것을 찾는 것이 됩니다. 쓰레기 뒤지는 비참함을 맞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자라고도 하겠죠

그림자라는 것이 다양한 해석이 됩니다. 태양의 아래에서 한참 활동하는 것의 그림자로서 그 태양 아래의 사람을 뒤에서 좌지우지하는 자가 되거나 힘이나 곳이 되기도 하는 것이고, 낮의 태양 아래의 일은 밤에 달빚 아래에서 준비한 것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어둠속에서 밝은 곳을 움직이는 것이 됩니다. 숨어있는 세력이고 힘이고 원리이죠

누군가 잘나가면 그것엔 그림자가 있어 아픔이 동반되어 있는 다른 이면이 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림자든 그림자는 그림자이고 그 그림자가 이후 망신을 거치고 장성을 거치고 반안을 거치는 동안 참고 참는 인내를 지내면 드디어 역마라는 기회가 오게 되어 그 역마 시기에 대들기 시작하는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월살이나 화개나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화개가 겁살을 거치고 재살과 천살을 거치면서 지살의 탄생을 하는 것이

월살이 망신과 장성과 반안을 거쳐서 역마가 되는 것의 다른 모습입니다.

입장 바꾸면 같은 것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니 월살이 자기 것은 숨기고 남이 망한 것을 주워 담으면서 미래를 기다리는 집요함이 되죠

좋게 말하면 밤낮을 안가리고 공부하는 것이고 낮엔 태양 아래서 밤엔 달 아래에서 공부합니다.

이를 가는 것인데 월살 입장에선 남이 장성될 때 화개는 재살로 분명 앞으로 오래도록 감당할 것이 있으니 차근히 준비하는 집요하고 끈질긴 것이어야 하는데 미래 성공을 위해 공부하는 학생이 잘 맞죠

누구나 남이 잘나가는 것을 보면서 뒤에서 자기 무기를 갈고 다듬는 시절을 거칩니다.

남이 놀때, 남이 쉴 때, 남이 안 할 때, 난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이죠 그런 아픈 단련을 거쳐야 자기만의 능력이 생깁니다.

그걸 그림자로 뒤에서 있으면서 언젠간 내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는 음모를 꾸미는 것이기도 하죠

여기가 힘든게 쓰레기 같은 곳이라는 그림자가 또 되어서입니다.

남이 버린 것이 남이 남긴 유산이기도 합니다. 버린 것이 꼭 더럽고 추한 것은 아닌데 어쩔 수 없이 버린 것처럼 된 상황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넘어온 것이죠 그것이 귀중품 일지 돈일지 빚 일지는 알 수 없죠 알 수 없다기보다 다른 것의 간섭을 봐야 하는 거라서 월살이 좋은 것을 받거나 나쁜 것을 받는다가 아니라 뭔가를 받거나 줍는데 그것이 좋을지 나쁠지는 월살과는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천살과 반안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천살도 비우는 것인데 천살 방향엔 비워야 한다고도 하죠 차도 안 막히는 방위라고 하는데 

내가 천살 방향으로 서해고속도로로 가는 진입로가 있는데 항상 막히는 곳입니다. 크크크

이 정도면 덜 막히는 거란 의미인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건지 이상하긴 하죠 도로구조상 그런 것인데 니 천살이니까 막히면 안 된다고 하는 게 어이없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은 이렇게 쓰면 안 되는 것이죠 도로구조상의 문제가 아닌 어쩌다 차가 막히는 현상들이 되는 것일때 쓰는 거죠 퇴근시간이나 출근시간에 누가 봐도 막히는 시간이나 도로에서 이러면 안되는 것이죠 물론 이럴 때도 어쩌다가 한 번의 효과를 바란다면 이걸 쓸 수도 있습니다. 그날따라 천살 방향에 차가 덜 막히는 효험이 있죠 하지만 이런 것보다 기본적인 구조가 더 힘이 세니 항상 하는 것은 안되죠 매일 막히는 시간이나 장소는 매일 막히는 게 정상입니다. 그래서 신살이든 뭐든 쓸려면 기본적인 구조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천살은 하늘입니다. 그래서 뭔가를 내주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비워지는 것인데 또 뭔가를 주기 위해선 가진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채워집니다.

채워지는 이유가 주기 위해서라서 대개는 비워집니다. 천살에 채우는 것을 하는 경우는 학생이 공부할 때입니다.

공부를 채워서 성공해야죠

종교나 학문으로 정신적으로 뭔가를 채우는 것은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서가 되죠

그래서 천살은 뭔가를 달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주어야 하는 숙명이죠

이걸 자기가 천살이라고 "다 내 아래 엎드리라 내가 하늘이니라"하는 사람도 있는데 헛바람이 채워진 것입니다.

채워야 할 것을 오해한 것이죠

한의학과 같습니다. 실한 건 사기이지 정기가 아닙니다.

천살 설정이 있는데 이건 따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요

천살에서 채우는 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다음이 지살인데 태어나기 위해선 태어나기 전에 준비한 것이 결정적인 것이 되는 것이니까요

힘들다고 할 일 없이 있다간 지살에 뭔가 할 수 있는 때가 와도 그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고 감당 못할 수도 있는 것은 천살에서 뭘 준비했는가가 됩니다. 여기서 채워야 그 채운 것으로 다시 한바뀌를 돌아서 옵니다. 그 지구력을 좌우하는 것이죠

 

반안 이 반안은 천살에서 대충 방향인데 천살에서 비워진 게 여기 반안으로 흘러들어옵니다.

기성세대는 신세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강의 뒷물이 앞물을 추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천살에서 준비하고 채워놓은 것을 반안에서 다 소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반안에서 그것을 기반으로 그다음의 것을 창출할 수 있게 됩니다.

반안이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천살을 바탕으로 해서 전제해서 자료로 해서 그다음의 차이를 만드는 것을 하게 됩니다. 그래야 문화가 진보하는 것이고 더 나아지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천살은 반안에 죽어야 합니다. 죽는 게 너무 심하면 양보해야 하죠

그래서 반안은 천살에 해당하는 것을 버리고 버린다는 것이 그것을 소화하고 가 되어 그다음의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우고 채우게 됩니다.

한글만 해도 과거의 천살에서 준 것을 이 시대에선 다양하고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과거의 맞춤법에 틀리거나 너무 외국어가 많다거나 말줄임이나 기괴하게 사용하는 것을 탓하는 것은 천살의 어설픔입니다. 반안이 무엇으로 창출하고 다르게 만드는지나 구경할 일이지 천살은 나가 죽어야 하는 것이죠

지금은 반안의 시대이니까 반안이 주인입니다. 천살이 주인일 때 반안이 뭐라 하던가요 뭐라 하면 때려 죽었을 것이면서 자기가 물러나야 할 때 질척거리면 추한 것입니다.

나중에 천살이 자기 시대가 되면 그것도 입장이 반안이 되는 것이죠 지금의 반안이 그때는 천살이 되어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든다고 할 것이니까요

이건 항상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지 고정된 것은 없죠 한글도 만들어질 당시 반안적인 것이라서 그 당시의 천살에게 박살 났으니까요 그러니 수백 년을 사용하는 것이 미비했죠

다산 정약용 따위도 한글로 학문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어~ 있나?) 그런데 수운 최제우는 한글로 쓴 게 있더군요 그런 면에서 사고하는 질의 차이가 납니다.

즉 반안은 그전의 지식이나 기술이나 문화나 뭔가에 자기의 의견을 첨가하고 다른 관점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반안이 남이 채운 것을 비우고 자기 것을 다시 채우는 것이 됩니다.

이런 반안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죠

그것이 시기가 지나면 천살로 작용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것을 하는 것이 되죠

그래서 천살이나 반안이나 채우는 것이 새로운 것을 많이 만들고 자꾸 만들고 얼마나 새로운 것들로 채워 넣었느냐가 그것을 내어주면서 세상에게 다양함과 다채로움과 활력 있게 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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